2022년 2월의 월말 결산
기억이 흐릿해지는 게 아까워 남겨두는 지극히 개인적인 이야기.
보고, 듣고, 생각하고, 느낀 것들을 바탕으로 매달을 기록해둡니다.
2월에 읽은 책
• <아무튼 예능> - 복길
- 무심한 듯 시크한 드립에 낄낄 웃으며 읽다가도 생각해 볼 만한 지점에서는 고개를 끄덕이게 되는 복길님의 미친 필력. 웃으라고 만든 예능을 보며 웃지 못한 경험이 있다면 이 책에서 그 이유를 찾을 수 있을 거다. 개인적으로는 나영석 PD와 남자 연예인들 떼로 나오는 프로그램에 대한 비평에 크게 공감했다.
"늘 제일 웃긴 것은 웃길 의도가 없었던 것에서 비롯된다."
"불안은 자꾸만 여러 선택들을 빨리 결정하도록 보챈다. 그때마다 나는 템포를 늦춰볼 생각이다. 어떤 지혜나 현명함을 요구하는 분위기에서 벗어나 나에게 닿아 있는 문제들을 해결하고 계획을 세워보자고. 결심과 선택이 필요한 순간에 용감해지고, 나만의 원칙을 만들어 지키자고."
• <고양이와 채소수프> - 이보람
- 매일 하지는 못해도 가능하면 육류 섭취를 줄여야 한다고 의식적으로 생각은 하는데 그것도 아직 쉽지는 않다. 그래도 이 책을 통해 할 수 있는 만큼 가능한 범주에서 비거니즘을 실천한다는 의미의 '마이크로 비거니즘'과 고기를 덩어리째 먹지는 않는 '비덩'이라는 개념을 접하게 되어 실천할 수 있는 새로운 가능성을 찾은 것 같다. 꼭 완벽하지 않아도 시도한다는 것 자체가 이미 한 걸음 나아가고 있다는 거니까.
• <자세한 건 만나서 얘기해> - 황효진, 윤이나
- 글 쓰고 콘텐츠를 사랑하는 여성들의 우정을 엿보는 일만으로도, 나와 공감할 수 있는 사람들이 있어 그래도 아직 세상은 살만한 곳이라는 생각에 조금 더 가까워진다.
"내 이야기를 한다는 것이 나의 모든 것을 솔직하게 드러낸다는 뜻은 아닙니다. 글은 누군가를 놀라게 하기 위한 충격 고백 같은 것이 되어서는 안 될 테니까요. 내가 하고 싶은, 할 수 있는 이야기가 무엇인지 정확히 찾고, 그 이야기를 왜 지금 내가 해야 하는지, 그 이야기를 통해 내가 보여주고 싶은 진실은 무엇인지, 어떤 진실을 통해 다른 사람들과 연결되고 싶은지 알고 글을 쓴다는 의미예요."
"돈이 있든 없든 우리는 당장 필요하지 않은 것을 꿈꿀 줄 안다는 것이, 그것이 인간을 더 인간답게 만든다는 사실이, 저를 기쁘고 뭉클하게 합니다. 그리고 우리는, 서로의 그런 마음을 사치라고 비난하기보다 지켜주는 것이 인간으로서의 품위임을 알고 있죠."
• <규칙 없음> - 리드 헤이스팅스, 에린 마이어
- 충격적일 정도로 파격적인 넷플릭스의 기업 문화. 일 잘하는 뛰어난 동료들만 있는 회사, 연차나 직급 상관없이 직설적으로 피드백을 주고받는 문화, 아무런 통제가 없는 대신 개인에게 무한의 자유와 책임이 따르는 곳. 만약 나라면 그 안에서 버티고 성장할 수 있을까? 상상해봤다. 솔직히 겁은 나는데 욕심도 났다.
"재능이 뛰어난 베스트 플레이어들이 생각하는 좋은 직장의 조건은 재능 있고 협동심이 강한 사람들과 함께 일하는 즐거움이다. 일을 더 잘할 수 있게 해주는 사람이 필요하다."
"다른 사람의 이야기를 할 때는 그 사람 면전에서 할 수 있는 말만 하라."
"자유는 책임의 대립 개념이 아니다. 오히려 자유는 책임을 향해 가는 통로다."
