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02.
오전 7시, 휴대폰 알람 소리에 눈을 뜬다. 충전기의 전원이 어둠 속에서 녹색 점으로 빛난다. 머리맡에 있는 작은 등을 켜고 몸을 일으킨다. 체크아웃을 하기엔 너무 이른 시간이다.
옷걸이에서 빼든 바람막이 점퍼를 걸치고 엘리베이터에 오른다. 1층으로 내려가는 동안 지퍼를 잠그고, 머리를 보기 좋게 손으로 빗어 넘긴다. 인기척이 없다. 나 혼자 현관에 서서 혀를 깨문다. 흰 싸락눈이 빗금을 그리며 떨어지는 중이다.
우산꽂이에 투명 비닐우산이 가득하다. 호스텔을 거쳐 간 손님들의 흔적이다. 그중 하나를 빼들고 길을 나선다.
후쿠오카 성터에 이르자 눈발이 가늘어진다. 바람은 여전히 차다. 벚나무 길을 가로질러 천수대에 이르자 자전거 한 대가 보인다. 그 주인이 카메라를 들고 데크 난간에 기대어 사진을 찍는 중이다.
천수각은 없고 천수대만 있다. 돌과 돌을 물려 성곽의 흔적을 반듯하게 살려놓아 ‘황성 옛터’의 허전함은 찾을 수 없다. 벚꽃 시즌을 기다리며 민낯에 수분크림만 바르고 얌전히 겨울을 나는 모양새다.
마지막 계단을 오른다. 지대가 높아, 사방 어디다 눈을 둬도 시야가 훤하다. 현해탄을 건넌 바닷바람이 장애물도 없이 곧장 달려들어 우산살을 뒤집는다.
우산을 바로잡고 바람소리에 귀를 기울인다.
시선이 높으면 쓸쓸해질 때가 있다. 새장은 새를 가두고, 성은 성주를 가둔다. 평시에는 성하의 백성들이 우러르는 자리지만, 전시에는 적들이 낙성[落城]을 노리는 자리다. 그 터에서 바람을 맞는다.
후쿠오카 성터를 빠져나와 오호리공원으로 넘어간다. 갑자기 불어닥친 눈보라를 우산으로 막으며 스타벅스로 뛰어든다.
참 별일이다. 녹색 앞치마를 한 여자 스태프가 다가와 내 상태를 살피더니, 한국말로 “괜찮으세요?” 한다. 고개를 끄덕인 뒤 밖으로 나가 옷에 묻은 눈을 툭툭 털고 다시 들어간다. 그러자 기다렸다는 듯 커피가 든 작은 종이컵을 내민다.
이런 환대가 낯설다. 스벅이 아니라 동네 단골 카페를 찾은 것 같다. 마냥 기분이 좋아져서 무슨 말이든 하고 본다.
“날씨가 종잡을 수 없네요.”
“네, 후쿠오카에서 2월에 눈을 맞는 건 좀처럼 드문 일이죠.”
한국말이 유창하다. 싫든 좋든, 드문 일은 기억에 어떤 자국을 남긴다. 그나저나 내가 한국인인 건 어떻게 알았을까?
시계를 보니 7시 50분이다. 카페에는 손님 셋이 띄엄띄엄 앉아 있다. 나는 창가의 바 테이블로 간다. 호숫가 풍경이 눈에 드는 자리다. 트랙 같은 길을 따라 싸락눈이 소금처럼 흩뿌려져 있다.
버터밀크 비스킷을 포크로 자르는 동안 눈이 그친다. 부옇게 내려앉은 먹구름 아래로 갈매기가 난다. 조깅을 하는 사람, 자전거를 타고 출근하는 사람, 코트 깃을 세운 직장인이 부지런히 내 앞을 지난다.
호수의 둘레가 2킬로미터쯤 된다. 머리에 비니를 쓰고 달리던, 빨간 운동화 아저씨를 또 본다. 짐 자무시의 흑백영화 속에 들어앉아 아침을 맞는 기분이다.
이제 남은 손님은 나를 포함해 둘이다. 카페 안은 조용하고, 스태프는 세상 둘도 없이 친절하다. 나는 2박 3일 일정으로 후쿠오카를 찾았다. 오늘이 그 마지막 날이다.
