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lur의 9집 앨범 <The Balld of Darren>을 들으며
"네가 처음 기타를 들었던 그날, 무슨 일이 생길지 아무도 몰랐어"
다큐멘터리 <It might get loud, 2008>의 엔딩 씬에서 레드 제플린의 지미 페이지는 이렇게 고백한다. 이제는 허예진 머리를 묶고 만돌린을 튕겨본다. 처음 만져보는 기타처럼.
멋 모르고 시작한 기타가 무언가를 만들어낸다. 곡을 쓰고 앨범을 내고 무대에 선다. 그렇게 음악이 일이 된다. 세상의 많은 일들이 그렇다. 그 일이 어떤 일인지 완전히 알았더라면 과연 그 일을 시작했을까. 모르기 때문에 뛰어들었고 과정 속에서 조금씩 본질에 다가가게 된다. 그래야 그 일의 재미를 알게 된다.
"도대체 언제 재미있어지는 거야?"
언젠가 고된 일들만 계속 이어지던 날, 갑자기 이런 말이 튀어나왔다. 듣고 있던 동료가 웃기 시작한다. 사실 그걸 알려고 고생하는 거다. 그런데, 어떤 일의 재미라는 건 계획대로 찾아오는 것은 아니었다. 이 고비를 넘어서 저 고지에 이르면 '짠'하고 터지는 축포 같은 것이 아니다. 구불구불 끝도 없는 갈림길 사이에서 정신 차릴 새도 없이 휘청거리다가 전혀 예상 못했던 어떤 것이 비집고 들어오는데, 지나고 보면 그게 바로 딱 맞는 길이었다는 것을 알게 되는 이상한 과정이었다.
고전 소설의 플롯에서 등장하는 뜬금없는 구원의 손길, '데우스 엑스 마키나(Deus Ex Machina)'가 괜히 이야기의 필수요소가 된 것이 아니라는 생각을 종종 한다. 픽션은 현실을 반영한다.
블러의 9집 앨범을 들었다. 그들도 처음 기타를 들었던 날들이 아득해져 간다. '91년 공식 데뷔한 이래로 때때로 흩어지기도 했지만 여전히 음악 하러 모인다. 그 세월 동안 음악을 한다는 것은 어떤 것일까.
반짝거리던 눈부신 날들도 지나가고, 그런 시절이 언제였던가 점점 아득해져 간다. 무대에 같이 오르던 밴드들도 하나둘 사라져 가고, 시대는 변한다. 밴드 음악은 그 옛날의 유물처럼 되어간다. 그들을 스타로 만들어준 시대의 공기가 있는데, 그렇다고 올드 패션으로 머물고 싶은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그렇다면 요즘의 트렌드에 어느 정도 맞추어야 할까. 변해버린 시대에 어떤 음악을 해야 하는 것인지 또 다른 숙제가 주어진다.
"음악 활동을 이만큼 해온 시점에 새 앨범을 만든다는 건 어쩌면 상당히 겁나는 일일 수도 있었죠. 그런데 첫날 아침부터 너무나 즐겁고 부담 없이 물 흐르듯 진행됐어요. 저희 넷이 처음으로 모여서 합주하며 만든, 그리고 요즘도 연주하는 곡 'She's so high'이 있는데 딱 그때의 느낌으로 돌아갔어요. 그 첫날 이후로 저흰 하루에도 몇 시간씩 연주하며 오랜 시간을 보냈죠. 그렇게 약 15년을 밴드에 전념하면서 지냈는데, 아직도 때때로 당시의 느낌을 되살릴 수 있다는 건 참 소중한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 - Apple Music 리뷰 중에서
이제는 유명 치즈 브랜드 사업가에 칼럼니스트로도 활약하고 있는 베이시스트 알렉스-예전에도 무대에서 늘 범상치 않았지만, 그렇게 위트가 있는 인물이었다는 건 최근의 발견이다-가 말한다.
