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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베리티 Dec 16. 2024

아이가 아이였을 때

피터 한트케의 <아이의 노래>를 떠올리며

방송 원고를 한 편 마쳤다.


원고를 쓰다보면 편집본 영상을 몇 번씩이나 돌려보게 되는데, 이따금씩 유난히 눈이 가는 장면들이 있다. 이번 다큐멘터리는 치어리딩을 하는 소녀들에 대한 이야기였다. 치어리딩은 한국에서는 야구장 응원단 정도가 떠오르지만, 종주국인 미국에서는 150년 역사를 자랑하는 스포츠이다. 대학가에서 미식 축구 열풍과 함께 치어리딩도 인기를 끌면서 조직적인 훈련으로 공중 회전이나 점프, 쌓아올리기 등 고도의 스턴트를 선보인다. 한국에서도 선수의 꿈을 안고 훈련을 시작하는 학생들이 늘고 있다.


중고등학생들 사이 열 살도 안 되어 보이는 초등학생 소녀가 올라선다. 공중 점프를 하려면 체중이 가벼워야  유리할 것이다. 언니 오빠들이 팔로 소녀를 올리고 공중으로 힘껏 던진다. 아이는 제법 멀리까지 날아오르다가 떨어진다. 밑에서 잘 받아주어서 무리없이 안착한다. 그런데 팀이 손을 놓자 아이는 바닥에 엎드리다시피 넘어진다. 내성적으로 보이는 하얗고 말간 얼굴에 눈물이 핑돈다. 

울음을 터트리고 어딘가로 달려간다. 코치가 달래준다. 가까스로 참아도 자꾸만 떨어지는 눈물을 훔친다.


화면을 멈추고 아이의 표정을 계속 살핀다. 왜 울었을까. 

아파보이진 않았는데, 놀라서 울었던 걸까. 


어릴 때부터 달리기라면 질색을 하며 운동을 좀처럼 가까이 하지 않았지만 그래도 한번 생각해본다. 다칠 정도는 아니었어도 몸이 떨어질 때의 마찰이나 충격은 예상하지 못했을 것이다. 조금 아프기도 하고 공중 점프한다는 것이 이런 정도인줄 몰라서 놀라지 않았을까. 그러다가 이내 다시 언니오빠들 사이를 뛰어간다. 대회를 앞두고 있어서 머뭇거릴 시간도 없다. 다시 훈련의 연속.


모를 때 더 잘 할 수 있는 것들이 있다. 스노보드와 같은 익스트림 스포츠 계열이 특히 그런데 십대 아이들은 다칠 것을 생각하지 않고 몸을 던질 수 있어서 거침없이 기량을 발휘할 수 있다. 그래서 위험한 부분도 있지만, 미리 대비하고 훈련을 받으면 각종 기록을 쏟아내는 데 유리하다. 나이가 들어서 제법 뭔가 알 때 즈음 되면 몸을 사리게 된다. 이렇게 하면 아팠던 기억, 저렇게 했다가 고생했던 통증들 이것저것 따질 게 많아진다. 위트의 대가 마크 트웨인은 이렇게 말했다. 

'뜨거운 부뚜막에 앉아 놀란 고양이는 다시는 그 위에 앉지 않지만, 문제는 차가운 부뚜막에도 앉지 않게 된다는 사실이다.' 

모험도 도전도 생각이 지나치게 많아지면 실행하기 어려워지는 것이 당연하다. 그래서 다른 스포츠 선수라면 한창일 나이에 시니어 꼬리표를 달거나 은퇴를 한다. 


다시 그 아이를 본다. 어릴 적에 왜 눈물이 나는지 모를 때가 있었다. 그런데 그 순간이야말로 참 아이다운 감수성이 드러난다. 왜 우는지 알게 되면 이미 늦은 것은 아닐까. 알아도 그 때는 이미 할 수 있는 게 별로 없다.


언젠가 TV를 보다가 또 눈물짓는 아이에 한참 시선이 머문다. 여행 프로그램이었는데, 텍사스의 통나무집에서 그림을 그리던 미국인 소년에게 한국의 출연자가 말을 건넸다. 예상치 못했던 눈물이 뚝 떨어진다. 출연자는 얘기를 해보려고 아이가 그린 그림에 대한 코멘트를 했을 것이다. 어른의 입장에서 봤을 때 울 일은 아니었는데, 어떤 부분이 아이의 마음을 건드렸을까. 아마도 그림을 그린 자신의 의도를 몰라주어서 그런데도 말로다 하기도 어려워서 눈물이 났던 게 아닐까. 


