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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모님과 나

by 무느무느

청바지 단추가 드디어 잠겼다. 임신 전 즐겨 입던 바지였다. 몸무게는 출산 전과 비슷하게 돌아왔지만 늘어난 뱃가죽 때문에 바지들이 영 맞질 않았다. 좋아하는 바지들을 입지 못 하는 게 서글펐는데. 오래간만에 일어난 기분 좋은 일이라 잠시 신이 났다. 상의를 넣으니, 음 다시 잠겨지지 않았다. 오케이. 오늘의 좋은 일은 여기까지.


이모님이 안 계신지 일주일이 넘었다. 이모님 가족 분이 갑자기 입원하게 되셨는데 보호자로 갈 수 있는 분이 이모님뿐이라고 하셨다. 이런저런 검사를 위해 2주 동안 입원해야 하는데 치매 환자는 간병인 구하기가 어려워 이모님이 직접 간병을 해야 하는 상황이 되었다. 당장 아기 둘을 남편 하고만 봐야 하는 것보다도 치매 가족을 돌봐야 하는 이모님 상황이 더 속상했다. 코로나라 보호자도 1명밖에 못 들어갈 텐데. 병원에서 잠도 제대로 못 주무시진 않을지. 평소에도 돌봄 업무를 하시다가 더 난도 높은 돌봄을 수행하러 가야 하는 상황이 야속했다.


고되고 단조로운 일상에 이모님은 반가운 손님이기도 했다. 커피 한 잔 내어드리고 아기 빨래를 같이 개며 나누던 대화가 그리웠다. 내가 간밤에 아가들이 어땠는지 졸린 얼굴로 두서없이 늘어놓아도 이모님은 고개를 끄덕이며 들어주셨다. 하루 일과는 거기서 거기였지만 아가들에 대해선 늘 할 말이 많았다. 매일 조금씩 나타나는 아가들의 새로운 몸짓에 함께 경이로워했다. 하지만 이모님이 안 계시니 말할 사람이 없었다. 다른 사람들에겐 그저 똑같은 아기 키우는 이야기일 뿐이었다. 하루 이틀이 지나니 장난감만 봐도 모빌만 봐도 이모님이 생각났다. “여기 토끼 바 봐~ 이쁜 빨간 토끼~” 아가들에게 모빌을 보여주며 이모님이 하시던 말씀이 귓가에 맴돌았다. 같은 말을 아가들에게 해주다가 목이 멨다. 며칠이 더 지나고는 집에 라디오를 틀지 않게 되었다. 이모님이 좋아하시는 채널이었다. 씩씩한 라디오의 혼잣말이 적막하게 들려 차라리 끄는 게 낫겠다 싶었다. 장난감을 구분하기 위해 아가들 이름을 적어놓은 이모님 글씨를 보니 눈물이 핑 돌았다. 아가들 얼굴만 봐도 이모님이 생각났다. 집안 곳곳에 이모님의 흔적만 보였다. 병원의 보호자 침대는 잘 되어 있을까, 추석은 어찌 보내시려나 이모님 생각이 하루 종일 났다.


이모님께 카톡 메시지라도 드리고 싶었지만 꾹 참았다. 병간호하느라 바쁘실 텐데, 가족도 아닌 내가 귀찮게 해 드릴 필요는 없었다. 분명 가족 같았는데, 이모님 힘드실 때 내가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실상은 연락도 편히 하기 어려운 사이였다. 이모님은 2주의 공백이 너무 기니 다른 시터를 알아보라고 하셨다. 웬만하면 계속 일을 하시려고 할 텐데 그만 둘 생각도 하시는 것을 보면 가족 분의 병세가 많이 안 좋은 걸까. 자세히 물어보진 못 했다. 나는 이모님이 다시 일하실 수 있을 때까지 기다리겠다고 했다. 이모님과 헤어질 생각만 하면 겁부터 났기에 얼마든 기다리는 쪽이 더 쉬웠다.


오랜만에 좋아하는 바지를 입고 외출했다. 이모님이 안 계시니 외출도 쉽지 않지만, 허리가 아파 시간을 내 병원에 가는 길이었다. 외출하며 보니 이모님 카톡 프로필 사진이 카카오프렌즈 캐릭터가 있는 귀여운 이미지로 바뀌어 있었다. 추석 때 손녀가 바꿔준 걸까. 추석은 가족과 보내신 것 같아 다행이라 생각이 들었다. 연락드리고 싶은 마음을 꾹꾹 참다가, 이모님께서 좋아하실 것 같아 활짝 웃는 아가들 사진을 보내며 안부를 물었다. 병원에 도착하자 답장이 와 있었다. 역시나 시터 일은 더 이상 어려울 것 같다고 하셨다. 쇠약해져 가는 가족 분을 다시 요양원에 보낼 수는 없어 집에서 돌봐야 한다고 하셨다. 병원에서 얼마나 마음고생 몸 고생하셨을까. 이모님을 위로해 드리려 하는데 바보같이 내가 자꾸 눈물이 났다. 어쩔 수 없는 작별임에도 이모님은 연신 내 걱정을 해주셨다. 이모님이 아가들 이름을 부를 때마다 눈물을 참기 어려웠다. 병원 복도에서 들키지 않게 훌쩍이며 통화를 마쳤다.


집에 돌아오니 참았던 눈물이 터졌다. 덜렁 혼자 남은 기분을 주체할 수 없어 엉엉 울었다. 분명 아가들을 돌봐주러 오셨던 건데 나도 같이 보살핌 받고 있었다. 아가들 사진은 매일같이 찍으면서 왜 이모님과는 사진 한 장 같이 안 찍었을까. 사실 언젠가 이모님이 아기 안고 있는 모습을 찍으려 했었는데 이모님은 아기 뒤로 얼굴을 숨기셨다. 마치 아기 사진에 시터 얼굴이 들어가지 않게 하는 게 업무상 지켜야 할 선인 것 마냥 자연스러웠다. 시터는 엄마 사진첩에 굳이 없어도 되는 인물이라고 생각하셨을까.


안 맞던 바지가 맞는다. 내 일상이 돌아오려면 먼 것 같은데 시간이 흐르긴 했나 보다. 쌍둥이 육아는 너무 어려웠다. 끝도 없이 펼쳐진 사막에 혼자 놓인 듯한 기분이었다. 그러다 이모님을 만났다. 발밑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보석 같은 모래 알맹이가 얼마나 반짝이는지 이모님이 알려주셨다. 이모님이 가리킨 쪽으로 가면 쉴 수 있는 그늘이 나왔다. 잘하고 있다고 다독여주시던 말들의 온기를 기억한다. 이모님의 조력이 영원히 계속될 것처럼 생각했던 내가 제일 한심했다. 준비 못 한 이별을 정면으로 앓고 속수무책으로 눈물만 났다. 우리 집에 둔 짐을 챙길 겸 마지막 인사를 하러 한 번 오시겠다고 하셨다. 처음엔 이모님 앞에서 너무 많이 울면 어떡하지 걱정이 되었는데, 지금은 눈물이 너무 많이 나도 어쩔 수 없겠다고 생각한다. 비록 이모님은 사진에 얼굴이 안 나오게 카메라를 피하셨지만, 난 이모님이 지킨 선을 성큼 넘어야만 할 것 같다. 내 삶에 얼마나 큰 자국을 남겨주셨는지 에두르지 않고 전하고 싶다. 그리고 그 흔적이 옅어질 때까지 인연의 끈을 꼭 놓지 않을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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