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노래는 호밀밭의 파수꾼처럼

blur의 Tender

by 베리티

유년 시절의 기억은 한 사람의 정체성과 연결된다. 아빠와 여행 중인 11살 영국인 소녀 소피가 보내는 터키의 여름밤은 아직 한낮의 열기를 품고 있다. 소피는 리조트 테라스에서 바람을 맞으며 체스를 두고, 아빠가 마시는 맥주도 한 모금 맛본다. 여행은 그렇다. 특별한 순간으로 가득 차 있기보다는, 함께 보내는 소소한 시간이 특별함으로 기억된다. 왜 고향으로 돌아가지 않느냐는 질문에 아빠는 대답한다. "나는 에든버러에 속해있다는 느낌이 들지 않아. 그게 내가 런던으로 가려는 이유야." 무슨 의미인지 열한 살에게는 어렴풋하지만, 아빠에게는 말하고 싶은 것이 있다.

"네가 원하는 곳이라면 어디서든 살 수 있어. 너는 누구든 될 수 있다."


영화 <애프터 썬, 2022> 중에서

https://www.youtube.com/watch?v=YqEh4fefj18

아빠와의 터키 여행

일성적인 장면 속에서 활기를 불어넣는 음악이 아득하게 들려온다. 소피의 추억 속 BGM은 '블러'이다. 기억의 파편들은 블러의 노래와 함께 살아난다. 음악이 한 사람의 역사 속으로 자리 잡는다. 보편적인 노래가 사적인 장소가 된다. 그 음악이 있기 전에는 발견하지 못했던 또 하나의 차원이 더해진다.



'밤은 부드러워 (Tender is the night)'로 시작하는 이 곡은 스콧 핏츠제럴드의 동명 소설 타이틀에서 인용된 것이다. 어느 날 잠에서 깬 블러의 기타리스트 그레이엄이 종이에 써 내려가면서 완성되었다.


어릴 적에는 시간만 지나면 자연스럽게 어른이 되는 줄 알았다. 아이들을 보호해 줄 수 있는 강하고 든든한 존재. 무엇이 옳고 그른지 알려줄 수 있는 현명함. '아이'와는 전혀 다른 자기 확신으로 분명하게 앞서 나가며 지도해 줄 수 있는 능력. 어른이 되면 다들 갖추게 되는 덕목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겪어 보면 알게 되는 것은 내가 모른다는 사실뿐이다. 문득 샐린저의 소설 <호밀밭의 파수꾼>을 떠올린다. 그 책을 읽던 어린 시절에는 희미하게 다가오던 것들이 번개처럼 갑자기 의미를 획득한다. 어른이라는 건 어쩌면 아이들이 낭떠러지에 떨어지기 전 재빨리 붙들어주고 싶다는 홀든의 고백에 가까운 것이 아닐까. 가만히 그들을 지켜봐 주는 것, 기다릴 줄 아는 것. 함부로 가르치거나 겁을 주지 않는 것, 그리고 위험한 순간을 알아차리고 손을 내밀 수 있는 태도 말이다.


어른이 되어서도 여전히 비틀거리던 나날들. 그 절벽으로 떨어지기 전에 끄적인 하나의 노래가 손을 내민다. 잠들지 못하던 밤에도 퀭한 눈으로 습관처럼 멜로디를 끄적인다. 추락하는 순간에 가장 필요한 것은 어쩌면 내가 가장 많이 해오던 일인지 모른다. 앞날은 그 일이 알아서 이끌어갈 것이다. 우리는 그냥 할 수 있는 것을 한다.


붉은 저녁노을 아래 끝이 보이지 않는 행렬이 이어진다. 발 들일 틈 없이 빽빽이 들어선 사람들이 기다린다. 지난 몇 년 동안 보고 싶었던 꿈같은 장면이 코앞으로 다가왔다.

그 멜로디가 무대를 만들었다. 멤버 간의 어긋남으로 얼룩졌던 오랜 침묵은 깨어졌다. 낙담했던 시간들을 통과해서 헤어졌던 멤버가 돌아와 모두가 제 자리를 찾았던 2009년 블러의 글래스톤베리 공연. 그 노래는 시대를 넘어선 송가가 되었다.


blur -tender

https://www.youtube.com/watch?v=pB8_8tsmg2Y

하나의 메아리처럼 노래가 퍼져나간다. 그 노래는, 그 시간은 세월을 넘어 누군가의 정체성이 된다. 그것이 음악이 이 세계에 존재하는 방식이다.


come on, come on come on

love's the greatest thing that we have

I'm wating for that feeling


어서, 어서, 어서

사랑은 우리가 가진 가장 위대한 것

난 그 느낌을 기다리고 있어


-blur의 Tender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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