그 예측하지 못했던 눈물이 이상하게도 오래 마음에 남는다. 아이는 무엇이 그리 서운했을까. 

무슨 얘기를 더 해도 툭 터질 것만 같아서 출연자는 계속 미안해하고 아이는 눈물을 머금고 있다. 이유를 알 수 없지만, 그 아이의 눈물 어딘가에 누군가의 어릴 적의 기억이 스며있다. 그렇게 머뭇거리고 뒤로 물러나 있던 아이가 헤어질 때 서운해한다. 쑥스럽게 울먹인다.

마음을 다 표현하지 못하는 스스로에 대해 느끼는 복잡한 감정이 아닐까. 수줍음과 서운함괴 미처 내보이지 못하는 속마음에 대한 아쉬움과 슬픔. 아무리 애를 써봐도 다 내보일 수 없는 세계가 존재한다는 것에 대한 어렴풋한 자각이 파도처럼 일렁인다.


영화 <베를린 천사의 시>의 도입부에 낭송되는 피터 한트케(Peter Handke)의 시를 잊을 수 없다.



아이의 노래(Lied vom kindsein) 


아이가 아이였을 때

팔을 휘저으며 다녔다.

시냇물은 하천이 되고

하천은 강이 되고

강도 바다가 된다고 생각했다.


아이였을 때 자신이 아이라는 걸 모르고

완벽한 인생을 살고 있다고 생각했다.

아이가 아이였을 때

세상에 대한 주관도 습관도 없었다.


책상다리를 하기도 하고 뛰어다니기도 하고,

사진을 찍을 때도 억지 표정을 짓지 않았다.

아이가 아이였을 때 질문의 연속이었다.

나는 왜 나이고, 네가 아닐까?

왜 난 여기에 있고

저기에는 없을까?

시간은 언제 시작되었고

우주의 끝은 어디일까?

태양 아래 살고 있는 것이 내가 보고들은 모든 것이

모였다 흩어지는 구름조각은 아닐까?

악마는 존재하는지, 악마인 사람이 정말 있는 것인지

내가 내가 되기 전에는 대체 무엇이었을까?

지금의 나는 어떻게 나일까?

과거엔 존재하지도 않았고 미래에도 존재하지 않는

다만 나일 뿐인데 그것이 나일 수 있을까.


아이가 아이였을 때

시금치와 콩, 양배추를 억지로 삼켰다.

그리고 지금은 아무렇지도 않게 모든 것을 잘 먹는다.

아이가 아이였을 때

낯선 침대에서 잠을 깼다.

그리고 지금도 항상 그렇다.


옛날에는 인간이 아름답게 보였지만

지금은 그렇지가 않다.

옛날에는 천국이 확실하게 보였지만

지금은 상상만 한다.

허무 따위는 생각 안 했지만

지금은 허무에 눌려있다.

아이가 아이였을 때

아이는 놀이에 열중했다.

하지만 지금에 와서 열중하는 것은 일에 쫓길 뿐이다.


아이가 아이였을 때

사과와 빵만 먹고도 충분했다.

지금도 마찬가지다.

덜 익은 호두를 먹으면

떨떠름했는데 지금도 그렇다.

산에 오를 땐 더 높은 산을 동경했고

도시에 갈 때는 더 큰 도시를 동경했는데 지금도 그렇다.

버찌를 따러 높은 나무에 오르면 기분이 좋았는데 지금도 그렇다.

어릴 땐 낯을 가렸는데 지금도 그렇다.

항상 첫눈을 기다렸는데 지금도 그렇다.

아이가 아이였을 때 막대기로 창 삼아서 나무에 던지곤 했는데 


창은 아직도 꽃혀있다.


https://www.youtube.com/watch?v=gRhkxDaPb5A


아이의 노래는 나를 지나서 다음 세대의 아이에게로 향한다. 키가 훌쩍 커진 예전의 그 아이가 꽃혀있는 창을 바라본다.


치어리딩 대회 날 그 소녀가 다시 점프를 한다. 한 바퀴 날고도 사뿐히 안착한다. 

눈물의 시간은 지났다.

미지의 세상에 대한 호기심이 반짝인다. 

입가엔 옅은 미소가 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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