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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서하 Apr 23. 2024

답장이 오기까지는 시간이 걸린다

서하의 On-Air

 3월 말부터 매주 금요일 도서관에서 하는 서평 쓰기 수업에 참가했다.

 프로그램에 참여한 건 서평작 중 아니에르노의 부끄러움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자신의 이야기를 소설로 쓰는 작가, 타협하지 않는 작가의 글이 궁금해 도서관에서 아니에르노 작품만 다섯 권 정도 빌려온 적이 있다.

 나는 그 다섯 권 중 한 권도 읽지 못하고 그대로 반납했다.

 그런 책이 있다, 책장을 열어보기가 주저되는 책. 아니에르노의 책이 그랬다.

 하지만 한 번은 그녀 작품을 읽고 싶었기에 도서관 프로그램에 신청했다.

 서평작 들은 아니에르노의 부끄러움, 비비언고닉의 사나운 애착, 황정은의 일기순이었다.

 첫 주, 아니에르노의 부끄러움을 읽었을 때 안도했다.

 그녀는 속된 말로 '넘사벽'이었다.

 나는 나의 이야기를 그렇게 솔직하게 쓸 수 없다.

 아니 쓸 수 있다고 하더라도 그 글을 대중에게 공개할 수 없다.

 아니에르노는 자신의 이야기를 '소설'로 규정했다.

 그녀는 대중이 보기에 충분히 솔직했다.

 하지만 본인 스스로 보기에 여전히 솔직하지 못한 부분이 존재했다.

 그래서 그녀는 자신의 이야기를 허구인 '소설'이라 한 것이다.

 이 얼마나 타협 없는 마음가짐인가!

 그녀는 내가 범접할 수 없는 사람이었다.

 그것이 나에게 안도감을 주었다.

 둘째 주, 비비언고닉의 사나운 애착을 읽었을 때 덫에 걸렸다는 것을 직감했다.

 그녀는 나에게 이렇게 속삭이고 있었다.

 어차피 세상에 진실이란 있을 수 없어.

 그 진실은 누군가의 시점 속에서만 진실인 거야.

 하지만 진심일 수는 있어. 진심은 지극히 개인적인 거니까.

 어떤 진심을 글을 통해 전하고 싶은 지 중심에 두고, 인물과 이야기들을 배치해 봐.

 서술자인 '나'와 글 속에 '나'는 적절한 거리감이 생길 거야.

 그리고 캐릭터의 어떤 면모를 강조하고, 어떤 이야기를 가지치기해야 할지 보일 거야.

 그래서 그녀가 회고록으로 규정한 사나운 애착은 소설 같다.

 비비언고닉이 왜 작가들의 작가라고 불리는지 알 수 있었다.

 셋째 주, 황정은의 일기를 읽었을 때 나는 속으로 비명을 질렀다.

 '제발 작작들 좀 하세요! 이 솔직한 사람들 같으니라고!'

 세 작가의 솔직함에 숨쉬기가 힘들 지경이었다.

 황정은 작가는 자신을 소설가로 규정한다.

 그런 그녀가 소설이 아닌 에세이로, 그것도 일기라는 제목으로 소설가 황정은이 아닌 개인 황정은을 작정하고 드러내고 있었다.

 개인 황정은의 시점으로 바라본 세상의 모습, 작가로서의 삶, 가족이야기를 통해 그녀가 바라는 사회상을 보여주고 있었다.

 삼 주 동안 서평작들을 읽은 후 남은 두 주 동안 서평을 쓰는 일정에 나는 사 주 째에 선생님에게 어리광을 부렸다.

 "선생님 너무 하세요. 이 세 작품을 한 주에 하나씩 읽는 건 너무 버거워요."

 감정이 쉴 틈 없이 마음을 흐리게 만들며 생각이 많아지는 작품들로 고른 선생님의 의도를 알고 있었다.

