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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탁이 있어요

by 무느무느

내향형 인간은 고민이 많다. 아이가 친구를 사귀면 난 그 엄마와 친해져야겠지? 어린이집 혹은 유치원 담임 선생님과 잘 안 맞으면 어떻게 하나? 걱정이 취미라, 아이로 인해 맺게 될 여러 인간관계도 한 번씩 걱정해본다. 재미는 별로 없다.

산후관리사님이 가시고 베이비시터를 고용하기로 했다. (산후관리사와 달리 베이비시터는 아가만 봐준다. 계약하는 내용에 따라 조금씩 다르긴 하다.) 집에서 낮 시간을 거의 함께 보내야 하기에 예민한 내향형 인간은 걱정이 많았다. 다행히 좋은 분을 만났고 크게 안도했다. 급여를 드리고 고용하는 입장이지만, 아가를 이뻐해 주시고 도와주시니 마냥 감사하다. 시터님이 제공하는 노동과 아이에게 보여주는 애정이 당연한 게 아님을 상기하며, 내 마음이 전해질 수 있게 조심스럽게 행동했다.

첫 급여를 입금하면서 문자를 드렸다. 총액만 알려드리지 않고 급여 계산내역을 정리해서 맞는지 확인해 달라고 했다. 개인 간의 거래이지만 깔끔하게 정산하는 느낌을 드리고 싶었다. 답장에는 뜻밖의 메시지가 있었다. "부탁이 있어요. 이모로 불러주세요."

전혀 예상하지 못 한 내용에 잠시 멍 했다. 산후관리사님부터 나는 줄곧 '선생님'이라 호칭하고 있었다. 사실 아이 돌봄 노동을 제공하는 중년 여성을 대게 '이모님'이라 칭한다. 알고 있었지만 '이모님'이라는 말은 왜인지 입에 붙지 않았다. 표준국어대사전에서 '이모'를 검색해 보면 '어머니의 여자 형제를 이르거나 부르는 말'이라고만 나온다. 어딘가 혈연 같은 느낌이 들어서 서비스 제공자와 이용자의 관계를 흐리는 것 같았다. 고려대한국어사전에는 위의 뜻과 더불어 '남남끼리의 사이에서 정답게 가리키거나 부르는 말'이라고 정의하고 있다. 하지만 이 뜻으로 사용하더라도, 경력에 따라 부여되는 직함이나 직위 없이 모든 근로자가 '이모님'이라는 호칭으로 퉁쳐지는 것이 썩 맘에 들지 않았다. '난 노동하는 여성을 존중의 의미를 담아 부르겠어!' 하는 마음으로 살짝 삐딱선을 탔다. 그런데 불편하셨나 보다. 문자를 한번 더 읽으니 부끄러운 감정이 스멀스멀 올라왔다. 자연스러운 매너를 놔두고 나 혼자 고집을 부리고 있었다. 아 민망해라.

육아에도 아기의 발달과정에 맞는 전문지식과 다양한 노하우가 필요하다. 전문지식과 노하우. 이 두 단어를 들으면 세련된 차림새와 차분하고 감정이 없는 태도가 떠오른다. 고부가가치 산업도 연관되어 있을 것 같다. 그런데 어쩐지 아이를 돌보는 일은 그런 세련됨이나 감정이 절제된 일과는 멀어 보인다. 부모(주로 모)가 하는 육아는 경제적 대가를 받는 일이 아니기에 고부가가치 일도 아니다. 게다가 대부분 중년의 여성으로부터 도움을 받는데 중년 여성이 제공하는 노동이나 서비스를 생각해보면 전문성 있는 직종으로 여겨지지도 않는다. 육아는 사랑과 선의로만 이루어질 것 같은 편견과 환상. 그걸 깨고 싶어서 굳이 '이모님' 대신 '선생님'이라 호칭하며 대하고 있었다.


​내가 시터님을 선생님이라고 부른다고 그 편견이 깨질까? 편견을 깨야할 쪽은 나도 시터님도 아니었는데. 오히려 난 다른 종류의 편견을 가지고 있었다. 선생님이라고 부르면 조금 더 전문성이 있어 보이는 것 같은 편견. 얄팍한 수작을 부려 시터님만 불편하게 해 드렸다. 세련된 이미지가 뭐가 중한가? 인정할 건 인정하자. 어쨌든 돌봄 노동은 일반 노동과는 다르다. 제공자와 사용자의 감정이 배제된 사무적인 관계일 수가 없다. 감정이 격하게 얽히는 관계다. 시터님은 퇴근 후에도 마음을 놓지 못하고 두 아가들 잘 자냐고 문자를 주신다. 먼저 계셨던 산후관리사님은 출근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우리 아가들이 꿈에 나왔다고 하신다. 모든 이모님들이 밤새 육아에 시달린 엄마들을 생각하며 출근 발걸음을 서두르는 걸 안다.

육아하면서 맺게 되는 관계에는 사회생활하면서 익힌 매너나 태도가 살짝 비껴가기도 한다. 내가 다 안다고 생각하지 말자. 난 고작 인간사의 일부분만 경험했지 육아에서는 완전 신입이다. 그래 남자들 세계엔 '형님'도 있는데 '이모님'이 뭐 어떤가? 이모님, 누구 맘, 누구 엄마의 세계. 겸손하게 한 걸음 내디뎌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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