참 이상한 일이다. 어떤 일을 오래 한다고 해도 익숙해지지 않는 것이 있다. 어떤 때에는 예전에 어떻게 그 일을 했었는지 신기하게 다가오기도 한다. 맨 처음 만났을 때를 기억하면서 30년이 지나서도 다시 연주할 수 있다는 것도 행운이지만, 당시의 느낌을 되살릴 수 있다니.
라디오헤드는 그들을 스타로 만들어준 'creep'을 무대에서 더 이상 연주하지 않는다. 조지 마이클도 그를 스타덤에 올려준 곡 'faith'를 더 이상 부를 수 없다고 고백한 적이 있다. 물론 그들 각자에겐 다 사연이 있다. 지나치게 소모되어서 더 이상 부르기 싫을 수도 있다. 블러는 그만한 스타덤은 아니었기에-데뷔 앨범부터가 아니었기에 어쩌면 그 같은 기억을 멤버들이 여전히 가지고 있을 수도 있다. 그래서 좋다고 해서 항상 좋은 일은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된다. 좋았던 일이 돌아보기 싫은 기억이 되기도 하고, 그렇지 못했던 일이 더 좋게 다가오기도 한다.
블러의 팬들에게도 같은 숙제가 주어진다. 밴드 음악이 밀려난 시대에 여전히 밴드로 나타난 그들의 음악을 어떻게 들어야 할까. '대런의 발라드(The Ballad of Darren)'라는 앨범 타이틀도 낯설다. 괜한 나만의 편견일 수 있지만 블러에게 '발라드'를 기대한 적은 없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여전히 그렇게 말할 수 있다. 언제나처럼 블러는 팬들을 실망시키지 않는다. 예전 앨범에 비해서 확 다가오는 곡들이 없고 밋밋하다고 하는 의견도 있지만, 처음 앨범을 들으면서 분명해진 것이 있었다. 이 앨범을 계속 더 들어보고 싶다는 끌림과 삶에서 찾아오는 복잡한 감정들을 이토록 자신들의 언어로 생생하게 전달할 수 있다는 놀라움.
이 앨범엔 그동안 다양한 장르를 실험해 오며 지나온 블러의 여정이 녹아있는 동시에 그들의 첫사랑 슈게이징에 대한 고백이 들어있다. 첫 싱글 발표곡 'Narccisst'에서 보여준 자신을 바라보는 방식, 'St. Charles Square'에 깃들어있는 '블러다움' (당연히 이 곡이 타이틀이어야 한다고 느꼈다!), Barbaric의 쟁글거리는 기타 연주 사이 품고 있는 어떤 슬픔. 이 모든 것들이 왜 다른 장르의 예술이 아닌 음악이어야 하는지를 말해준다.
그리고 이 앨범의 라스트 씬이라고 할 수 있는 'The Heights'.
블러는 원년 멤버로 다시 만나 30년 넘게 음악을 한다는 것 자체가 다른 밴드와 다른 자신들만의 정체성이라고 자신하지만, 그 길이 마냥 꽃길이었다고 취해있지 않는다. 이미 충분히 셀럽으로 대중에게 소비되어 왔고, 밴드를 떠나 각자의 일에 몰두해보기도 했고, 각자의 사적인 상실과 슬픔을 통과해 온 지난날들을 꾸밈없이 드러낸다. 돌아본다. 그런데 그건 추억한다기보다는 성찰에 가깝다. 블러의 오랜 팬이라면 알겠지만 성찰하는 태도는 세월에서 온 것은 아니다. 이미 데뷔 앨범부터 스타가 되기 이전부터 블러는 언제나 자신을 성찰해 왔고(어릴 때부터 birthday에 대한 남다른 감정을 들여다보았다), 앨범마다 내면의 소리를 담은 B-side 싱글들은 팬들이 반드시 앨범을 통째로 들어야 하는 이유를 찾아주었다. (의외로 무대에서 전혀 부를 법하지 않은 B-side 곡들도 때때로 블러의 셋 리스트에 포함되어 있다는 것을 팬들은 알고 있다)
그래서 다시 블러의 9집 앨범 <The Ballad of Darren>의 마지막곡 'The Heights'.