 이 강의는 서평 쓰기를 가장한 자기 내면을 직면하는 수업이었다.

 자기 내면을 글로 드러내던, 드러내지 못하던 그 과정에서 자기 내면을 마주하는 건 피할 수 없었다.

 나는 서평작으로 비비언고닉의 사나운 애착을 선택했다.

 그녀가 주제로 삼은 모녀 관계를 통해 본 여성 성장사가 내가 글을 쓰고 싶었던 이유였기 때문이다.

 나는 사실 이 주제로 수도 없이 글쓰기를 시도해 보았다.

 그리고 시도는 매번 실패로 끝났다.

 흔히 글쓰기는 기술의 영역으로 생각한다.

 그래서 누군가의 글을 평해보라 하면 구성이 잘 되었는지, 문장은 아름다운지 등과 같은 기준으로 글을 보려 한다.

 작년에 나는 이 기준으로 내 글을 보았다.

 하지만 이런 접근으로는 글이 어디에서 잘못되었는지 답을 찾아도 문제를 해결할 수 없었다.

 작년에 내가 쓴 글은 기술적으로 접근하면 구성도 일관성 없었고, 문장은 고르지 못했다.

 일관성 있는 구성, 고른 문장을 몰라서 못 쓰는 것이 아니었다.

 그렇게 다듬어 본 글에 대해 내 마음속에서 이런 외침이 들렸다.

 '네가 원한 건 이 글이 아니잖아!'

 이제는 이렇게 정리해서 말할 수 있다.

 진정한 문제는 나의 상업적 글쓰기 자아와 내면의 순수한 글쓰기 자아의 충돌 때문이었다.

 상업적 글쓰기는 '나'의 존재감이 최소화된 채, 상업적 대상이 되는 '그들'을 위한 글쓰기를 해야 한다.

 내가 지금까지 십수 년 간 반복해 온 익숙한 글쓰기였다.

 반대로 내면의 글쓰기는 '나'의 존재감을 최대화하여, '진심'을 전하는 글쓰기를 해야 한다.

 내가 지금까지 외면하기 위해 애쓴 글쓰기였다.

 이 '진심'이라는 단어는 참 많은 생각이 들게 한다.

 어디까지 솔직하게 내 보일 것인가? 내 진심을 사람들에게 전할 이유가 있을까? 사람들을 피곤하게만 할 뿐이라면 무용하지 않을까?

 작년에 나는 소설 합평 수업에 참가했고, 선생님에게 에세이와 소설의 차이를 물었다.

 그 수업은 기술적으로 접근한 글쓰기를 가르쳐 주는 수업이었고, 선생님은 이런 답을 주었다.

 "소설은 허구이고, 에세이는 사실이죠. 소설은 캐릭터의 성장이 필수적이지만, 에세이는 그렇지 않을 수 있습니다."

 내가 원한 답이 아니었다.

 웃기지 않는가? 그때 나에게는 원한 답이 이미 있었다. 하지만 나는 그 답이 무엇인지 몰랐다.

 그 답을 올해 예상치 못한 장소와 사람들 속에서 찾았다.

 그 답은 바로 이 것이다.

 소설과 에세이의 차이는 작가 마음이다. 작가가 소설이라 규정하면 소설이고, 에세이라 규정하면 에세이이다.

 이제 나는 내 글로 답장을 써야 한다.

 아주 미세한 작은 틈을  보며 희열을 느꼈고, 아주 많은 숙제들이 물밀듯이 밀려와 고통스럽다.

 이 공간도 마찬가지이다.

 어디까지 나를 내보일 수 있을까 시도하며 단단한 내면의 방어벽을 확인한 공간이 이곳이었다.

 앞으로 이 공간에서도 조금 더 벽을 허물고 진심을 내보일 수 있는 글을 쓰기 위해 노력할 것이다.

 그래서 이전보다 자주 쓰지 못할 것이나 지속적으로 글을 남기기 위해 노력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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