• <메타버스 새로운 기회> - 김상균, 신병호
- 대학생 때 이후 처음으로 공부하는 마음으로 밑줄 쫙쫙 치면서 읽고 요약정리까지 따로 해뒀다. 메타버스란 3D 아바타들이 나오는 제페토보다 훨씬 더 큰 개념이라는 걸 이제 확실히 알았고, 의외로 우리가 이미 접하고 있는 다수의 서비스도 메타버스의 일종이라는 것도 깨달았다. 그렇게 머릿속에 개념이 성립되니 새로운 아이디어도 떠오르고 다가올 미래의 문제점도 걱정되더라. 이제 이걸 일로 풀어보면 참 좋을 것 같은데.
• <베를린 다이어리> - 이미화
- 미친 듯이 그립다. 두 번이나 가봤지만 그래도 또 가고 싶은 나의 최애 도시. 내년쯤엔 갈 수 있겠지..?
"한 아이가 어른의 문으로 걸어 들어가는 시기는 어쩌면 선택에 대한 책임의 무게를 알게 되는 순간이 아닐까."
"떠나는 사람에게 필요한 게 용기라면 버티는 사람에게 필요한 건 인내였다. 그리고 인내는 더 높은 차원의 용기라는 걸 깨달았다. 용기가 없어서 떠나지 않는 것이 아니라 더 큰 용기로 자신의 자리를 지키고 있는 것이었다."
2월에 즐겨들은 K팝
- 원필 솔로 앨범 <Pilmography> '외딴섬의 외톨이', '지우게', '행운을 빌어 줘'
- 태연 정규 3집 <INVU> '어른아이', '그런 밤', 'Siren', 'No Love Again', 'Timeless'
- 수지 'Satelite', 마크 'Child', 프로미스나인 'DM'
2월에 본 영화와 드라마
• 일본 TBS 드라마 <저, 정시에 퇴근합니다> (2019)
- 저녁 6시 땡 하면 바로 퇴근해서 단골 식당의 해피아워 맥주를 즐기는 직장인. 그를 두고 야근 안 하는 특이한 사람, 이기적인 팀원이라고 한 소리씩 하는 건 쉽지만, 그가 주어진 시간을 얼마나 밀도 있게 활용하고 열심히 노력하는 건 알려고들 안 했지. 드라마 마지막 대사처럼 "정해진 시간 안에 이익을 내는 게 훨씬 더 어렵고 도전할 만한 가치가 있다"는 걸 이제는 우리 사회도 받아들이고 여기에 더 가치를 두는 게 맞지 않나 싶다.
주인공 히가시야마 유이는 개인적으로는 마블 히어로도 이보다 대단할 수 없다고 느꼈을 정도로 역대급 호감도, 능력치 MAX 캐릭터였다. 일잘러 기획자인 건 물론이고 무엇보다도 일을 효율적으로 할 줄 알며, 조용하고 차분한 듯 하지만 필요할 때 자기주장은 확실히 하고, 힘들어하는 동료들을 북돋을 줄 아는 프로젝트 리더이기도 하고, 선배 또는 상사에게 필요한 일은 알아서 다 해놓는 센스 있는 후배이기도, 사고 치고 나간다는 신입 붙잡아서 갱생시키는 고마운 선배이기도 하다. 회사에서 여성으로서 부당한 일을 겪는 동료들을 위로하고 도와주는 여성 연대 서사에서는 눈물을 흘릴 수밖에 없었고. (1 회사 1 히가시야마상 도입 시급합니다..)
그가 팀원들을 도운 이유는 딱 하나다. 모두가 자신을 소중히 여기면서 일했으면 하는 마음에서다. 몸을 갈아서 일할 필요도, 자존감을 짓밟히고 상처받으면서까지 일할 필요도, 가족이나 사랑하는 이에게 죄책감을 가질 필요도 없다. 이 세상에 나보다 소중한 일이란 없다. 명심하자.
"상대에게 기대감을 줘야 일하기 쉽다고 생각했어요." "사쿠라미야 씨는 실력이 있어. 그러니까 자신을 소중히 여기면서 일해."
"이 세상에 불행해지려고 일하는 사람은 없어요. 다들 행복하게 일하고 싶어서 고민하고 있는 거죠. 그걸 알고 나니까 나만 괜찮으면 된다고 생각할 수 없더군요."
"회사를 위해 내가 있는 게 아니라 나를 위해 회사가 있는 겁니다. 어떤 경우에도 자신을 희생하지 말라는 겁니다."
