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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베리티 Oct 17. 2024

별이 우리 아래에 있지

밀란 쿤데라의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우연을 알아볼 줄 아는 책을 좋아한다.


우연이 어떤 방식으로 작동해서 우리 삶을 바꾸는지를 그려주는 소설이라면 말할 것도 없다. 내 멋대로 '우연의 대가'라고 붙여보고 싶다. 그 양대 산맥이 있다면 내 기준에서는 폴 오스터와 밀란 쿤데라이다.

밀란 쿤데라를 알게 된 것 역시 나에게는 하나의 우연이었는데, 지금도 너무도 유명한 이 책이 알음알음으로 땅밑에서(?) 전해지던 때가 있었다. 그 책이 그렇게 좋다더라, 너 그거 읽어봤어? 그런 식으로 손에 잡히게 되는 책들 말이다.

남들처럼 나도 그 소문을 들었지만 그것만으로 관심을 갖기엔 부족했다. 하고 싶은 것도 해야 할 것도 넘치던 어린 시절, 잔뜩 인상 쓴 소설가 아저씨의 책은 그다지 마음속에 오래 머물지 못했다. 언젠가는 읽어야지, 하는 정도였을 것이다. 


하지만 내가 좋아하는 음악가가 연결되어 있다면 상황은 달라진다. 아마 지금도 BTS의 노래에 관련된 책들을 찾아 읽는 팬들이 있는 것처럼. 

내가 그 이름을 눈으로 찍게 된 것은 영국 밴드 블러(blur)의 데뷔 앨범에서였다. 앨범 커버의 글자 하나하나를 놓칠까 꼼꼼히 살피던 시절, 마지막에 쓴 '땡스 투'. 


거기에는 몇몇 작가들의 이름이 있었다. 그 자리에 밀란 쿤데라가 있었던 것이다!

더 이상의 설명은 필요 없다. 그렇게 쿤데라는 내 손으로 들어오게 되었다. 

처음부터 이 책을 읽지는 않았다. 리스너들은 안다. 잘 모르는 음악가를 제대로 파고 싶다면 데뷔음반부터 시작하는 것이 좋다. 그래서 쿤데라의 데뷔작 '농담'부터 읽었다. 그 책으로 놀라움과 희열을 경험하고 책장에는 쿤데라의 책들이 자리 잡기 시작했다. 그의 가장 유명한 소설인 이 책을 그래서 나는 뒤늦게 읽게 된 편이다.


<참을 수 없는 존재의 무거움>의 우연은 이렇게 불씨를 지핀다.


우리의 일상적 삶에는 우연이 빗발치듯 쏟아지는데, 보다 정확히 말하자면 우리가 소위 우연의 일치라고 부르는, 사람과 사건 간의 우연한 만남이 일어난다. 라디오에서 베토벤의 음악이 나오는 순간 토마시가 술집에 등장하는 것처럼. 이처럼 엄청나게 많은 우연의 일치를 우리는 대개 완전히 무심결에 지나쳐 버린다.


쿤데라가 말하는 '우연'은 삶과 동떨어진 낭만적 환상을 뜻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을 알아보고 나의 삶에 끌어들이느냐, 아니면 무심코 지나쳐버리느냐의 문제이다. 그는 열차에 몸을 던졌던 안나 카레니나를 인용하며 이런 일들이 '인공적'이거나 '꾸며낸'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는 조건을 붙인다. 소설이 아닌 실제 우리의 삶에 있어서도 어김없이 이 법칙은 실재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소설이 신비로운 우연이나 만남에(예컨대 브론스키, 안나, 플랫품, 죽음의 만남이나 혹은 베토벤, 토마시, 테레자, 코냑 잔의 만남 같은 것)에 매료된다고 해서 비난할 수 없는 반면, 인간이 이러한 우연을 보지 못하고 그의 삶에서 미적 차원을 배제한다면 비난받아 마땅하다. 


쿤데라에 따르면 우연을 알아보지 못하는 것은 그저 무분별한 행동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비난받아 마땅한 것이다. 그리고 이 소설이 그 논리를 하나하나 풀어가기 시작한다.


