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정이 없는 날에는 집 근처로 산책을 나갑니다. 산책로는 크게 두 군데인데 하천가 자전거도로를 따라 도서관까지 가는 길과 뒷산에 있는 둘레길입니다.
며칠 전 뒷산 둘레길에 가니 이런 안내문 하나가 붙었더군요.
「이곳에서 악기 연주와 웃음 운동을 자제해 주시기 바랍니다. 근처에 사는 주민들이 소음으로 고통받고 있습니다.」
소음 문제는 하루 이틀 일은 아닙니다.
몇 년 전 둘레길에 붙은 동일한 안내문에는 악기연주와 웃음 운동 대신 '야호!'소리를 소음으로 규정하며 자제를 당부했으니까요.
한동안 안내문 앞에서 발걸음을 뗄 수 없었습니다.
마치 음악과 웃음에 종말 선언이 내려진 듯한 기분이라서요.
이런 기분을 저만 느끼는 건 아닌가 봅니다. 음악인들이 운영하는 유튜브 채널에서 심심치 않게 음악의 시대가 끝났다는 말들이 농담처럼 오가고 있더라고요.
'음악콘텐츠 시장의 침체'라는 말로는 지금 상황을 설명하기 부족하다고 생각합니다.
지금은 모든 소리가 실종된 시대인 것 같습니다.
듣다의 사전적 의미는 '타자의 소리를 귀라는 감각 기관을 통해 알아차리다'입니다.
그런데 지금은 '타자의 소리로부터 귀라는 감각 기관을 분리하다'라는 의미로 바뀐 거 같습니다.
대표적으로 노동요가 이런 변화를 보여준다고 생각합니다.
과거의 노동요에는 공동체 개념이 있었습니다.
고된 노동 속에서 함께 노래를 부르며 고통을 나누는 노래였죠.
아이고 힘들다~ 누군가 선창 하면,
나도 힘드네~ 자네도 힘드나~ 우리 모두 힘들구나~.
나만 힘든 게 아니라는 거에 위안받으며 끝없는 노동의 고통 속에서 함께 웃음 지을 수 있는 순간을 만드는 지혜였다고 생각합니다.
지금의 노동요는 고립의 개념입니다.
고된 노동 속에서 남들보다 빠른 속도, 나은 결과를 내기 위해 세상과 나를 분리시켜 집중하기 위한 소리로 만든 벽 말이죠.
유튜브에서 노동요를 검색하면 일부러 원래 음악보다 배속을 빠르게 한 음원들을 쉽게 찾을 수 있습니다.
음악으로서 원형은 파괴되고 빠른 비트만 남은 거죠.
그리고 그 빠른 비트는 스스로의 심장을, 두뇌를 더 빠르게 일하라고 채찍질하며 학대합니다.
한때 수면장애로 밤마다 수면 노래, 파도 소리, 경 읽는 소리를 들으며 억지로 잠을 청한 적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럴수록 외부 소음이 더 크게 들리는 겁니다.
오토바이 엔진 소리, 술주정하는 주민 소리, 길고양이 우는 소리, 어느 집 개 짖는 소리.
짜증이 나더군요. "소음들 때문에 잠을 잘 수 없잖아!"하고 말이죠.
그런데 소음이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애당초 소음이라는 건 밖에 존재하는 것이 아닌 내 안에 존재하는 건지도 모릅니다.
내 안의 또 다른 내가 보내는 구조요청 신호인 거죠.
우리가 지금 노동요로 소리의 벽 밖으로 쫓아내고 있는 건 자신일 수 있습니다.
그렇게 타자를 잊고 음악을 잊고, 웃음을 잊고, 나를 잊은 공간에서 우리는 무엇을 하고 있는 걸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