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eat. 트루먼 카포티, 가즈오 이시구로, 레베카 솔닛, 데버라 리비
페이지를 넘기다가 뜻밖의 방을 마주친다.
그 방을 드나들던 작가의 발자국이 독자를 초대하는 것일까.
소설에서, 에세이에서 그들이 오랜 시간을 보낸 공간에 도착할 때가 있다. 눈앞 끊임없이 무언가를 계속 끄적이며 작가로서 자신을 발명하고 예언하고 싶은 한 사람이 보인다. 불안한 날에도 아무런 확신이 없는 날에도 책상에 앉아서 씨름하며 보낸 시간들. 그곳에서 내 손에 들어온 이 책 이전의 또 다른 사람을 만난다. 그래서 언제나 작가들을 자신의 방으로 만나는 것은 즐거운 일이다. 내 친구의 방을 알면 그를 더 잘 알게 느껴지는 것처럼, 책 속에서 보물처럼 숨겨둔 그들의 공간을 만나는 순간은 오래 기억하게 된다. 더 잊지 않게 된다.
영화 <티파니에서 아침을>의 오프닝은 클래식의 위엄을 고스란히 보여준다. 블랙 드레스에 커다란 선글라스를 끼고 베이글과 커피를 마시는 오드리 헵번의 우아함을 누가 대신할 수 있을까.
그런데 원작 소설을 펼치면 또 다른 매혹이 다가온다. 주인공의 시선을 따라 작가 트루먼 카포티가 살던 뉴욕의 그 방이 보인다.
언제나 예전에 살던 곳에 마음이 끌린다. 집도, 동네도.
이스트 70번가의 갈색집. 뉴욕 생활을 시작하고 처음 살게 된 아파트. 원룸으로 된 작은 아파트에는 낡은 가구가 빼곡히 놓여있었다. 기차에서 보낸 무더운 날을 연상시키는 붉은 벨벳 소파와 큼직한 의자도 있었다. 회벽토로 바른 벽은 누루 죽죽 한 색깔이었다. 세월의 더께가 쌓여 갈색으로 변한 로마 유적지 그림이 집안 곳곳에, 심지어 욕실에도 걸려있었다. 딱 하나인 창은 화재용 비상구에 면해있었다. 그런 집이었건만 주머니 속에 열쇠가 만져질 때마다 잔뜩 들떴다. 우울한 분위기를 풍길망정 내 첫 아파트고 내 책이 거기에 있었다. 깎을 연필이며 모든 것이 거기에 있었다. 작가가 되기 위한 내 꿈을 위해 필요한 모든 것이
-<티파니에서 아침을> 중에서, 트루먼 카포티
눈이 번쩍 뜨일만한 물건은 아무것도 없다. 마음이 끌린다는 것은 그 이상이 있을 때가 아닐까 싶다. 오히려 보잘것없어 보일 때 그 사물이 본질을 드러내는 것은 아닐까. 자신을 오랫동안 바라봐주고 관심을 가져준 대가로 함부로 허락하지 않는 세계를 열어놓는다. 그래서 겉모습만으로는 파악할 수 없는 유대가 생긴다.
딱 하나인 창이 비상구에 막혀있는, 말하자면 벽 뷰(view) 같은 공간이어도 그 방은 매력을 잃지 않았고 카포티의 설렘이 그렇게 표현되었다. 주머니 속 열쇠가 만질 때마다 들뜨는 감정.
그 방은 작가가 되기 위한 모든 것이 제 자리에 있었으므로.
'나는 가난했다'는 단순한 고백으로 시작하는 공간도 있다. 버려진 가구, 중고품 가게에서 가져온 물건들로 채워진 방이었지만 레베카 솔닛은 물건들이 자신보다 나이가 많다는 사실이 좋았다고 했다. 그 안에는 오래된 물건을 귀하게 여기는 빛나는 내면이 숨 쉬고 있었다. 솔닛은 그 생각이 미적으로도 마음에 들었다. 그의 방은 이민자들이 많이 거주하던 샌프란시스코의 라이언 스트리트의 어디쯤이었다.
내가 살던 건물은 그보다 좀 더 위엄 있는 빅토리아 양식의 목조 건물들 틈에 낀 1920년대 회반죽 건물이었다. 하지만 나름의 운치와 매력이 있었다.
