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타트업, 그리고 나도 몰랐던 애자일
이 일은 과장급이 해야 되는 일인 것 같은데
a. 회사 / 재무팀 / 사원 / 수입관리 / 이름
b. 회사 / 홍보팀 / 대리 / 언론홍보 / 이름
c. 회사 / 경영기획 / 과장(대외적으로만) / 이름 / 영어 이름
a와 b는 과거 회사에서, c는 현재 재직 중인 회사에서 쓰는 명함이자 조직 내 역할에 대한 규정이다. 문득 이 작은 차이가 스타트업으로 이직 후 약 반년 간 나의 '일을 마주하는 자세'에 대해 많은 차이를 가져왔다는 것을 알게 되었는데, 회사의 큰 사이즈와 체계적인 시스템에 익숙했던 나에게는 꽤 큰 변화다.
아주 세부적으로 쪼갠 팀/파트와 그에 맞게 기능적으로 부여된 역할(specific-role), 그리고 직급이라는 role-depth의 기대. 채용 공고를 보는 순간부터 자연스레 학습되는 내 자리에 대한 사측의 몇 가지 기대사항이다. 그에 맞게 면접을 준비하고 입사를 하게 되면서, 스스로도 인지하지 못하는 사이에 내 쓸모를 그 틀과 당위에 맞추었던 한낱 시스템의 일원이 바로 나였다.
'이 정도 사이즈의 일은 좀 부담스럽다, 과장급이 해야 하는 것 같은데'라는 내게 주어진 일의 depth와 전문성 대한 고민이라던지, '이 업무 요청은 내 담당이 아니군' 하며 가볍게 '쳐내는' 한정된 role에 대한 이슈 등이 그동안 나를 매우 가볍게 스쳐갔다. 그때는 내 생각과 행동에 대한 일말의 고려조차 없었던 것 같다.
이런 수평적/수직적인 조직의 틀을 나도 모르게 체득하고 역할을 그에 맞게 한정했었던 것에 대한 뒤늦은 인식이 뒤통수를 띵하게 만들었다. 이 비효율적인 프레임은 사업의 목적을 달성하는 것에 있어 얼마나 도움이 될까, 큰 조직을 이끌어가는 시스템의 일종으로서 언제까지 존재할 수 있을 것인가.. 하는 의문도 당연히 따라왔다. 반대로, 이렇게 role을 한정하지 않으면 무작정 인간을 회사에 '갈아 넣으라'는 것이냐! 에 대한 반문도 함께했다. 비즈니스의 형태와 시장 내 위치하는 사이클과 연관지어 생각하게 되었다. 이 모든 게 스타트업으로 이직 후 하게 된 생각들이다.
지금 내 명함에는 경영기획이라는 부서와 과장이라는 직급은 적혀있으나, 이는 대외 소통을 위한 것이며, 사실상 지원부서 내 소속 간 큰 차이가 없다. (어차피 다 내가 해야 할 일이다 깔깔... ..... 아냐 이거 눈물 아니에요...) 사실상 이 사업을 '되게 만드는' 모든 일을 한다고 보면 된다.
스타트업 입사 초기, 일종의 '시스템'에 익숙했던 나는 바탕화면에 회계/자금/세무/인사/법무/마케팅/콘텐츠 등 기능 중심으로 업무 폴더를 나눠 관리했었다. 그러나 얼마간의 시간이 흐른 지금은 매우 자연스럽게 각 프로젝트 혹은 목적이라는 보다 큰 영역의 플래그를 사용하고 있다. 내 명함에 달려있는 일의 당위와 틀에 대한 모든 것이 차츰 사라지게 되고, 그보다는 각 요소와 사람들의 연결, 그리고 최종적인 목적과 방향성에 대해 생각하게 되는 신기한 경험이었다.
지금도 하루하루 매일 다른 이슈가 빵빵 터진다. 그러면 그 이슈와 인접한 2-3명이 일종의 1일 단위 small TFT를 구성해 문제를 해결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서로가 서로의 일을 진행할 수 있도록 돕고, 물론 정확함을 추구하지만 속도도 중요하기 때문에 보다 빠르게 의견을 나눈다. 이 과정에서 나와 일하는 이 동료가 어느 소속인지는 희미해진다.
요즘은 회사의 체계가 조금씩 잡히며 각자의 role의 색깔이 조금씩 선명해지고 있다. 그렇지만 초기에 애자일하게 뭉치고 흩어졌던 경험은 동료들 사이에 자연스레 배어있다. 애초에 '니 일 내 일'에 대한 경계가 없이, 그 일의 목적을 중심으로 의미를 부여해 움직였었던 매우 신나는 경험.
이제 이 '초기'를 함께 겪지 않은 친구들을 이 무한 애자일 루프에 어떻게 탑승시킬지, 조금씩 고민해가며 문화의 씨앗을 잘 다져나가야 할 타이밍인가, 전체적으로 일이 어떻게 하면 잘 흘러가는지 확인하고 독려할 수 있을까라는, 조금 이른 고민을 하며 김칫국을 왈칵 들이켜보는 아침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