1. 그로테스크한 6의 징조, 우연


'달팽이가 자신의 집을 메고 다니듯 자기도 자신의 삶의 방식을 휴대하고 다닌다는 생각을 하며 행복을 느끼는' 외과의사 토마시.  

유부남인 것과 전혀 상관없는 그의 지나치게 과도한 여성 편력 역시 이런 세계관의 일부였을 것이다. 그의 200 여 명에 이르는 애인들 가운데 하나로 스쳐갈 뻔했던 테레자를 처음 만나는 순간 역시 '6'이라는 숫자의 우연에서 비롯되었다. 토마시의 '고품격 플러팅'에 깜짝 놀랐던 장면이기도 하다. 사실 이 장면에 도달하기 전까지도 6단계의 우연이 필요했다. 토마시가 도착한 어느 호텔의 술집에서 일하고 있던 테레자.

그녀는 술집에서 일하면서 책을 펼쳐놓는 사람이었고, 토마시는 그 책이 무엇이었는지가 궁금해졌다. 그리고 계산을 한다는 핑계로 질문을 던진다. 


"호텔 숙박비에 포함시켜 주시겠습니까?"라고 그가 물었다. 
"물론이죠, 몇 호실에 머무르시나요?" 그는 끝에 6자가 빨간색으로 새겨진 나무 열쇠고리를 보여 주었다. "이상한 일이군요, 6호실에 계시다니."
"뭐가 이상하지요?" 부모가 이혼하기 전 그녀가 머물던 프라하의 건물이 6번지였던 것이 그녀는 떠올랐다. 그러나 그녀는 엉뚱한 말을 했다. (우리는 그녀의 잔꾀에 감탄할 수밖에 없다. )
"당신은 6호실에 머물고 나는 6시에 근무가 끝나거든요."
"그리고 나는 7시에 기차를 타지요." 낯선 이는 대답한다.


이 대화만 봐서는 어떻게 6이 만남으로 연결되는지 알기는 쉽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한 가지, 우연은 한 사람만의 플러팅으로 완성되는 것은 아니다. 6으로 작업을 시작한 토마시에게 무심한 듯한 포장으로 의미심장한 메시지를 던지는 테레자 역시 선수였던 것이다. 6시에 끝난다는 사실을 알리고, 여기에 지지 않는 토마시는 기차 타는 시간을 알려줌으로써 두 사람만이 아는 약속이 이루어진다. 

결국 6시 이후 두 사람은 만나고, 테레자는 기차역에서 토마시를 배웅하고, 토마시는 테레자에게 명함을 건넨다. 이것으로 토마시와 테레자의 우연은 미래로 달리게 된다. 


2. 19세기의 지팡이, 20세기의 책


테레자가 이러한 작업을 알아볼 수 있었던 이유가 있다. 그에게는 '책으로부터의 동지애'가 있었다. 

누구에게나 자신을 알리고 싶은 신호가 하나씩은 있다. 아무나 알아채도 싫고, 진정으로 알아보는 사람과 만나고 싶은 욕구. 낮은 신분과 억눌린 체제에서 자란 테레자에게는 그것이 책이었다.


테레자에게 책이란 은밀한 동지애를 확인하는 암호였다. 그녀를 둘러싼 저속한 세계에 대항하는 그녀의 유일한 무기는 시립 도서관에서 빌려오는 책뿐이었다. 특히 소설들. 그녀는 필딩에서 토마스만까지 무더기로 소설을 읽었다. 책은 그녀에게 아무런 만족도 주지 못하는 삶으로부터 벗어나는 상상의 도피 기회를 제공했지만, 그 자체로도 의미가 있었다. 그녀는 겨드랑이에 책을 끼고 거리를 산책하는 것을 즐겼다. 책은 그녀에게 19세기 멋쟁이들이 들고 다녔던 우아한 지팡이와도 같았다. 책을 통해 그녀는 남과 자기를 구분 지었다.


술집에서 일하는 신분인 주제에 테레자는 감히 책을 암호로 삼았고, 그곳을 떠나고자 하는 갈망과 불안 사이에서 비틀거리기도 했다. 그날의 토마시의 목소리는 그녀의 '실낱같은 끈'을 붙들어주고 날아오르게 했다.