단조롭게 시작된 기타의 도입부를 따라 읇조리던 데이먼의 목소리에 점차 그레이엄, 알렉스, 데이브의 목소리가 더해진다. 연주는 점점 절정으로 치닫지만 폭발하기 위한 것이라기보다는 소멸을 향해 달려간다. 유튜브 공식 계정에서 보여주는 그래픽은 이 곡의 분위기를 효과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Blur -The Heights
https://www.youtube.com/watch?v=6tyqxmIxIH4
Seeing through the coma in our lives
Something so bright out there you can't even see it
Are we running out of time
Something so momentary you can only be it?
우리 삶의 코마(혼수상태)를 보면서
너무 밝아서 우리가 미처 볼 수도 없는 어떤 것
우리의 시간이 다하고 있어
너무 순간적이어서 너만이 될 수 있는 어떤 것
한 사람의 삶의 여정에서 무엇이 그를 자신이게 하고 또 소멸해 가도록 만드는 것일까. 시간을 벗어나 볼 수 없어도 순간적이어도 너만이 될 수 있는 것을 위해 저 높은 곳에서 만나자는 메시지를 전하며 질주하던 사운드는 갑자기 툭 끊어진다. 그 모든 것들을 가차 없이 쳐내버린다. 그런데 그 방식이 굉장히 블러답다고 느껴진다.
완전한 소멸일까 아니면 다음을 향한 암시일까.
언제나처럼 상상은 리스터의 몫이지만, 그레이엄은 이렇게 말하고 있다.
"이 곡은 처음에는 거의 순수한 상태에서 시작합니다. 저는 폴오스터 소설의 등장인물에 비유하고 싶습니다. 누구나 인생을 겪어야 하듯, 곡에 나오는 등장인물들은 인생을 겪게 되고 그리고 내동댕이쳐지는 식이죠. 따라서 첫 곡에 언급된 공연과 마지막 곡에 나오는 관객석 맨 앞줄의 이야기는 전혀 다릅니다. 인물이 처한 상황과 그 감각이 완전히 달라요. 순진무구한 청년이 이젠 거의 어떤 영혼 같은 존재가 되어버린 셈이죠. 이 앨범은 그런 여정을 담은 느낌입니다." -Apple Music Reviw 중에서
'Ballad'라는 단어는 서양 고전음악의 장르로 볼 때 음유시인이 불렀던 시와 노래의 형식을 뜻하는 것이라고 한다. 한국적인 의미는 조금 달라서 대중음악 그러니까 사랑 노래로써의 '가요의 한 장르'로 통하기도 하는데, 그래서 '발라드'에 대한 편견이 생긴 것도 같다. 고전적인 의미에서의 발라드라면 <대런의 발라드>는 이 앨범에 잘 들어맞는다. 자신이 지나온 여정을 돌아보는 '대런의 시와 노래'다.
맨 서두에 꺼냈던 지미 페이지의 말은 이렇게 이어진다.
"네가 기타를 들었던 그날, 무슨 일이 일어날지는 아무도 몰랐어.
거기엔 새로운 것도 없었고 새로운 아이디어도 없었지.
그리고 그건 일종의 재능 같은 거야.
창조적인 사람들이 가진,
그건 항상 너에게 일어날 수 있는 일이야.
혹은, 네가 기타를 들기에 너무 늙었다 해도
우리는 그냥 계속 시도하는 거야.
멀리 더 멀리 보려고 노력하는 것을 "
-영화 <It might get loud, 2008>중에서
무언가를 오래 계속해오는 일은 그렇다. 그 여정 속에서 미지의 세계를 발견해 가는 놀라움을 기다리는 것.
당장 눈앞에 보이는 것이 없다고 해서 돌아서거나 멈출 수는 없다.
더 멀리 보게 되는 것.
그래서 우리는 계속 시도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