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은 그렇게 앨범이 된다

홍콩에서 만들어진 blur의 <Magic Whip>

by 베리티

"내가 그 곡들을 좀 봐도 될까?"


일을 깨우는 소리가 들렸다. 데이먼은 솔로 앨범 투어 중에 한 가지 제안을 받는다. 함께 밴드를 해 온 기타리스트 그레이엄이 홍콩 여행 중 녹음해 놓은 작업물을 정리해 보겠다는 것이다. 밴드가 함께 만든 곡들이 있었지만, 꽤 오래 손대지 못하고 있었다. 그러니까 지난 2013년에 있었던 일이다. 블러가 홍콩에서 공연을 마치고 도쿄 페스티벌로 갈 예정이던 투어 일정이 취소되었던 그 해.



갑자기 5일의 일정이 비게 되었다. 연일 계속되는 빡빡한 일정이었다면 오히려 좋았을 수도 있다.(공연 취소에 팬들은 아쉬워하겠지만 그래도 일본에는 자주 간다. 한국과 비교는... 말을 말자) 어쨌든 블러의 예정에 없던 홍콩 여행은 그렇게 시작되었다. 네 명의 멤버들은 홍콩 인파 속에 섞여서 아무렇지도 않게 길거리를 쏘다닌다. 빽빽하게 들어선 홍콩 빌딩들을 지나 지하철도 타고 좁다란 골목을 따라 걸으며 사람들 속으로 섞인다.

깜빡이는 네온사인, 현란한 조명들이 들어차있는 홍콩의 거리. 살짝 녹아서 더 달큼한 콘 아이스크림을 들고 이국적인 정취에 잠겨본다. 애비로드를 거닐던 젊은 날의 비틀스처럼, 거침없는 발걸음으로 이어지는 여행.

다큐멘터리에 그들이 홍콩의 지하철 의자에 나란히 앉아있는 모습이 보이는데, 2집 앨범 <Modern life is rubbish, 1993>의 앨범 속 런던의 지하철 모습과 오버랩된다. 그들에게 가장 잘 어울리는 장면 중 하나이다. 블러는 늘 지하철, 교통체증, 광고 같은 일상을 노래해 왔다. 각종 어워드를 휩쓸며 스타 대접을 받았지만, 스포츠카나 명품을 휘감은 팝스타의 모습과는 거리가 멀었다. 자전거나 지하철, 캐주얼한 옷차림. 20년이 지나도 변한 것은 없다. (데이먼은 사람들이 자신을 접근하기 어려운 존재, 다른 존재라고 생각하지 않는 것이 좋다고 말한 적이 있고, 그레이엄은 팝스타들이 롤스로이스를 몰고 망토를 휘날리며 다니는 모습을 이해할 수 없다고 했다.) 그렇게 '무대 의상'같지 않은 옷들을 입고 공연하는 것도 블러의 정체성이다.


그러다가 네 명의 멤버들은 무엇을 했을까. 어느덧 중년에 이른, 이것저것 다 해 본 어른이 된 그들이 모여서 갈 곳은 언제나 익숙하게 들르던 그곳, 스튜디오였다. 여행지에 가도 꼭 찾게 되는 자신만의 장소는 있기 마련이다. 홍콩 주룽의 스튜디오에서 그들은 잼을 하다 보니 몇 곡의 노래가 만들어졌다. 그 네 명의 멤버가 모였을 때 언제나 해온 것이고 가장 잘하는 일이다.

마지막으로 그렇게 작업했던 것은 <Think Tank> 앨범을 냈던 2003년. 그나마 한 명의 멤버가 비어있는 채로 작업했던 10년 전의 일이다. 어쩌다 보니 모여서 습관처럼 곡을 만들기는 했는데, 이제 누가 나서서 이후의 작업을 해야 할까. 먼저 말을 꺼내기도 머쓱하지 않았을까. 그 일은 언제나 보컬 데이먼의 몫이긴 했지만, 지금의 그는 코앞에 닥친 다른 음악 작업만 해도 산더미이다. 10년이라는 세월 동안의 각자에게 주어진 변화들을 서로 존중해야 했다. 홍콩에서의 여행은 즐거웠지만 그렇게 좋은 여행의 추억을 남기고 그들은 다시 각자의 생활로 돌아왔다.


"기막힌 비유가 있는데.... 그건 맛있게 먹고 접시는 잔뜩 쌓여있는데 설거지는 안 한 것 같았어요."


베이시스트 알렉스가 말한다.