물론, 그 동지애가 언제나 승리하는 것은 아니었다. 때로 사비나는  그 신호에 속아서 나락으로 떨어지기도 했다. '책으로부터의 동지애'가 온통 밝은 빛만으로 채워진 세계였다면 나는 이 소설에 그토록 놀라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 어둠을 낱낱이 까발렸기에 결국에 슬픔으로 고개를 떨구게 되는 장면까지 만나게 되는 것이다. 이 책을 읽으면서 나는 책을, 음악을 좋아한다고 쉽게 말할 수 없는 이유를 확인하게 되었다.


테레자는 토마스의 바람둥이 기질을 모르지 않았다. 그 역시 숨기지도 않았다. 테레자는 그런 것에 질척대는 여자가 아니었고, 자신의 일에 몰두할 줄 아는 사람이었다. 또한 그에게는 사랑스러운 개 '카레닌'이 있었다. 카레닌은 테레자에게 '삶의 시계'가 되어주는 존재였다. 무엇보다도 마음이 약해질 때면 그는 먼저 토마시를 떠날 아는 사람이었다. 그럴 때면 카레닌의 털북숭이 머리에 뺨을 대고 이렇게 말하곤 했다. "카레닌, 날 원망하지 마. 다시 한번 이사를 가야겠다."

그것이 사비나가 알고 있는 강해지는 방법이었다.


3. 나는 그것을 위해 싸울 거야.


그렇게 떠나간 사비나가 사랑하게 된 남자는 스위스의 교수 프란츠다. 

프란츠는 안정된 직장에서 평온하게 살아가는 것처럼 보였지만, 그것은 어떤 면에서 체념에 가까웠다. 그가 스위스에 살게 된 이유가 있었다. 그렇게 피가 돌지 않는 사람처럼 살던 일상 속에서 혁명에 대한 환상을 깨워주는 여자를 만난다. 사진작가이자 미술가로 보헤미안의 기질을 지닌 여자, 사비나였다. 


프란츠가 모든 혁명을 동경하는 이유를 이런 측면에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그는 한 때 쿠바에 공감했고 다시 중국에 공감했으나 그들 체제의 잔인성에 역겨움을 느껴 이제 그에게 남은 것이라곤 아무런 무게도 없고 생기도 없는 언어의 바다뿐이라고 스스로 쓸쓸하게 인정하고 말았다. (여자들도 없고 승진도 없는 고독 속에서) 조금은 좋은 평판을 받은 학술서적을 몇 권 발간했다. 그러던 어느 날 마치 성모 발현처럼 사비나가 솟아났다.


한때 혁명을 동경하는 피를 지녔으나 체념해 버린 프란츠의 마음을 알 것 같아서 조금 슬퍼진다. 젊은 날에는 이런 자신을 상상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렇지만 이 역시 삶의 비밀이고 일부였다. 

그런 그에게 꿈을 일깨워준 사비나는 결국 삶의 원동력이었고, 이 책의 유부남들은 자신의 부적절한 관계를 굳이 숨기지 않는다. 프란츠는 결국 아내에게 이별을 선언한다. 그런데 그 장면마저 놀랍다.


어느 날 그는 부인을 찾아가 다른 여자와 재혼하고 싶다고 말했다. 마리클로드는 고개를 저었다.
"이혼한다 해도 아무것도 달라지지 않을 거야. 당신은 아무것도 잃을 거 없어. 당신에게 다 주겠어."
"내게 돈은 중요하지 않아."
"그러면 뭐가 중요하지?"
"사랑"
"사랑이라고?" 하며 프란츠가 놀란다. 마리클로드는 미소를 지었다.
"사랑은 전투야. 나는 오랫동안 싸울 거야. 끝까지."
"사랑이 전투라고? 나에겐 싸울 마음이라곤 털끝만치도 없어."라며 프란츠는 밖으로 나가버렸다.

 

쿤데라는 버림받는 듯 보이는 아내에게도 이토록 꿈같은 언어를 선사했다. 정치에 지쳐버린 프란츠는 불륜- 또 다른 사랑으로 도피하려 하지만 그의 아내는 비참할 수 있는 그 순간에 '사랑'을 말한다. 게다가 끝까지 싸우겠다고 벼르기까지 한다. 그렇다면 프란츠는 이 싸움에서만큼은 져버린 것일까.


