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시간을 조각조각 아껴가며 글을 쓰던 몰입의 순간을 기억한다. 그건 내 안에 있는 그저 쓰는 마음이었다. 거기에는 두려움보다는 자기 사랑이 있었다. 내 못난 모습, 솔직한 이야기를 쓰면서 나를 보듬을 수 있었다.
내가 겪어온 삶을 누구도 아닌 내가 남다르게 바라봐주는 것, 다른 사람과 나누고 싶은 마음, 세상을 이롭게 하는 데 1%의 보탬이라도 되고 싶은 마음이 그 안에 있었다. 그래서 자유롭게 쓸 수 있었고 때론 무아지경에 빠져 쓰는 일에 집중할 수 있었다.
누군가의 선택을 기다려야 하는 게 책의 운명이지만, 그 운명을 가여워하지 않고 원래의 마음, 쓰는 마음을 잃지 않을 때 나는 비로소 타인의 평판에서 자유로워질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내 마음 가는 대로 날 것의 글을 썼다.
책 쓰는 과정에서 중요한 투고, 출간 계약을 생각보다(?) 순조롭게 하고 나니 이제 글만 쓰면 아주 술술 일이 풀릴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그런데 딱 거기까지. 계약 후 한차례 더 출판사 편집자님과 만나고 목차를 다시 뒤엎고, 글을 수정해나가면서 고민이 방울방울 맺히기 시작했다.
글이 잘 써지지가 않았다. 아주 초반부터 제대로 슬럼프가 왔다.
왜 왜 왜 왜 왜?
글이 써지지 않는 이유
1. 지나친 자기 검열
'내가 책이란 걸 써도 될까.'
도서관에 있다 보면 정말 많은 책을 본다. 사람들에게 추천할 책도 정하고 구입할 책, 안 할 책을 걸러내기도 하고. 그러면서 나도 모르게 책을 평가하고 있는 나를 발견한다.
가령, '이런 것도 책이라고?' 또는 '와- 책 아무나 만드는 거네?' 이런 말을 막 하면서. 특히 일본 작가들이 만든 얄팍한 책들을 보면서 함부로 이런 멘트를 내뱉었다. (지금 생각하면... 나도 참... 경솔했다;;;;)
그럼,,,,너는?????
진짜 책을 쓴다고 생각하니, 내가 책을 쓰고 나서 받을 평가에 대해 막 걱정이 들기 시작했다.
'그래서 네가 이룬 게 뭐야?'
'뭐 별거 없네. 다 아는 얘기 아니야-'
'야 진짜 책 쉽게 썼구먼-'
이런 말을 들을까 봐 겁이 났다. 이미 출판사에서 잡은 출간일이 한참이나 남았는데도 미루고 미루고, 최대한 미루고 싶었다.
'빨리 책을 내고 싶다'라는 마음과 동시에 '최대한 천천히 책을 쓰고 싶다'라는 양가감정이 들었다. 그러니 진도가 나지 않았다.
글쓰기와 독서법 연구가 이강룡 씨는 10명이 읽어도 좋고 100만 명이 읽어도 좋은 글을 쓰는 일이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했다. 10명이 읽든 100명이 읽든 한결같은 글, 모두에게 도움이 되는 글말이다. 그런 글을 내가 쓸 수 있을까. 이 책이 어떻게든 누구에게든 도움이 되어야 한다는 그 압박감이 매일 나를 눌렀다.
집 되는 과정
2. 내 글이 편집되는 과정
내가 투고했던 샘플원고와 준비해둔 몇 개의 글 모두 그 형식이 에세이였다. 에세 이 책을 쓰려고 했던 건 아니었지만 너무 딱딱한 육아서 말고 에세이처럼 술술 읽히면서도 정보도 전달하는 책을 쓰고 싶었다. 그런 마음으로 글을 쓰다 보니 원고는 에세이 장르로 흘러가고 있었다. 거기다 마음 가는 대로 쓰다 보니 내 내면의 감정 묘사까지 아주 적나라하고 세세하게 적어나가고 있었다.
그 결과는.......?
제가 대강 보고 있는데요. 원고가 여전히 너무 길고 공감은 많이 가지만 사설이 너무 긴 느낌이 솔직히 좀 들어요. 이 부분 제가 많이 들어내고 줄여도 될는지요?
편집자님의 피드백이 왔고, 곧이어 내 글은 여기저기 그냥 뭉텅이로 잘려 나가고 말았다. 방대한 분량을 어떻게든 정리하다 보니 내용의 디테일한 부분은 보실 겨를이 없으셨던 것 같다. 그러고 나서 글의 흐름이 너무 이상했지만 그것까지 편집자님이 매끄럽게 수정해주신다거나 하지는 않으셨다. 편집자가 글도 좀 만져주는 건 줄 알았지만 그건 착각이었다는........
이 내용은 빼도 될 것 같아요
편집자님께 피드백을 받으면서 가장 많이 들었던 말이다. 그렇게 나의 경험들, 내면의 감정 묘사 부분이 잘려나가고 난 뒤 남은 원고를 보니, 문맥도 안 맞고 왜 그렇게 삭막해 보이던지.
처음 쓴 원고 분량은 200페이지에 가까웠다. 보통 책 한 권 만들려면 한글로 100페이지 정도를 써야 한다고 하는데 그 두배를 쓴 셈이었다. 나중에 퇴고할 때 보니 절반 가까이 줄어서 120페이지 정도밖에 되지 않았으니 얼마나 잘려 나간 건지.... 한글 한 페이지가 책으로는 두 페이지 정도가 된다고 하니 처음처럼 200페이지를 책으로 만든다면 400페이지가 넘는 책이 만들어져야 하는 거니... 너무 두꺼울 뻔도 했다.
하지만 내 속마음이 쏙 빠지고 담백한 알몸만 남은 원고를 계속 수정해나가는 건 생각보다 힘들었다.
이거 잘하는 짓인가?
무슨 부귀영화를 누리겠다고 이걸 한다고 했지?
오만 생각이 다 들고 글에 집중이 되지 않았다.
그때부터 내가 뭘 했냐면. 혼자 이것저것 허튼짓을 하기 시작했다. 갑자기 출간 이후를 대비해야겠다며 브랜딩 책들을 읽고, 굳이 이 시기에 새로운 프로젝트를 만들고, 블로그에 글을 열심히 써보기도 하고. 책 쓰기에 집중해도 모자란 시간에 내 마음 가는 대로, 호기심이 생기는 이것저것을 해보기 시작했다.
그러는 사이 출간 계약한 사실을 아는 사람들의 "책 언제 나와요?"라는 말이 부담스럽기 시작했다. 그때부터 조용히 내가 책을 쓰고 있다는 사실을 숨겼다. 그저 아무도 몰랐으면 하고 바랐다. 책 쓰기는 자연스럽게 2순위, 3순위로 밀려나가게 되었다.
그 와중에 더 충격적인 사건이 일어나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