사실 앨범 하나쯤 당장 만들지 않아도 아무도 뭐라 할 사람도 등 떠밀 사람도 없다. 멤버 각자의 분야에서 다들 한 자리씩 하고 있었기에 그들 중 누구도 별로 아쉬울 상황도 아니다.

그렇지만, 그 음악들의 주인이라면, 그러니까 음악을 하는 사람이라면 만든 곡들을 그 상태로 방치해 두고 마음이 편할 수가 없다. 누군가 나서야 일이 될 텐데 이제 누가 그 일을 할 것인가. 말을 하지 않아도 멤버들은 다들 비슷한 심정이었다.

그때 지난 앨범 작업에서 빠졌던 그레이엄이 먼저 나섰다. 언제나 데이먼이 다그쳐서 진행되던 일이었는데, 이제 밴드를 떠났던 그레이엄이 그 역할을 맡았다. 그렇게 놔두었던 홍콩에서 만든 곡들을 만져보겠다고 먼저 데이먼에게 말을 꺼낸 것이다.


오래 작업해 온 프로듀서를 다시 만나 믹싱을 하고 앨범을 가지고 데이먼을 찾아온 그레이엄. 음악에 대해서 만큼은 신경을 곤두세울 수밖에 없다. 굳어져있던 데이먼의 표정이 점점 밝아진다. 그렇게 다시 네 명의 멤버가 모여서 마스터링 작업을 하고 그렇게 또 하나의 앨범이 완성된다.


그리고 난데없이 2015년, 12년 만의 블러의 신보 <Magic Whip>이 발표된다. 런던 소호의 차이나타운 중국집(홍콩 여행을 배경으로 한 앨범의 컨셉을 살렸다!)에서 블러가 공식 인터뷰를 함으로써 기정사실로 밝혀진다. 그리고 런던의 클럽 Mode에서 'There are Too Many of Us'가 연주되었다. 블러의 오랜 팬들, 새로운 팬들 할 것 없이 모두가 기억하는 감격의 순간이다. 언젠가 본 소설의 문장이 떠올랐다.


"마살레스 선생님은 그 여자애가 오늘처럼 연주하게 될 날을 늘 기대했고, 그것을 당연해하고 흐뭇해하는 사람처럼 보인다. 기적을 믿는 사람은 기적이 일어날 때 법석을 떨지 않는다."

-앨리스 먼로, <행복한 그림자의 춤> 중에서



세상에 한 장의 앨범이 만들어지는 방식은 수만 가지가 있겠지만, 2015년 블러의 <Magic Whip> 앨범의 제작과정에서 알게 되는 것은, 결국에는 일어날 일은 일어난다는 사실이다.

'좋은 소설은 가능성의 영역이지만, 위대한 소설은 우연의 산물이다.'는 소설가 제임스 설터의 문장을 좋아한다. 어떤 작품이든 꾸준히 노력을 해야 하는 것은 말할 것도 없지만, 그것을 뛰어넘는 어떤 우연이 작용할 때 위대한 작품이 태어난다. 사람의 의지만으로는 되지 않는 것들. 그럴만한 사람이어서 그렇게 되는 것처럼 그들은 블러에 맞는 사람들이기 때문에 블러가 되었다. 어떻게 그 일이 이루어지는지를 설명하기는 어렵지만 그런 일들이 일어난다. 그레이엄은 '기타 리프만으로는 되지 않는' 어떤 것이 있다고 말한 적이 있다.

나는 블러의 팬인지라, 그들의 작품이 위대한 작품인지에 대한 객관적 판단은 할 수 없다. 하지만 그들의 여정을 함께 하는 것은 세상의 일이 어떻게 이루어지는가를 들여다볼 수 있는 하나의 경험이었다고는 고백할 수 있다. 그것들은 예기치 않게 다가왔다. 이미 30년 넘게 한 밴드의 여정을 함께 할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놀랍지만 그 과정에서 얻은 것들은 말로 다 할 수가 없다.


좋은 일, 또 좋은 일, 계속 좋은 일들이 계속 쌓여서 최고의 작품이 완성되는 것은 아니다.

좋은 일, 이상한 일, 나쁜 일, 최악의 일, 이별, 절망, 불안, 고통 그리고 소망, 인내.

그 모든 것들이 삶에 맞닿아있음을 새삼스럽게 느끼게 되는 시간들.

그 안에서 무언가가 태어난다.


blur-ghost ship

https://www.youtube.com/watch?v=2N9fOZuI0gQ

That light in your eyes, I search for religiously
Oh, when it's not there, oh Lord, it's over me

I got away for a little while
But then it came back much harder

-blur, ghost ship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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