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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 그 책방골목에 두고 온 것들

Say Sue Mi - Season of the Shark

by 베리티

여행지에 두고 오는 것들이 있다.


가게에서 사다 놓고 냉장고에 넣어둔 과일이나 빵, 과자들. 누구든 발견하는 사람이 가져다 먹어도 부담되지 않는 것들. 이런 것들은 얼마든지 잊을 수 있지만, 어쩐지 영영 두고 온 듯한 기분이 계속 들게 하는 것이 있다. 이를테면 우연히 들른 카페에서 보낸 오후. 절로 감탄하게 되는 커피를 마셨을 때나 아, 내가 지금 여행을 왔구나 기억하게 하는 장면 속에 있다는 자각을 하게 되는 순간이다.


지난 늦여름 부산에 갔을 때 들른 동네는 보수동이었다. 좋아하는 동네라고 하기엔 부산을 그리 잘 아는 편도 많이 아는 것도 아니다. 몇 년 전 야외 촬영이 있어서 답사하느라 두어본 와본 것이 전부이다.

부산 운전이 험하다는 것은 소문대로여서 운전석에 앉지 않았어도 몇 번 놀라며 도로를 달렸다. 바다로 둘러싸인 산이 많은 지역인데 길이 평범할 리 없다. 예상치 못하게 솟아 있는 산들, 언덕길, 그리고 사이의 골목길. 운전자에게는 험난한 코스였지만 그 역시 부산의 일부였다. 평탄한 지형도 아니고 또 피난의 도시라는 첩첩이 쌓여있는 역사가 길마다 안내장을 내밀고 있는 듯했다.


부산의 유명 관광지들보다 나는 이 동네가 기억에 남았다. 워낙 관광지보다 로컬 스타일로 머무는 여행을 선호하는 편이기 때문일 것이다. 사실 보수동의 첫인상이 그리 특별할 것은 없었다. 오래된 책방 골목은 서울에도 여전히 남아있고, 서점만 많다고 해도 눈길을 끌 리도 없다.

그런데 촬영을 준비하느라 차에서 내려 발로 여기저기 걸어 다니면서 나도 모르게 재미를 붙이게 된 것 같다. 책방골목이라 해도 그다지 규모가 우와 할 정도는 아니었는데, 무료할 틈을 주지 않는 것은 끝도 보이지 않는 계단과 미로 같은 골목이었다. 오래된 그대로 부서지고 떨어져 나간 시멘트로 된 좁은 계단. 무심코 따라 올라갔다가 괜히 온 건가 싶어 지게 계속된다. 계단 중간에 떡 하니 노란 페인트 칠을 한 작은 카페가 등장한다. 3,4층을 넘지 않는 오밀조밀한 작은 건물들 낡은 창에는 게스트하우스도 있다. 어느 구석에서는 작은 토론이나 독서모임이 열리고 있을 것도 같다. 새로운 카페도 만들어지고 있는 듯 공사 중인 곳도 보인다.


일을 하느라 일정에 쫓겨 다녔던 지난번에 찬찬히 보지 못했던 곳들을 좀 여유롭게 둘러보고 싶어서 다시 보수동에 갔다. 습관적으로 정보를 검색하고 보수동에 가면 꼭 가야 한다는 가장 큰 책방에 가서 차를 마셨다. 시간의 흔적이 담긴 그곳에서 책을 구경하다 보니 외국인들 말소리도 들려오고, 동네주민들이 오가며 주인과 이야기를 나누는 모습도 보였다. 오래된 책 냄새, 요즘은 잘 못 보는 커다란 포스터들, 어린 시절 즐겨보던 디즈니 동화책들, 대학시절 허세부리기 좋았던 철학서적들을 보다 보니 시간 가는 줄 몰랐다. 나쁘진 않았지만, 무언가 빠졌다는 느낌이 들었다. 그곳에 좀 머물다가 골목을 좀 다녔더니, 아차.

