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덜컹거리던 그 엘리베이터에서

Stereolab - Cybele's Reveirie

by 베리티

검은 빛이 도는 옛날식 묵직한 철문으로 된 엘리베이터.

안에 타고 있는 사람이 다 들여다 보이고, 버튼을 누르면 덜커덩 도르래 움직이는 소리가 들렸다.


파리에서 기억이 나는 것은 눈이 번쩍 뜨일 만큼 풍미 가득하던 크로와상보다, 지붕 끝 햇빛을 반사하며 빛나던 금장 장식들보다, 거리 방향을 바라보는 카페의 노천 테이블들보다 이상하게도 그 낡은 엘리베이터였다.

13구에서 잠깐 머물던 그 아파트에 그 엘리베이터가 있었다. 고풍스러운 손잡이를 잡아 당겨서 문을 열고 들어가면 나무 질감의 공간이 기다리고 있다. 층마다 두툼한 버튼이 보인다. 두세 명이 정원일 듯한 (확인은 해보지 않았다) 그 엘리베이터에 오르면 타임머신이라도 탄 것처럼 다른 세상에 도착한 기분이 들었다. 옛날 프랑스 영화 속으로 들어온 것도 같았다. 실제로 백 년쯤 전에 지어진 건물이었던가. 유럽에서는 그런 건물이 워낙 흔하다니 대수롭지 않겠지만, 나에게 엘리베이터란 항상 양쪽 문이 열려야만 내부가 보이는 것이었으니까.

좁다란 공간에 몸을 맡기고 붕 떠오르는 감각이 사방이 막혀있을 때보다 더 실감이 나서 인지도 모르겠다. 그렇다고 투명한 유리로 다 보이는 깔끔한 전망대 엘리베이터 같은 현대적 느낌과도 또 다르다. 그것은 오직 그 백 년 가까운 세월의 흔적으로 불규칙한 끼익 소리와 함께 철문이 열리고 닫히는 묵직한 무게감으로 전달되는 것이었다. 여행자의 시선으로 바깥에서 떠도는 시선을 조금 도시의 안쪽으로 끌어당기는 중력 같은 것.

하루 종일 걸어서 거리를 다니고 어두워질 무렵 돌아오면 전구의 오렌지 빛이 엘리베이터 안을 가득 채웠다. 이제 파리의 내면으로 돌아오라는 초대장처럼. 저녁마다 그렇게 엘리베이터는 내 앞에 도착했다.


세 개의 방이 있던 작은 아파트였다. 여행자들이 각자 방을 썼고 작은 부엌애 있어서 가까운 마트 모노프리에 가서 식료품을 사다가 해 먹곤 했다. 파리 물가야 말할 것도 없지만 그래도 식료품은 비싼 편이 아니어서 각자의 방주인 들은 나름 간단한 요리를 해 먹곤 했다. 과일을 좋아하는 나는 포도를 실컷 사다 먹었다. 한국에서의 까만 포도가 아닌, 와인이 될 수 있는 껍질이 얇아서 거슬리지 않고 씹혀 넘어가는 싱싱하고 탱글한 포도들이었다. 와인은 잘 모르지만 떼루아란 그런 것인가. 포도, 사과, 복숭아, 하나같이 내가 알던 그 맛이 아니었다.


내가 머물던 방은 테이블 위에 작은 TV와 바깥으로 열리는 창 아래 침대, 옷장. 이렇게 단출했다. 그래도 바깥 풍경이 좋았고, 온종일 산책하던 길들과 이어져있는 듯 보여서 마음에 들었다. 거칠고 세월의 흔적을 내보이며 색과 결이 조금씩 다른 마루바닥도 편안했다.

저녁에 돌아오면 알아듣지도 못하는 불어로 떠드는 TV를 보곤 했다. 수다 수다 그리고 또 수다. 프랑스 사람들에게 수다는 일상에서 어느 정도를 차지하는 것일까. 그런 생각을 했었나. 그래도 그런 풍경들이 좋아 보이기도 했다. 그만큼 할 얘기가 많다는 것은 관심이 많기도 하고 깊게 들어갈 수도 있다는 뜻이니까. 옆 방에 있던 여행자가 잠깐 들렀다가 TV를 보는 나를 보더니 직업적인 거냐고 묻기도 했다. 숙소에 도착하던 날 우리는 직업과 출신지역들 정도의 정보를 나누었는데, 그런 질문을 받을 줄은 몰랐다.


다른 방에는 또 한국인 친구가 한 명 있었다. 그는 하루 종일 에펠탑만 보고 온다고 했다. 나는 사실 유명 관광지에는 크게 관심이 없어서 잠시 찍고 지나가던 장소였던 에펠탑이 그녀에게는 어떤 의미가 있어서 그렇게 하루 종일 바라보고 있는지 궁금했다. 그녀는 그렇게 돌아오면 욕조에 따뜻한 물을 가득 채우고 와인을 마시곤 했다. 나는 좋아하는 술로 욕조를 채워서 몸을 담근다는 지인의 말이 생각나서 혹시 그녀도 그런 것인가 했었는데 그건 아니었다. 그곳에 머물던 마지막 날에는 클리낭쿠르에 간다고 했다. 같이 가고 싶었는데, 다음 날이 비행기를 타는 날이어서 무리하고 싶지 않아 가지 않은 것이 아쉽다. 나도 벼룩시장 좋아하는데, 동네를 오가다가 보이는 작은 가게보다 더 큰 벼룩시장을 가보고 싶었다. 그녀는 아쉬운 표정을 짓더니 방에서 뭔가를 가져왔다. 알이 꽤 굵은 초록빛 비즈 목걸인데, 직접 만든 거라고 했다. 돌에 초록, 블루, 보랏빛이 섞여서 신비롭게 빛났다. 그녀와 헤어지고 내내 그 목걸이를 걸고 다녔다. 다시 만날지 알 수 없어도 목걸이로 기억된다는 것이 좋았다.


돌아보면 특별할 것이 그다지 없는 아주 일상적인 여행이다. 걸어 다녀야 기억에 오래 남는다는 이유로 나는 여행지는 주로 걸어 다니고, 버스, 택시, 기차를 한번씩 타보는 편이다. 이제는 엘리베이터도 포함시켜야할까. 그 낡은 엘리베이터가 그렇게 오래 기억에 머물게 될 줄은 몰랐다. 여행에서는 늘 뜻밖의 상대를 마주치게 되는 법이다.



Stereolab - Cybele's Reverie

https://www.youtube.com/watch?v=v6dNTmfZp0U

스테레오랩은 이름처럼 꽤나 실험적인 음악을 하는 밴드이다. 이 곡을 처음 듣게 된 것은 홍대의 어느 언더그라운드 바였다. 친구와 실컷 떠들다가 이 곡이 나오자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우리는 말을 멈추었다. 그때부터 알게 된 것이다. 감동은 탄성보다 침묵에 가깝다고 본다. 그냥 아무 말을 할 수 없는 것. 오직 그 소리만을 향하게 하는 것.

언제나 꿈꾸는 듯 아련한 기억을 불러오는 음악이라서 오래도록 듣게 된다. 특히 드라마틱한 인트로와 이어지는 우아한 보컬의 멜로디, 현악기의 따뜻한 반주가 멋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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