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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베리티 Oct 24. 2024

별똥 떨어진 데서

윤동주의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

북촌 방향으로 걷다가 작은 교회를 만난다.


몇 년 전 이 돌담길을 걷던 기억이 떠오른다. 그때도 이 교회를 한참 바라보았다. 작은 십자가 아래로 스테인드 글라스로 된 창이 알록달록 빛나고 있었다. 어쩐 일인지 그날은 그 창이 있던 자리에 종이 보인다.

이상하게도 같은 장소에서 늘 멈춘다. 높은 빌딩들에 가려지지 않은 파란 하늘의 단출한 교회 풍경이 지나가는 사람을 잡아끄는 비밀이라고 있는 것일까.

그러다가, 문득 그저 눈에 보이는 것 때문만은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된다.

 

쫓아오던 햇빛인데
지금 교회당 꼭대기
십자가에 걸리었습니다.

첨탑이 저렇게도 높은데
어떻게 올라갈 수 있었을까요.

- <십자가> 중에서, 윤동주


태양을 등지고 그림자를 밟으며 달리던 때가 있었다. 그것만으로도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뛰다가 동네 아이들과 별 것도 아닌 일로도 크게 소리 내어 웃던 시절. 끈 달린 풍선을 받아 들고 좋아하며 뛰다가 놓쳐서 한없이 멀어지던 하늘을 바라보던 그때의 먹먹한 마음이 이 시를 올려다본다.


윤동주의 시 '십자가'의 일부가 그 풍경에 있었다. 어릴 적에 무심코 읽었던 시어들이 그대로 머물지 않고 세상으로 계속 나아가기를 기다리고 있었을까. 시인이 보았던 그 교회당은 아니겠지만, 만일 그 장소가 눈앞에 나타난다면 여기가 아니었을까. 시인이 있던 자리에 서 있는 것 같다.

왜인지 설명할 수도 없고 근거도 없다. 하지만 다른 풍경에서는 그 시가 떠오르지 않는다.


용돈 받아서 제법 내 멋대로 학용품 정도는 살 수 있었을 때 처음으로 산 책은 윤동주의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였다. 지금도 책장 한 구석에 꽂혀있는 한자가 적당히 섞인 아무 디자인 없는 표지에, 펼치면 오래된 종이 냄새가 나는 그 시집.

그땐 몰랐는데 지금 보니 인쇄도 활자로 직접 찍은 것 같다. 요즘 장비들의 매끈한 인쇄 상태와 다르게 잉크가 뭉친 흔적이 있는 궁서체. 태어나기 전부터 집에 쭉 있었던 책들이 아니라, 손수 고른 어린이의 '고서'처럼 다가온다.


모두가 다 아는, 교과서에 나오는 그 시인 윤동주를 좋아한다. 다시 생각해 본다. 왜였을까.

그의 시에는 별이 자주 보인다.

서시의 깊은 여운은 '오늘 밤에도 별이 바람에 스치운다'로 간직되었고, 제목부터 반짝이는 '별 헤는 밤'. 별 하나하나에 사랑하는 것들이 이름을 부르는 이미지들은 말로 다 채워지지 않는 아득한 그리움을 보여주었다.  그 시에서는 슬픔이 깃든 목소리가 들린다.

'별이 아슬히 멀듯이' 사랑하는 것들은 손에 닿지 못하고 있어. 그렇게 멀리 있어. 하지만, 그래도 별을 바라보며 떠올린다면 영원히 멀어지는 것은 아니겠지.


나는 무엇인지 그리워
이 많은 별빛이 내린 언덕 위에
내 이름자를 써 보고,
흙으로 덮어 버리었습니다.

- <별 헤는 밤> 중에서, 윤동주

 

이 시를 잊지 못하는 것은, 이 부분 때문이다.

별 하나씩 사랑하는 것들의 이름을 부르다가, 정작 자신의 이름은 그 빛이 내린 언덕 위에 써본다. 그게 끝이 아니라 흙으로 덮어버린다.

내 이름 석 자를 쓰고 다시 흙으로 지워버릴 수 있는 마음.

윤동주를 특히 좋아하는 이유는 분명 그 때문일 것이다. 주저하고 서성대며 머뭇거리는 발걸음.

언젠가 그의 수필에서 정확하게 그 발걸음을 마주했다.


얼핏 생각하기에는 내 바닥을 반듯이 받들어 주는 것도 없고 그렇다고 내 머리를 갑박이 내려 누르는 아무것도 없는 듯 하다마는 내막은 그렇지도 않다. 나는 도무지 자유스럽지 못하다. 다만 나는 없는 듯 있는 하루살이처럼 허공에 부유하는 한 점에 지나지 않는다. 이것이 하루살이처럼 경쾌하다면 마침 다행일 것인데 그렇지를 못하는구나!

- <별똥 떨어진 데서> 중에서, 윤동주


늘 자유롭고 싶었다. 그런 사람들을 동경했다. 하지만 실상은 그렇다. 나를 압박하는 눈에 보이는 거대한 벽들은 딱히 없는데 늘 주저하고 머뭇거렸다. 그렇게 느슨하다고 해도 그 나름의 멋을 즐길 줄 안다면 좋으련만 그 편도 못 된다. 이도 저도 아니다. 어정쩡하다. 언제까지고 계속 자유롭고 싶기만 하다가 그렇게 저물어갈지도 모르겠다는 두려움으로 밤이 되면 스르르 눈을 감는다. 내일의 태양을 믿기로 하지만.


어른이 되어서 알게 된다. 윤동주에게 그토록 마음이 갔던 이유를.

그토록 빛나는 재능을, 신념을 가진 인물도 그 감정을 알았다는 사실이 단조의 멜로디처럼 들려온다. 영원히 잊혀질 수 없는 탄식이자 위로처럼.


언젠가 피아노 레슨을 받던 날 선생님이 묻는다. 왜 그렇게 단조의 음악들을 좋아하냐고.

하지만 어떤 음악들은 장조여도 단조처럼 슬프게 들린다. 모차르트의 맑고 청아한 멜로디가 그렇듯이.

우리의 내면에 오래 머무는 것은 가벼운 기쁨보다는 아득한 슬픔인 것은 누군가 어떻게 한다고 달라지는 일이 아니다.


시인의 주저하는 발걸음은 그저 서성대는 것에서 끝나지 않았다. 그는 가야 할 곳을 끝까지 바라보았고 그곳이 어디인지를 찾아낸다. 별똥별의 꼬리까지 놓치지 않는 믿음이 잠재해 있다. 그래서 <별똥 떨어진 데>는 이렇게 마무리된다.


어디로 가야 하느냐 동이 어디냐 서가 어디냐 남이 어디냐 북이 어디냐. 아차! 저 별이 흐른다. 별똥 떨어진 데가 내가 갈 곳인가 보다. 하면 별똥아! 꼭 떨어져야 할 곳에 떨어져야 한다.

-<별똥 떨어진 데에> 중에서, 윤동주


'모든 죽어가는 것들을 사랑'하려 했던 시인이 마음은 별똥 떨어지는 자리를 꼭 붙든다. 떨어져야 할 곳에 정확히 떨어지는 그 아름다움으로 생명을 다하려고 한다. 한번 더 신발끈을 매고 외친다.


'별똥아! 꼭 떨어져야 할 곳에서 떨어져야 한다.'


시인은 그곳에서 생을 다했다.

마침내 그 자리에서 발걸음은 정확하게 멈춘다.



Mozart Piano Sonata No16 in C Major , K 545 2악장 Andante

https://www.youtube.com/watch?v=rnNMhe8-u6w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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