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래도 공항에 갑니다
“심심해. 심심해. 엄마 오늘 뭐해? 심심해.”
공휴일이면 어찌 알고 더 일찍 일어나는 딸내미는 오늘 나가면 고생하는 줄 아는지 모르는지 연신 심심하다고 징징거렸다. 그동안 매일 야근이던 남편도 미안했는지 왠일로 나가자고 제안을 했다. 얼마 전 친구가 사진 찍기도 좋고 크리스마스 분위기 내기도 좋다고 추천해준 곳이 생각나 남편에게 말했더니 바로 거기로 가자고 했다. 그리하여 크리스마스날 우리 네 가족은 인천의 P호텔에 있는 테마파크로 출발했다.
크리스마스 치고 차도 별로 없어 보이고 예상보다 일찍 인천에 도착했는데 문제는 호텔과 가까워지면서 시작됐다. 호텔이 보이기도 전에 줄지어 서있는 차들 뒤에서 옴짝달싹 못하고 있자니 운전하는 남편도 짜증, 기다리던 아이도 짜증, 여기 오자고 한 나도 좌불안석. 그래도 어찌어찌 운 좋게 주차는 빨리할 수 있어 호텔 입구에 들어서면서 남편과 아이의 기분은 좀 나아지는 듯 보였다. 우리는 일단 점심을 좀 먹고 놀기로 하고 식당가로 직진했다.
그런데 크리스마스는 역시나 크리스마스였다. 마치 어린아이들이 있는 집들은 모두 여기로 모인 것만 같았다. 푸드코트에는 앉을자리도 없어서 문 앞자리를 겨우 잡은 것도 모자라 뭐 하나라도 사 먹으려면 긴 줄을 서야 했고, 그 줄을 통과해서 메뉴를 주문하면 최소 50분은 기다려야만 했다. 휴우~ 평소에 사람 많은 곳을 좋아한다면 그 분위기를 즐겼을지도 모르겠으나 원래도 사람 많은 곳은 피하는 나와 남편은 이 상황이 몹시 힘들었다. 설상가상으로 테마파크로 입장하는 줄 또한 한참 길었다.
포기다. 나와 남편은 밥을 먹으면서 이미 기운을 다 뺀 나머지 더 이상 이 공간에 머무는 건 소모적인 일이라 판단, 서둘러 호텔을 빠져나왔다. 그래도 톨비까지 지불하고 인천에 왔는데 그대로 집에 가기는 뭔가 아쉬웠다. 날이 좋았다면 을왕리 바닷가라도 가겠지만 오늘은 육안으로 봐도 공기가 뿌연 게 미세먼지도 나쁨, 하늘색도 나쁨이었다.
“2 터미널 가봤어? 한번 가볼래?”
얼마 전 영국에 다녀오면서 공항 2 터미널에 오래 머문 남편이 인천공항에 가보자고 제안했다. 나 역시 혼자 공항 가는 걸 즐겨하는 편이라 당연히 오케이. 제2터미널에는 마침 전망대도 있다고 하니 아이를 데려가도 좋아할 것 같았다.
공항에 들어서자마자 핸드폰으로 로밍 서비스 어쩌고~하는 문자가 왔다. 마치 내가 다른 나라에서 한국에 막 들어온 외국인이 된 기분이었다. 환전 데스크, 유심 사는 곳 등 각종 안내데스크를 지나면서 왠지 그곳을 하나하나 통과하는 기분마저 들었다. 이미 난 여행을 시작하는 여행자가 되어 있었다. 왠지 여기라면 2019년을 마무리하고 2020년의 시작도 새롭게 해 볼 수 있을 것 같았다. 신년을 맞이하는 장소로 보신각 대신 공항이라니 뭔가 더 로맨틱하지 않은가.