내 집에는 좁은 공간을 넓게 느끼도록 고안된 장치들이 설치되어 있어서 재미있었다. 폭 좁은 다리미판은 접어서 벽에 넣을 수 있었다. 역시 벽에 접어 넣을 수 있는 머피 침대도 있었다. 하지만 그것을 펼치면 방이 꽉 차다시피 하는지라, 그 대신 널찍한 옷장 용도로 마련된 공간으로 침대를 옮겨서 아예 펼쳐두고 살았다. 침대의 머리맡 벽에 창이 나 있었고 옆쪽 벽에 폭넓은 문이 있었고 발치에도 문이 있었으니, 옷장치고는 상당히 열린 공간이었다. 그래도 그것은 옷장이었다. 내가 25년을 잔 옷장이었다.
-<세상에 없는 나의 기억들> 중에서, 레베카 솔닛
사물에 유머를 불어넣는 기술은 누구에게나 주어지는 것이 아니다. 어쩌면 하나의 특권이 아니까.
솔닛의 방은 '내가 25년을 잔 옷장'이었다. 머리맡의 창, 벽에 큰 문, 발치에도 문. '그래도 옷장치고는 상당히 열린 공간'. 그리고 이런 유머와 시선들은 또 하나의 통찰에 닿는다.
'물건들은 하나하나가 과거에 내린 닻이었다. 나는 시간, 역사, 필명성, 깊이 질감을 느끼기를 열망했다.'
과거에 단단히 내린 닻으로 솔닛은 시간의 질감을 매일 만지고 다루면서 작가로서의 항해를 계속해나갔다.
솔닛이라고 해서 좋은 물건에 대한 갈망이 없었을까. 그는 그 부분 역시 솔직히 썼다. 끝도 없는 갈망 속에 드리워진 그림자를 더듬으며 천천히 자신의 힘으로 가난을 벗어났다.
괜히 술 마실 핑계를 찾는 사람들처럼 한강 작가의 노벨문학상 수상으로 좀 들떠볼 만한 구실을 찾은 요즘, 몇 년 전 보았던 또 다른 수상자 가즈오 이시구로의 방도 떠오른다. 사실상 영국에서 자란 일본인 이시구로는 자신의 기억 속에 나만의 모국을 세우는 작업에 열중하고 있었다. 그 일은 런던의 노퍽 어느 언덕에서 벌어지고 있었다.
그로부터 3년 반 후인, 1983년 봄 로나(아내)와 나는 런던에 정착해 좁고 높은 건물의 꼭대기층에 있는 방 두 칸에 세를 얻어 살았습니다. 런던의 가장 높은 지역의 하나인 어느 언덕 위해 세워진 집이었지요.
근처에 텔레비전 송신탑이 있어서 우리가 턴테이블에 음반을 올리면 스피커에서 방송음이 유령 소리처럼 겹쳐 흘러나왔습니다. 우리 집 거실에는 소파나 안락의자 대신 두 개의 매트릭스가 바닥에 깔려있었고 그 위에 쿠션들이 흩어져 있었습니다. 또 커다란 탁자가 있었는데, 그 위에서 낮에는 내가 글을 쓰고 저녁에는 함께 식사를 했습니다. 호화스러움과는 거리가 멀었지만, 나는 그곳에서의 삶이 좋았습니다.
-<나의 20세기 저녁과 작은 전환점들> 중에서, 가즈오 이시구로
가즈오 이시구로는 음악에서 글쓰기의 목소리를 발견해 냈다고 할 만큼, 음악을 글쓰기의 일부로 삼은 작가인데 그의 방에서도 그 정체성이 드러난다. 특히 재밌는 것은 꼭대기 층의 마법이다. 송신탑의 전파와 함께 웅웅 거렸던 스피커의 음악과 방송음. 그 우연을 기억하는 방식이 매력적이다. 그 '유령 소리'들 아래서 그는 작가로서의 미래를 찾고 있었다. 호화롭지는 않았지만 그곳에서의 삶을 좋아했다는 말에서 보이는 것 너머의 추억이 피어오른다. 이루 말로 다 할 수 없는 시간들이 그곳에 흘러들었을 것이다. 그 추억은 그가 써 내려간 책 속에서 새롭게 태어났을 것이다. 그렇게 그 방에서 자신을 작가로 만들어줄 문장을 기다렸다.
조금 오해 받을만한 제목으로 한국어판이 된 책 <살림비용 : The Cost of Living>의 작가 데버라 리비.
그는 남아공 출신이지만 가족들이 이주하면서 영국에서 활동한다. 친구들 사이에서는 '뒷마당에서 숨어 지내는 사람'으로 통했다. 동네 서점주인의 정원 뒤편 사과나무 아래 지은 헛간. 월세를 내어 빌린 그곳이 바로 그녀의 작업실이었다.
