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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들의 모퉁이 책상엔

Anthony and Johnsons - The Lake

by 베리티

낙엽이 막 떨어지기 시작할 즈음, 그 커피집에 갔다.


광화문 한복판에서 한참 벗어나 한적한 동네로 들어오면 성곡미술관 옆에 있는 그 카페. 예부터 커피가 맛있기로 소문난 집이지만, 그런 곳은 항상 북적이고 웨이팅이 있을 수 있어서 선뜻 나서지 못했다. 그날은 모처럼 친구들을 만나 근처에서 다시없을 커피 한 잔의 시간을 찾고 있었다. 사실, 요즘 어느 집이나 커피가 그렇게 맛없기도 쉽지는 않지만 어떤 날은 좀 유명하다는 커피를 마시고 싶은 것이다.


갑자기 그 카페가 떠올라 말하자마자 이미 우리는 차를 돌리고 있었다. 사실 주차공간도 확실하지 않은데, 무작정 간 곳의 길 한 켠에 주차장인 듯 의심 없이 차를 댔다. 문을 여니 오래된 나무로 만든 테이블, 그리고 책장에 넘쳐 바닥에 쌓여있는 책들, 조용히 핸드드립하고 있는 주인장과 왁자지껄 울리지 않는 적당한 대화의 소리들이 다가온다. 중간에 놓인 커다란 테이블 모퉁이에 자리 잡고 커피를 시켰다.

테이블에 앉아 창밖을 내다보면 앞집이 담장 너머로 꽃송이들이 쏟아질 듯 넘어와있다. 이럴 때 꽃이름이라도 알면 완벽할 텐데, 우리는 멀뚱히 바라보면서 저 꽃 이름이 뭘까 물음표만 던지고 있었다. 아이스에서 따뜻한 커피로 바꿀 무렵의 머그잔이 손에 들어온다. 잔 속의 커피에 파동이 일고 향이 퍼진다. 이 즈음 취하고 싶었나 보다. 예전처럼 술을 마시지 않는 우리는 커피라도 빌려서 모처럼의 시간을 채우려 했을 것이다.


이야기를 나누는 사이 카페의 책들을 살펴본다. 어떤 책들이 많은지를 보면 카페 주인의 취향이나 어느 세대인지를 대강 짐작할 수 있다. 철학이나 사상서들, 한국문학책들이 눈에 띈다. 아마도 86세대일 것 같다. 바깥 테라스에서도 머리가 희끗하신 분들이 한창 이야기를 나눈다. 우리의 맞은편 테이블에는 대학생들도 보인다.

그러다가 눈에 들어온 것은 카페 한쪽 모퉁이의 작은 테이블. 원두포대들 너머로 작게 만든 책상이 보였는데, 나무다리가 아니고 예전에 보던 재봉틀의 철제 지지대인 걸로 봐서 개조한 듯 보였다.

가만히 보니 이 커피집의 비밀은 그 모퉁이의 작은 책상에서 시작된 것이 분명했다. 테이블 위에서 책을 보거나 커피를 주문하거나, 그러니까 작은 연구소가 차려져 있는 것이다. 그 자리가 마음에 든 것은 그저 커피만 파는 것이 아니라 손님뿐 아니라 주인도 그 공간에서 무언가를 할 수 있다는 시간이 보여서였다. 메모를 할 수도 있고 글을 쓸 수도 있고, 책을 볼 수도 있다. 어릴 적 어둠 속에서 전등 아래 돋보기를 끼고 한참을 들여다보던 할아버지가 있던 어느 시계방 구석의 작은 책상도 떠올랐다. 화려하지 않아도 뚝딱 마술처럼 새 시계가 되어서 나오던 그 책상처럼 그 모퉁이에서 커피를 연구하면서 멀리의 사람들에게까지 커피 향이 번져간다.


때때로 카페를 돌아다니며 일을 하는 이유는 더 많은 가능성을 탐색하기 위해서 인지도 모른다. 아무도 소리 내지 않는 고요함만큼 여전히 일상 속을 지나고 있다는 것을 일깨워줄 소음이 그리울 때가 있다. 모든 것들이 제 자리에 있는 내 책상에서 노트북을 펼칠 때만큼이나 익명 속에서 타박타박 자판을 두드리고 싶을 때가 있는 것이다. 때로 책상이라는 정해진 틀을 벗어나고 싶기도 하고, 전혀 엉뚱한 곳에서도 일이 벌어진다는 사실을 놓칠 수도 없다. 특히 모퉁이의 작은 테이블에서 아무도 보지 않아도 태어나고 있는 신비를 탐정이라도 된 것처럼 찾으면서 노트북을 펼칠 연료를 삼고 있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쓴 커피를 한 잔 마시고 난 지인은 문득, '패배'라는 말을 꺼냈다. 최근에 쓰고 있는 작품에서 철저히 느낀 것은 그냥 그 단어뿐이라고 했다. 다들 잠시 말을 멈추었다. 그 단어를 뒤집었을 때 어떤 야망이 보이는 것도 같았다. 뭐라고 해야 할까. 그때 그 모퉁이책상을 손으로 가리켰다. 저기 마음에 들지 않아?


얼마 전 넘긴 책장에서 '키친테이블 라이터'라는 단어에 한참을 멈추었다. 부엌에서 짬을 내어 글을 쓰는 사람을 떠올려보니, 책더미에 파묻혀서 끙끙대는 크고 멋진 책상보다도 더 괜찮은 일은 아닌가 하는 생각까지 이른다. 오래된 냉장고가 윙 하는 소리마저 적막보다 편안하게 들려서 일부러 부엌에 와서 잠들었다는 요시모토 바나나의 소설 주인공처럼, 반짝거리며 정돈된 그릇과 빛나는 유리잔이 걸려있고, 파프리칸 당근처럼 형형색색의 채소들이 자리를 지키고 있는 그곳에서 따뜻한 밥이나 국수처럼 손끝에서 작품이 만들어진다고 보면 그보다 어울리는 장소가 또 있을까 싶어진다.

그 모퉁이 책상이 있어서 그 공간은 크든 작든 얼마든지 나아가는 것이다. 보이지 않는 길까지 연결되어 있다. 대단하고 거대한 프로젝트가 아니어도 언제 어디에 있든 그것을 책상으로 볼 수 있는 사람들이 있어서 향 좋은 커피도, 소박한 요리도, 누군가와 나눌 수 있는 무언가가 태어난다.


끝내 그 꽃이름은 알아내지 못했지만, 그 담장 너머 계절이 지나가는 것을 바라본다. 그리고는 멀리 있는 각자의 방 책상을 떠올렸을까. 꽃잎도 떨어지고 차가운 가을바람이 불고 나뭇잎이 누레져서 낙엽이 떨어져 바스락거리고 머지않아 그 담장에도 눈송이가 흩날릴 것이다.

그렇게 가을을 가득 안고 우리는 각자의 책상으로 돌아갔다.



Antony and Johnsons - The Lake

https://www.youtube.com/watch?v=tg994BPCOIo

분주한 일상 속에 잔잔하고 맑은 호수가 필요할 때엔 언제나 이 곡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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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 목 연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