4. 희망 없는 죽음의 대기실


테레사는 산으로 갔다. 총구를 겨누고 있는 사내들이 있는 그곳으로.

고요한 오솔길이 이어지고 안도감을 주었다. 시끌벅적한 프라하에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언덕.

그녀는 '세상일을 너무 심각하게 받아들이며 매사를 비극으로 생각했기 때문에 가벼움을 배우고 싶었던 것이다!'

사내들의 질문은 오직 하나뿐이었으며 그것만이 이곳의 규칙이었다. 정말 원하는가.

오로지 자신의 선택에 의한 것만이 유효한 세상이었다.

테레자는 그렇다고 대답하고 순서를 기다린다. 그렇지만 어쩐지 맨 나중에 총을 겨누기를 부탁한다. 먼저 서있던 눈이 가려진 남자들이 하나둘 쓰러져간다. 소음기가 장착되어 총성조차 들리지 않는 죽음.

테레자는 눈을 가리려 하는 그들을 막는다. 모든 것을 보면서 마무리하고 싶다고 말한다. 하지만 그것이 진짜 이유였을까? 이제 사내가 총을 든다.


그녀는 더 이상 용기를 내지 못했다. 자신의 나약함에 절망하면서도 그것을 통제할 수 없었다. 그녀는 말했다.
"아니에요! 이건 나의 뜻이 아니에요."
사내는 즉각 총구를 내리고 침착하게 말했다.
 "당신 의사에 따른 것이 아니라면 우린 할 수 없습니다. 그럴 권리가 없어요."
그녀의 뜻이 아니라서 처형할 수 없다는 점에 대해 테레자에게 양해를 구하려는 듯 그의 목소리는 친절했다. 이 친절함이 그녀의 가슴에 파고들었다. 그녀는 나무껍질 쪽으로 얼굴을 돌리고 울음을 터뜨렸다.


이 장면이 너무 고통스럽게 다가왔다. 울음을 터뜨릴 수 없는 테레자의 마음.


5. 안녕, 카레닌


테레자의 삶의 시계였던 카레닌의 시간이 저물고 있다. 개를 안락사시키는 것은 법적으로 혀용되었으므로 토마시는 카레닌의 마지막 숨을 돕는다. 이렇게 테레자의 시간 역시 저물어간다.


테레자는 자기 꿈을 떠올렸다. 카레닌은 작은 크루아상 두 개와 벌 한 마리를 낳았다. 이 문장이 돌연 비문처럼 보였다. 그녀는 사과나무 사이 이런 비문이 새겨진 묘비를 상상했다.
'여기 카레닌이 쉬고 있다. 그는 작은 크루아상 두 개와 벌 한 마리를 낳았다.'
정원의 어둠이 짙어갔다. 밤도, 낮도 아니었고, 하늘에는 죽은 자의 방에 켜진 채 잊힌 램프 같은 창백한 달이 떠있었다.


수많은 애인들을 거친 토마시의 기억 속에 남은 단 하나의 장면은 무엇이었을까.

그는 자신이 그랬던 것처럼 테레자에게도 함께 머물 영원한 미래를 기대할 수 없다는 것을 알았다.

그리고 잠결에도 자기 손을 잡고 곁에 누워있는 그녀를 보았다. 얕은 잠이었을까. 테제라는 그 순간 눈을 뜨고 토마시를 본다. "뭘 봐?" 그녀가 묻는다. 이 순간의 대답만큼은 영원이 될 것이라는 것을 토마시는 알았다.


"별을 보고 있어."
"거짓말하지 마. 당신은 별을 보고 있지 않아. 당신은 땅바닥을 보고 있어."
"비행기를 타고 있으니 별이 우리 아래에 있지."
"아 그런가?"
테레자는 토마시의 손을 더욱 힘껏 쥐고는 다시 잠들었다. 토마시는 지금 테레자가 아주 높게 별 위로 나는 비행기의 창밖을 내다보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그것은 정말 꿈이었을까.


blur -sing

https://www.youtube.com/watch?v=YdrFpPJgxC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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