혼돈과 불규칙성이 가득한 세계에서 터미널은 우아함과 논리가 지배하는 훌륭하고 흥미로운 피난처로 보인다. 공항터미널은 현대 문화의 상상력이 넘쳐나는 중심이다. 만약 화성인을 데리고 우리 문명을 관통하는 다양한 주제들을 깔끔하게 포착한 단 하나의 장소에 데려가야 한다면 우리가 당연히 가야 할 곳은 공항의 출발과 도착 라운지밖에 없을 것이다. - 공항에서 일주일을 / 알랭 드 보통 -
출발과 도착이 동시에 이루어지는 곳. 티켓 없이도 누구나 멀리 떠날 수 있고 언제든 다시 돌아올 수 있는 곳. 어디론가 훌쩍 떠나고 싶은 마음을 다독일 수 있는 곳. 공항 편의시설과 푸드코트를 이용하면서 여행 가는 기분을 내볼 수 있는 곳. 이방인이 되어 잠깐 다른 세상을 거닐고 있는 듯한 착각을 하게 하는 곳. 공항은 내게 그런 곳이었다.
얼마 전 티브이에서 ‘스탠드업’이라는 예능 프로그램을 보다가 인상 깊은 장면이 있어서 장면을 찍어두었다. 평소에 여행을 잘 안 간다는 개그우먼 장도연은 엄마와 함께 블라 보스토크에 여행 간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거기서 본 풍경들이 너무 영화 같았다고 고백하던 그녀의 에피소드는 이런 식이었다.
바닷가에 갔다가 블루투스 스피커를 들으면서 웃통을 벗고 굴 채집을 하는 청년들을 봤는데 너무 멋있더란다. 그 청년들이 직접 앞바다에서 굴을 채취해 먹는다고 생각하니 너무 영화 같지 않냐고. 그래서 가서 '당신들 너무 멋있어요' 하고 막 말해주고 싶었다고. 그런데 가만히 생각해보니 우리나라로 치면 바닷가에서 일하는 해녀나 어부들처럼 그저 생계를 위해 일하는 사람들이었다는 거다.
먹고살기 위해서 굴을 채집해서 그걸 파는 사람들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닌. 그런데 여행지에서 본 사람들이나 풍경들은 하나같이 아름답게 보이고 다르게 보였다는 것. 이런 비슷한 경험담 몇 개를 들려주면서 그녀는 일상도 여행처럼 생각하면 그저 평범한 것들도 좀 더 특별하게 볼 수 있지 않겠냐고 이야기했다.
'다르게 보기'
이야기의 핵심은 바로 그거였다. 늘 봐왔던 것도 다르게 보는 것. 우리가 여행을 특별하게 느끼는 것은 아마도 일상과는 다른 낯선 경험들 때문이겠지. 그래서 똑같은 플라타너스 나무를 봐도 우리 동네 가로수로 서있는 그 나무와 파리의 어느 공원에서 본 플라타너스는 또 다른 느낌인 것이다.
여행지에서 느끼는 새로운 시각을 일상에 적용할 수 있다면 우리는 항상 걷는 동네에서도, 매일 출퇴근하는 직장에서도, 늘 마주하는 가족들에게서도 새로운 발견을 할 수 있지 않을까. 지금 내가 있는 곳이 어디든 그곳을 여행하는 여행자라면? 매일 똑같은 답답한 일상 혹은 이리 뛰고 저리 뛰고 치열하게 살아내야 하는 일상 가운데에서 가끔은 설레일 수 있지 않을까?
여행자가 되어 조금 다른 일상을 느껴보기 위하여 돈도 없고 시간도 없는 나는 가끔 공항에 훌쩍 가본다. 비행 티켓 없이도 자유로운 이곳이 얼마나 고마운지 모른다. 새해에는 보신각 타종을 바라보는 대신 활주로에서 나만의 비행기를 띄워올려보자. 올 한 해 아쉬웠던 것과 힘들었던 것들은 저 하늘로 날려버리고 기분 좋게, 가뿐하게 새해를 맞이해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