골목길에서 아주 마음에 드는 카페를 발견했다. 검색해도 잘 나오지 않는 곳. 간판도 잘 보이지 않고, 작은 카페인데 오래된 미닫이문 사이 음악이 흘러나오고 밖에 둔 테이블에 사람들이 책을 보고 있었다. 순간, 내가 찾던 곳이라는 것을 알았지만 이미 떠날 시간이었다.


남들이 좋다는 것이 내게도 좋다는 법은 없는데, 검색에 의지하다가 더 좋은 것을 놓치곤 한다. 차라리 아무것도 모르고 동네부터 돌아다녔다면 지도에도 뜨지 않는 이 카페에 들어갔을 텐데.

그리고는 생각했다. 역시 정보를 많이 갖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다. 검색을 많이 한다고 최고의 선택을 하게 되는 것이 아니다. 최고의 것들만 찾아서 모은다고 최고의 내가 되는 것이 아니다.

검색은 일절 하지 않는다고 했던 어느 셀럽이 떠올랐다. 그는 자신의 감각에 의지해서 직접 들어가 보고 만져보고 그렇게 경험을 쌓는다고 했다. 또 한 사람이 떠올랐다. 내비게이션을 쓰지 않던 지인. 요즘 네비 없는 세상을 떠올릴 수는 없지만, 그로 인해서 사람이 갖는 길 찾기 감각은 쓸 일이 없어졌다. 말로 하지는 않았지만 그 친구의 차를 타면 무언의 저항이 전달된다. 망망대해의 똑같은 바다에서도 나만의 나침반을 갖는 것을 누구에게도 넘기지 않는 어떤 류의 고집. 그는 AI 관련 작업을 하는데, 진짜를 알고 있는 듯 보인다.

빠르고 편리한 것이 모든 것에 우선하는 것일까. 다들 AI를 내가 더 잘 쓴다고 자랑하는 시대이고, 필수가 된 세상이다. 정작 중요한 것은 AI가 할 수 없는 사람만의 고유한 어떤 것인 줄 알면서도 이미 손은 벌써 AI에 가 있다. 앞서가고 있다고 믿으면서.


그래서 이번 부산행에는 보수동 그 카페를 두고 온 것이다. 떠들썩하지 않게 음악을 들으며 길 가는 사람들을 구경할 수 있는 작은 카페. 오래된 빨간 벽돌 앞 초록 식물들이 바람에 날리던. 주인장의 취향과 세세한 의미들을 말하고 있는 사물들로 가득 채워진 공간. 그저 옛것에만 머물러있는 과거형의 자리보다는 그 흔적 위에 새로운 바람이 드나드는 오늘의 감각이 잘 보이는 곳이 좋다.


아마도 쉽게 갈 수 없는 데다가, 한번 들어가 보지도 못해서 더 그리울 수도 있겠다. 하지만 더 큰 이유는 잊고 있던 한 가지를 비추었기 때문일 것이다. 발로 찾아가고 직접 걷고 만지는 것보다 더 쉽고 좋은 방법이 있을 거라는 착각을 허물어주었으니까. 아날로그의 책방골목이 말해주는 것들이다.


부산 보수동에 가야 할 이유가 하나 더 늘었다.

잊고 있던 것을 주머니에 찾아 넣는 그런 심정으로.



Say Sue Mi - Season of the Shark

https://www.youtube.com/watch?v=WdHRakxxg2E

부산 출신으로 이제는 세계 곳곳 투어를 다니는 세이수미. 좋은 곡들도 많지만 이 곡을 듣고 깜짝 놀랐다. 내가 좋아하는 뉴저지 밴드 Yo la Tengo의 곡을 이렇게 기막히게 커버하다니!

이 노래를 커버할 시도 자체부터 놀라운데 원곡과 또 다른 매력이 있다. 모호하면서 과하지 않은 보이스가 좋다. 연주는 말할 것도 없고.

그래, 인정해. 이제 상어의 시즌은 갔다. 여름은 갔다지만 갑자기 너무 춥다.


*혹시 원곡이 궁금하신 분들을 위해 - Yo La Tengo - Season of the Shark

보컬 Ira의 기타는 물론 노래 부르는 스타일을 정말 좋아한다.

https://www.youtube.com/watch?v=cUvpG8bb6Mw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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