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의는 없다. 내 편과 네 편이 있을 뿐이다. 문장 그대로다. 내게 맞는 게 정의라는 의미다. 다소 거칠지만 정의를 ‘정의’하기가 어렵기 때문이다.
기자를 꿈꾼 건 정의 때문이었다. 더 나은 사회를 바랐다. 사회부를 꿈꾼 것도 그런 이유에서다. 사회부는 모든 사회 문제를 다룬다. 정치인 얘기를 받아 적는 정치부나 기업을 출입하는 산업부와는 다르다. 정치논리나 기업논리와 무관해 사회부에서는 정의를 다룰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지금 보면 착각이다.
정의를 의심한 건 아마도 7년 전부터다. 올해 7년 차 기자이니 기자 생활을 막 시작할 무렵이다. 첫 회사에서 수습생활을 하며 훈련의 일환으로 여러 부서를 돌았다. 첫 부서에서 만난 한 선배는 “정의가 없다”고 했다. 아마도 시청역 인근 횡단보도를 건너면서다. 오래전 일이라 맥락은 기억나지 않는다. 다만 그 선배는 “노조가 좋은 집단인 것 같냐”고 물었다. 아마도 내 대답은 “노조의 요구에도 일리는 있을 것”이었다. 선배의 의도를 읽고 에둘러 표현했다.
그 선배가 즉각 반박한 건 확실히 기억난다. 노조는 연봉을 1억원 가까이 받으면서도 이익을 챙기려는 집단이라는 취지였다. 그 선배는 자동차 출입 기자였다.
나는 아무 말도 못 했다. 수습기자 신분으로선 즉시 반론을 제기하기 어려웠고 반론에 필요한 논리를 만들 자신도 없었다. 그 선배의 주장은 이상하게도 잊히지 않는다. 어쩌면 그때부터 어렴풋이 모든 게 정의이고 모든 게 정의가 아니라고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선배들의 특성인지 모르겠지만 7년이 지난 현시점에서도 비슷한 경험을 했다. 반중시위와 관련해 기사를 쓰려다 아이템이 ‘킬’됐다. 반중시위 내용은 핵심이 아니었다. ‘평화의 소녀상’ 철거 요구 집회를 중심으로 쓰면서 잠깐 거론하는 수준이었다. 하지만 지금의 팀장은 “다른 아이템을 찾자”고 했다. 추가적인 설명은 없었다. 혼자서는 기사가 킬 된 이유를 종잡을 수 없었다. 기사 아이템이 부실했나 생각할 뿐이었다.
며칠 뒤 점심 자리에서 팀장은 ‘프레임’ 때문이라고 운을 뗐다. 여당이 반중시위를 혐중시위로 규정하려 한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반미 시위는 왜 문제 삼지 않느냐”고 했다. 내 아이템의 요지는 그게 아니었다고 하고 싶었지만 참았다. 이미 지난 일인 데다 어떻게 얘기해도 “그런 기사는 내지 말라”고 결론이 나올 것 같았다. 그냥 맥없이 웃고 말았다. 내 정의는 소녀상 철거 요구 문제를 다루려 했지만 팀장은 ‘혐중’ 시위를 봤다.
두 사례를 꺼내든 건 정의가 그만큼 제각각이라는 점을 체감하고 있기 때문이다. 사회부는 문제를 다루고 문제에 얽힌 갈등을 기사로 쓴다. 기사를 쓰는 기자의 정의가 기사에 곧장 반영되는 때도 있지만 윗사람의 정의가 이기는 때도 있다. 그 순간 내 정의는 더 이상 정의가 아닌 게 된다.
직전에 있던 산업부의 정의는 단순했다. 한국 기업이 뛸 수 있게, 또 외국과의 경쟁에서 이길 수 있게 기업 경영을 저해하는 규제는 풀어야 한다는 주장이었다. 특히 중국이 주요 공격 대상이었다. 이미 그들이 잠식한 배터리뿐 아니라 반도체와 디스플레이 산업에서도 한국 기업을 바짝 뒤쫓고 있기 때문에 정부와 국회가 나서서 기업을 뒷받침해야 한다는 논리였다. 한국 기업의 승리가 곧 정의였다.
사회부는 상황이 다르다. 서로 다른 주장이 부딪히지만 모두 각자의 정의가 있다. 어쩌면 그 모든 게 정의의 이름을 빌려 쓴 이해관계일지도 모르겠다. 취재원들은 가끔 내게 묻는다. “기자님이 상식적으로 생각해도 이게 맞지 않습니까?” 그럴 때면 그들이 더 신나서 말할 수 있도록 동조하는 척한다. 그들의 의견에 동의하지 않을 때도 그렇다. 그들은 모두 각각의 정의를 말한다. 정의는 서로 다르고 한없이 가벼울 수 있다는 걸 거의 매일 느낀다. 정의를 정의할 수 없으니 사회부에 남아야 할 동력이 식어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