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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빠라는 존재

by 무느무느

첫 직장에 갓 입사하고는 소개팅을 많이 했다. 취업 전쟁에서 승리해 번듯한 직장에 안착한 자들이, 취업을 뽀갰다는 자신감과 새로 획득한 경제력을 바탕으로 눈에 불을 켜고 연애를 하려 들었기 때문이다. 입사 동기들이 서로의 멀끔한 친구들을 소개해주었고, 소개팅은 어떤 주말의 놀이 문화처럼 행해졌다. 친구들에게 소개팅 후일담을 나누는 것까지 말이다.


사회인이 된 몇몇은 자신의 성취에 취해서인지, 소개팅 상대가 자신의 연인이 되어도 적합할지 여러 방면으로 검증하고자 했다. 바로 가족 사항을 확인하는 것이 그에 해당했다. 아버지의 직업은 무엇인지, 형제자매는 어떻게 되며 어떤 상황(결혼 여부, 취업여부 등) 인지. 소개팅 자리에서 호구 조사를 당하다니 기가 찼지만, 그 질문을 던지기 전까지 이 사람이 소개팅에서 가문까지 따지는 종속인지 알 방법은 없었다. 소개팅에서 아버지가 안 계시다는 이야기를 꺼내는 건 여러모로 곤혹스러운 일이었다. 자리에 걸맞지 않게 무거운 이야기이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당황한 상대의 부적절한 반응을 보는 것이 만만치 않게 곤혹스러웠기 때문이다. 최대한 아무렇지 않게 말하는 나에게 장단을 맞추어 너무 가볍게 다른 주제로 대화를 돌리는 것도 싫었고(당시에는 3년밖에 되지 않은 일이었다), 상대가 적절한 말을 찾지 못해 한동안 침묵이 흐르는 경우도 있었으며, 아버지가 안 계시다는 사실로 여러 가지를 유추해 나에 대한 호감이 상실된 눈빛을 느낀 적도 있었다. 이 대화를 하기 직전까지 상대가 맘에 든 경우도 있었는데, 아빠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면 (상대가 나에게 호감이 있었는지와 무관하게) 모두 나의 호감 관문을 통과하지 못했다.


아빠가 내 또래들의 부모님에 비해 일찍 돌아가셨지만 안타까운 건 아빠가 안 계시다는 것보다도 아빠와 다정했던 추억을 떠올리기 어렵다는 점이다. 아빠와의 본격적인 불화는 취학과 함께 시작되었다. 내 마음이 먹구름 없이 화창하던 시절은 7살에서 종료되었다는 뜻이다. 아빠는 교육열이 엄청났다. 초등학생 때부터 시험을 보면 채점한 시험지를 하나씩 훑어가며 무섭게 야단을 맞았다. 어찌나 무섭게 혼났던지 학교에서 채점하면서 틀린 답이 나올 때마다 아빠한테 혼날 생각에 울먹였다. 백점을 맞아야 혼나지 않을 법이었지만 그런 경우는 적었다. 왜 이런 걸 틀려오냐고 몰아세울 때면 나는 서럽게 울었고 다음 날 퉁퉁 부은 눈으로 등교하면서는 항상 수치스러웠다. 눈도 안 떠지는 못난 내 얼굴과 내 점수 모두가.


특히 외국계 회사에서 근무한 아빠는 영어 조기교육의 필요성을 절감하신 것 같다. 하지만 비용 때문인지 사교육을 못 믿어서인지 본인이 직접 영어를 가르치기 시작했다. 초등학교 저학년 언젠가부터 본인이 퇴근하고 어린 언니와 나를 앉혀 놓고 영어를 가르쳤는데, 이때부터 아빠와의 관계는 돌아올 수 없는 강을 건넌 것 같다. 수업 내내 윽박지르고 엄한 표정을 짓는 아빠를 좋아하기는 너무 어려웠다. 제발 오늘은 아빠가 늦게 퇴근해서 수업을 하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속으로 매일 바랐다. 본인의 윽박지름에 울상이 되는 어린 딸들을 보며 아빠는 무슨 생각을 했을까. 단어를 다 외우지 못했기 때문에, 자신의 질문에 오답을 이야기했기 때문에 우리가 그렇게 미워 보였을까. 중학생이 되고서야 아빠와의 영어수업은 종료되었다. 보습학원에 가는 편이 내신에 더 도움이 되었기 때문이다. 나는 절대 아빠 같은 어른이 되지 않을 거라는 그 당시 다짐은, 안타깝게도 클수록 더욱 많은 근거들로 지지되고 굳건해졌다.