후쿠오카를 떠나기 전에 꼭 들를 곳이 있다. 그것은 나와의 약속이다. 뜨거운 아메리카노로 속을 덥히고 나자 밖으로 나돌 용기가 난다.
후지사키역에서 내려 후쿠오카 구치소로 향한다. 맨션이 즐비한 주택가 도로 끝에 이르자 관공서 건물 하나가 눈에 든다. 외관만 보면 구치소가 아니라 서울 외곽에 들어선 무슨 지방법원 같다.
후쿠오카 구치소를 오른쪽에 끼고 무로미강을 거슬러 오른다. 후쿠오카 타워가 있는 시사이드 모모치 해변에서 멀지 않은 곳이다.
“더운 손의 맛, 더운 손의 맛….”
윤동주의 시 <이별>에 나온 구절을 속으로 되뇐다. 시인의 탄생 100주년[2017년]을 앞두고 구립도서관 로비에 전시된 아크릴 액자로 이 시를 만났다.
수인번호 475, 히라누마 도쥬.
윤동주는 ‘재교토 조선인 학생 민족주의 그룹 사건’으로 1943년 7월 14일 체포되어 2년형을 선고받고 후쿠오카 형무소에 수감됐다. 동갑내기 친구이자 고종사촌 형인 송몽규도 이곳에 갇혀 생을 마쳤다.
그랬다. 후쿠오카 구치소는 과거 후쿠오카 형무소였다. 해방을 여섯 달 앞두고 시인의 입술이 파르라니 식어간 곳.
후쿠오카 구치소를 반 바퀴 돌자, 철책 하나를 사이에 두고 구치소와 붙어 있는 작은 공원이 눈에 든다. 바로 그때다. 북쪽에서 밀려온 바닷바람을 타고 함박눈이 쏟아지기 시작한다.
폰을 들고 두 아들의 사진을 찍던 아주머니가 이쪽을 돌아보며 한마디 한다.
“스고이데스네!”
그녀는 날 일본인으로 알았다. 후쿠오카에서 2월에 눈을 맞는 건 드문 일이다. 나는 웃으며 고개를 끄덕인다.
접힌 우산을 내려놓고 등나무 벤치 앞에 쪼그려 앉아 부옇게 변해가는 공원을 하염없이 바라본다. 구치소의 성긴 철망을 부나방 같은 눈송이들이 넘나든다. 눈발은 점점 굵어지고, 두 아이의 웃음소리는 점점 멀어진다.
시인의 기일[2월 16일]이 얼마 남지 않았다. 그는 너무 일찍 세상을 떠났다. 꼬리를 산굽으로 돌리는 기차처럼.
운무가 걷히자 눈발은 잠잠해진다. 시계를 보니 딱 10분이 지났다. 후쿠오카는 미식의 도시다. 이틀 동안 일곱 끼를 먹었지만, ‘이별의 맛’은 도통 알 길이 없다.
나는 맞잡은 두 손을 꼭 쥐었다 놓는다. 만남에서 이별로 넘어가는 고갯마루에서 기억의 나이테가 또 하나 는다. 그 온기와 한기가 아니고는, 내가 이 손바닥만 한 공원에서 오열한 이유를 설명할 길이 없다.
이별*
눈이 오다 물이 되는 날
잿빛 하늘에 또 뿌연 내, 그리고,
커다란 기관차는 빼─액─ 울며,
조그만 가슴은 울렁거린다.
이별이 너무 재빠르다, 안타깝게도,
사랑하는 사람을,
일터에서 만나자 하고─,
더운 손의 맛과 구슬 눈물이 마르기 전
기차는 꼬리를 산굽으로 돌렸다.
* <나의 습작기의 시 아닌 시>란 제목이 붙은 시고집(1934~1937)에 있던 초기작으로, 1936년 3월 20일에 씌어졌다. 평양의 숭실중학교 선생들이 신사 참배를 거부하고 학생들이 이에 동조하면서 자퇴할 무렵에 쓴 시로 보인다. 시인은 평양을 떠나 용정의 광명학원 중학부 4학년에 편입했다. 스무 살 때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