잔디 깎는 기계도 있고, 창문이 네 개 있으며 오래된 책상 하나와 벽에 아무렇게나 짜 맞춘 선반이 있던 말 그대로 헛간. 그곳에 살던 '골든 래브라도 견의 유골'과도 함께 지내는 것까지는 그렇다고 쳐도 지금은 맹렬하게 짖어대는 사냥개가 한 마리 거주하고 있었다.
그건 좀 문제였다. 글쓰기에 방해가 될 일은 뻔했다. 평생 반전주의자였던 서점주인 실리아는 '그 이력이 무색하게' 물총을 작가에게 주었다. 개가 짖으면 안 된다는 것을 훈련시키는 게 어떠냐는 제안이었다. 작가의 방은 그렇게 시작되었다.
나는 집필용 의자에 양피 러그를 두 장 드리웠다. 막연하게나마 석기시대 분위기가 연출됐다. 데스크톱 컴퓨터를 설치하고 사용 가능한 벽 콘센트의 위치를 파악한 뒤 연장 코드를 들여왔다. 사과나무에 눈이 내릴 동안 바닥에 앉아 엉킨 전선을 풀고 노트와 책이 든 상자들을 정리했다. 내 세대 작가라면 늘 끼고 다니기 마련인 이 방대한 양의 종이를 다 어째야 좋을지 고민이었다. 연극과 영화대본, 시, 단편소설, 오페라 대본, 수동과 전동 타자기 그리고 초창기 컴퓨터까지 아우르는 테크놀로지를 이용해 집필한 장편 소설 초고 등등. 다이어리는 1985년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것도 있었다.
-<살림 비용> 중에서, 데버라 리비
손이 많이 가는 헛간이었지만 그 낡고 거친 공간에는 가치를 매길 수 없는 유산이 스며있었다. 사실 그 헛간은 그 서점주인 실리아의 남편인 훌륭한 시인 에이드리언 미첼이 집필실로 삼던 곳이었다. 헛간에 배어있는 글쓰기의 일상이 그대로 남아있는 장소이기도 했다.
시대의 변화를 말해주듯 오래된 타자기부터 초창기 컴퓨터까지 글쓰기 테크놀로지를 만나는 현장이었다. 시인 남편의 집필 세월의 노하우를 터득한 실리아는 작가가 방해받지 않을 수 있는 최고의 조력자가 되어주었다. 그렇게 그곳에서 세 권의 책이 나왔고, <살림비용>역시 그중 하나가 되었다.
뜻하지 않았던 작가들의 방을 만나는 일은 책 읽기의 즐거움 중 하나이다. 그곳은 글 쓸만한 조건만 갖추어졌다는 이유로 풍요로웠다. 카포티의 깎아야 하는 연필, 솔닛의 옷장처럼 열린 방, 이시구로의 유령 소리가 들리는 꼭대기층, 또 데보라 해리의 콘센트가 있던 헛간.
꽉 차있다고 할 수는 없지만 그 비어있음이 상상력으로 채워질 공간을 내어주었을 것이다.
그들의 방에 머물다가 생각해 본다. '비어있음'과 '좁음'에서 풍성함으로 옮겨갈 수 있는 발걸음을.
작가들이 초대를 정신없이 쫓다 보니, 숨이 멎을 듯 빛나는 날들이 펼쳐진다.
밤에 외투를 입고 작은 발코니에 나가 글을 쓰다 보면 먼 별들이 아주 가까이 있다는 착각이 들기도 했다. 지난 삶에서 누렸던, 책으로 빼곡한 서재를 별빛 총총한 밤하늘과 맞바꾼 셈이었다. 그 해 나는 영국의 겨울을 처음으로 만끽했다.
-<살림비용> 중에서, 데보라 해리
그곳이 아직 내 집이었을 때, 그 집 속에서 다른 방이나 다른 문을 발견하는 꿈도 여러 번 꿨다. 어떤 면에서는 그 집이 나였고 내가 그 집이었으니, 그때 발견한 것은 당연히 내 안의 다른 나였다. 꿈에서 어린 시절을 볼 때는 늘 내가 그곳에 갇힌 상황이었던 데 비해, 이 집은 나를 가두기는커녕 내게 다른 가능성들을 열어주었다. 꿈에서 집은 더 컸고, 방이 더 많았고, 현실에는 없는 벽난로며 숨은 공간이며 아름다움이 있었다. 한 번은 뒷문을 열었더니 현실에 있던 칙칙한 잡동사니가 아니라 환히 빛나는 들판이 펼쳐졌다.
-<세상에 없는 나의 기억들> 중에서, 레베카 솔닛
Yo La Tengo - You can have it all
https://www.youtube.com/watch?v=yV_BIjhVsIw