크고 보니 내 성격에서 아빠와 닮은 점이 많이 느껴진다. 약간은 꼬장꼬장한 원칙주의자적인 모습이나 종종 튀어나오는 욱하는 성질머리가 그것이다. 아버지가 돌아가시고도 내 삶은 정신없이 흘러갔다. 곧 대학을 졸업하고 취업을 했고, 회사 상사의 폭력적인 언행을 비롯해 어린 여자 신입사원이 겪을 수 있는 안 좋은 시나리오를 다 겪었다. 거친 사회생활을 하면서 예상치 못 하게 아빠의 존재에 대해 자주 생각하게 되었다. 소개팅 때문은 아니다. (하지만 소개팅 덕분에 더 생각하게 된 것도 있는 것 같다.) 아빠는 이 성질머리로 어떻게 회사생활을 그렇게 오래 하셨냐고 물어보고 싶었다. 내가 겪고 있는 풍파 앞에 조금의 지혜를 나누어달라고 부탁하고 싶었다. 어릴 땐 겁이 나서, 조금 커서는 대화가 영 통하질 않아서 아빠와는 거의 말을 하지 않았는데. 아빠가 살아계셨다면 난 지금의 내 나이쯤에는 아빠와 화해할 수 있었을까. 아님 불통인 상태로 계속 평행선을 달리고 있었을까. 후자일 가능성이 클 것만 같지만, 지독한 훈계만 받았지 인생 수업은 받아본 적이 없기에 묻고 싶은 질문들이 살면서 계속 마음속에 쌓인다. 물론 아빠 답만이 정답은 아니겠지만 말이다.


남편과도 소개팅으로 만났다. 그와의 첫 만남에서도 아빠가 안 계신 이야기를 하게 되었다. 남편이 어쩌다 꺼낸 자기 가족 이야기에 나도 뭔가 대꾸를 해야 자연스러울 것 같아서였다. 그가 마음에 들었기에 어색해질 위험을 감수하고 난 용기를 냈고, 그는 유일하게 그 어려운 대화 소재에서 내 호감 관문을 통과했다. 마음이 크게 놓였다. 사실 그의 사려 깊은 반응에 고마웠다. 또래 남자들로부터는 받아보지 못했던 위로가 전해졌기 때문이다. 까다로운 관문을 통과하고 나니 당시 대화는 까맣게 잊어버렸다. 어차피 살면서 아빠의 죽음을 항상 생각하고 살진 않으니까. 그러다 사귀고 얼마 되지 않았을 때였다. 그가 물었다. "아버지 기일은 언제인가요?" 난생처음 받아보는 질문이었다. 기일이 왜 궁금할까. 내가 아빠를 언제 애도하는지 알고 같이 마음 아파해 주기 위해서일까. 그 질문을 하기까지 그는 나의 상실에 대해서 얼마나 오래 생각해봤을까. 짧은 순간 여러 가지 생각에 울컥했다. 사실 각자도생으로 살기 바빴던 우리 가족은 아빠 기일은 따로 챙기고 있지 않았기에, 나는 떠듬떠듬 4월 언제쯤이라고만 답했다. 아빠는 나에게 상처를 많이 준 존재이다. 살아계실 적엔 가부장의 권위로, 마지막에는 갑작스러운 죽음으로. 갑작스럽게 돌아가셨기에 우리 관계를 개선할 기회도 없었다. 그래서 아빠에 대한 나의 감정은 완전한 애도도 그리움도 아닌, 애상과 야속함 사이에서 방황하고 있었다. 꽁꽁 숨기고 있던 내 방황을 누구에게 들킬까 봐 항상 조마조마했기에, 난 아빠에 대한 이야기를 누구에게도 자연스럽게 하지 못했었다. 사실 그동안 연인 관계에 있던 사람들도 돌아가신 아빠에 대해 딱히 궁금해하지 않았다. 어떤 면에선 그게 더 편했지만, 난 그 관계 속에서는 완전하게 존재할 수 없었다. 기일을 묻는 그의 질문에 나는 괜찮은 시늉을 그만두게 되었고, 조만간 그에게 가족에 대한 이야기를 털어놓을 수 있게 되었다. 어려운 문제도 어떤 사람과는 쉽게 풀린다.


임신을 하고 남편에게 여러 번 물었다. 아빠가 되는 소감은 어때? 어떤 아빠가 되고 싶어? 그의 대답은 항상 같았다. “친하게 지내야지. 아가들 커서도 나 많이 좋아해 주도록.” 거창한 가부장의 의무감이 묻지 않은 대답에 매번 놀라지만 듣기 좋아 자꾸 물어보게 된다. 우리 딸들은 그를 진짜 좋아할 것 같다. 내가 받은 위로를 생각하면 안 그럴 리 없다. 임신하면서부터 아가들에게 상처 주지 않기 위해 마음속에 새긴 수많은 명심들을 생각하면 그의 말은 되려 순수하게 느껴진다. 친근한 아빠가 있는 집에서 크는 우리 딸들은 자라서 어떤 사람이 될까. 내가 평생 가졌던 긴장감과 엄격함과는 거리가 멀면 좋겠다. 괜한 질투심에 “크면 안 좋아할걸~ 원래 다 그렇게 되어있어.” 하고 말해본다. 어떤 사람과는 쉽게 풀리듯 우리 딸들과 나도 그런 사이이길 바라본다. 나만 잘하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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