• 미국 영화 <어디갔어, 버나뎃> (2020)
- "People like you must create." 역시 사람은 내가 나일 수 있게 하는, 내가 좋아하고 잘할 수 있는 일을 하고 살아야 한다. 안 그러면 병 난다.
• 미국 영화 <북스마트> (2019)
- 부담 없이 보기 좋았던 귀여운 영화. '범생이의 일탈'이라는 미국 하이틴 영화 단골 소재를 뻔하지 않게 다뤄 재미있었다. 몰리와 에이미가 앞으로 살아갈 인생에서 그날 밤이 아주 중요한 경험이자 터닝포인트가 되었으리라 생각한다. 이 세상에는 공부보다 중요한 게 훨씬 많다는 뻔한 말이 어른이 되고 보면 훨씬 더 와닿거든.
• 넷플릭스 오리지널 영화 <모럴센스> (2021)
- 굳이 몰라도 됐을 걸 알아버린 것 같긴 한데, 서로 다른 취향을 존중하자는 주제 자체에는 공감한다. 서현과 이준영이 생각보다 연기를 너무 잘해서 그래도 따스한 시선으로 끝까지 볼 수 있었던 작품.
• 미국 다큐멘터리 <더 게임 체인저스> (2018)
- 흔히들 채식을 하면 단백질 섭취가 부족해 몸의 성장과 회복이 더디고 운동 능력이 떨어질 거라 생각하는데, 의외로 채식으로 식습관을 바꾼 운동선수들이 이전에 비해 눈에 띄게 좋은 성과를 낸다는 내용. 우리 몸에 필요한 영양분은 모두 땅과 채소로부터 오고, 동물은 매개체에 불과하다는 주장은 신선했다. "풀만 먹으면서 어떻게 황소처럼 힘이 센가요?" "황소가 고기 먹는 거 봤어?"
2월에 인상 깊게 본 콘텐츠
• tvN 예능 <해치지 않아 X 스트릿우먼파이터>
- 팬들의 망상이 현실이 될 수 있는 거임? 스우파도? CJ E&M은 히트 친 IP를 재탕하고 삼탕하고 스핀오프까지 만들어버리는 데에 도가 튼 것 같다. 뭐 하나 잘되면 바로 시골 보내서 아궁이에 밥 해 먹으라고 시키는 방송국 놈들. (좋다는 얘기) 그리고 이 댄서들은 왜 예능까지 이렇게 잘해버리는지 넘치는 매력에 다시 한번 반해버렸고, 경쟁과 자본주의의 최전선에서도 여자들의 우정은 피어난다는 걸 확인한 것 같아 새삼 감동했다.
• JTBC 예능 <마녀체력 농구부>
- 기대가 컸던 만큼 실망이 크다. 1화에서 선수들이 여자라고 대놓고 무시하는 남자 감독, 코치, MC의 언행은 정말 무례했다. 오죽하면 장도연 언니 입에서 "여자가 오면 안 되는 거예요?", "여기 사람 초라하게 만드는 곳인 것 같아.."라는 말이 나왔겠나. 운동하는 여성들의 성장 서사를 만든답시고 굳이 시작부터 '(키 작고, 나이 많고, 운동 경험 없는) 여자가 어떻게 농구를 해?'라는 인식을 시청자들에게 강제 주입시킨 거 같아 화가 난다.
개인적으로 농구를 배워보고 싶어 다음 달부터 등록하려고 알아봤는데, 여성이 하고 싶어 하는 마음만으로도 눈치 봐야 하는 스포츠라면 별로 안 하고 싶어 져서 일단 마음을 접었다. 과연 내가 진짜 농구를 시작하게끔 동기부여가 되는 프로그램이 될지, 밉지만 계속 지켜볼 것.
• 왓챠 오리지널 예능 <더블트러블>
- 미안하지만 솔직히 뭘 보여주고 싶은 프로그램인지 잘 모르겠고 연출도, 캐스팅도, 무대도 아쉬운 점 투성이다. 그럼에도 꾸역꾸역 정주행 한 이유는 오직 위클리의 메인 보컬이자 메인 댄서 근데 심지어 랩도 잘하는 내 기준 4세대 아이돌 최고의 올라운더 먼데이를 보기 위함이었음을. 레전드 무대 Love me or Leave me, 유혹의 소나타 남긴 걸로 만족한다. K팝의 미래 먼데이는 이런 컨셉으로 솔로 앨범 내줬으면.
• 유튜브 아넵a_nap
- '이혼 브이로그'라는 신개념 장르로 트위터와 커뮤니티를 뒤흔들었던 유튜버. 갑작스러운 선 넘는 관심에 영상이 다 비공개됐었는데, 최근 다시 업로드를 재개하셔서 너무 기쁘다. 깨알같이 웃기면서도 진지하게 생각할 거리를 던져주는 이 분의 자막 센스는 역시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 제목이 '이혼 브이로그'에서 '일상 브이로그'로 바뀌는 걸 지켜보는 짜릿함과 안도감이란. 결혼-이혼 여부와 상관없이 누군가가 자신의 삶을 온전히 책임지고 열심히 살아가는 이야기는 항상 응원하게 된다.
• 유튜브 킬링보이스 태연 편
- 그리고 이번 달 최고의 콘텐츠. 전 국민 히트곡부터 팬들이 좋아하는 숨은 명곡까지 갓곡들을 미친 라이브로 소화해버리는 우리 언니 클라스. 잠깐이나마 탱콘 다녀온 것처럼 황홀했다. 벌써 여러 차례 콘서트를 다녀왔지만 늘 다음 콘서트가 더더욱 기대되는 가수.
2월에 잘한 소비
• 크로스핏 (우선) 3개월 등록
- 드디어 크로스핏을 시작했다. 전에 하던 인터벌 트레이닝 그룹 PT에서 한 단계 업그레이드하고 싶어 용기를 내봤다. 처음에는 너무 빡세서 온 몸이 두들겨 맞은 것 같이 아프고 팔이 안 펴지는 정도의 근육통에 시달렸지만, 그마저도 운동으로 이겨내고 있다. 매일 프로그램이 바뀌어서 지루하지 않고, 몰랐던 동작을 하나씩 배워가고, 팀원들의 격려 속에서 좀 더 열심히 하게 되는 게 크로스핏의 매력인 듯. 그리고 힘들어 죽겠는데 자꾸 사진을 찍으셔서 (…) 운동하는 내 몸을 조금씩 긍정적으로 바라보게 되는 효과도 있는 것 같다. 아직까지는 재미있어서 시간이 안 됐던 딱 하루 빼고 올 출석했다. 짱 열심히 해서 운동짱이 될 거야!
2월에 맛있게 먹은 음식
- 마포 '마젠타'의 전복 리조또와 로제 파스트
- 성수 '하노이102'의 분짜와 토마토 해산물 수프
2월에 마신 카페
2월에 있었던 일들
-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고 하니, 큰 마음먹고 도전을 해봤다. 쉽지는 않더라. 나는 왜 이렇게 부족한 게 많을까 싶고, 일하는 나에 대한 자존감도 몇 달째 바닥인 상태인데 그게 회복이 잘 안 된다. 이 지긋지긋한 일태기. 그래도 이번 경험을 통해 얻은 교훈을 잘 기억해두고, 시간 될 때 틈틈이 부족한 점을 보완해야지. 언젠가 또 기회가 오면 제대로 잡을 수 있는 준비된 사람이 되자.
- 그래서 요즘 유독 운동에 미쳐있는 걸지도 모르겠다. 몸은 좀 고생하고 나면 효과가 바로 정직하게 나오니까. 그렇게 제발 뭐라도 하루하루 내가 조금씩 더 나아지고 있다는 걸 증명하고 싶으니까. 매일 저녁 퇴근하고 크로스핏 갈 시간만 기다리고, 일주일 중에서는 풋살 가는 일요일만 기다리며 산다.
풋살은 한동안 실내에서 하다가 이번 달부터 오랜만에 야외 구장으로 나가게 되어, 꼭 처음 할 때처럼 매 순간이 설레고 재미있다. 저녁노을 아래 숨이 턱 끝까지 차오르는 걸 느끼며 달리는 기분이 참 상쾌하다. 조금 오글거리지만 새삼 내가 살아있다는 걸 느끼는 순간이다.
2월의 베스트 모먼트
1. 뜻밖의 기회(?)가 왔을 때
2. 태연 킬링보이스 첫 감상, 황홀 그 자체
3. 반년만에 다시 느껴보는 야외 풋살의 상쾌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