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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평범한기적 Oct 13. 2022

엄마에게 배운 엇 박자

<엄마 백번만 만나줘>

평소보다 이르게 눈이 떠졌던 아침.

어린 내 기억 속에 엄마는 도시락을 싸고 있었던 것 같아. 그러다 실눈을 뜬 내 곁에 앉아 머릿결을 쓸어주었어.


다시 스르르 잠이 들어서였을까? 그 기억이 꿈인지 진짜인지는 잘 모르겠어. 그렇지만 분명하게 기억하는 게 있어. 아침부터 부지런히 도시락을 싼 엄마는 우리 삼 남매가 학교에 가 있는 동안 관악산 정상을 찍고 왔다는 거야. 그러곤 별일 아니라는 듯 우리에게 호빵을 쪄주고, 다시 부엌에서 서서 부지런히 저녁을 준비했었지.


그 시절 엄마의 얼굴에는 환한 빛이 가득했어. 가끔은 화도 내고 어떨 때는 빗자루 들고 쫓아오는 엄마로부터 줄행랑을 치기도 했지만 엄마에게는 늘 생기가 흘렀어. 학교 마치고 돌아온 어느 날은 물기를 가득 머금은 오아시스에 꽃꽂이를 하기도 했고. 또 어느 날은 쿰쿰한 냄새의 먹을 갈며 우리 앞에서 수묵화를 쳐 보이기도 했지.


그렇게 활력이 넘치던 엄마였는데, 물에 푹 젖은 행주처럼 누워만 있는 모습이 싫었어. 기운 없다고 말하는 엄마를 걱정하기는커녕 맘 속으로 말했어. ‘엄마 또 왜 그러는 거야’ 하고.


나 너무 못됐지? 


곰곰이 생각해보면 엄마도 아픈 엄마를 받아들이는 일이 절대 쉽지 않았을 텐데, 연애하고 직장생활을 하던 이십 대 후반의 나는 그런 엄마의 마음을 알아주기는커녕 모르는 척하고 싶었어. 점점 어색해지는 걸음걸이가 엄마는 두려웠을 텐데, 그런 마음을 알아주기보다 모르는 척하고 있다 보면 한숨 푹 자고 일어나면 다시 괜찮아질 거라 생각하고 외면했어.


엄마 난 어쩜 그렇게 이기적이었을까? 다 키운 딸에게, 엄마의 젊은 시절은 몽땅 기억하는 나에게 때로는 엄마도 엄마가 아닌, 그냥 한 사람으로서 존재하고 싶었을 텐데. 그때 나는 왜 다 피하고만 싶었던 걸까? 돌이켜보면 그런 엄마를 받아들이는 시간이 엄마의 삶을 공유한 나에게도 필요했던 것 같아.


그때의 내가 지금은 밉지만, 그래도 오늘의 나는 좀 더 친절해지기로 해. 미래의 나에게 말이야. 적어도 그때의 나처럼 후회하거나 미워하지 않도록. 그러고 보니 내가 이기적인 건 그때나 지금이나 똑같네. 엄마가 염려돼서 전화하기도 하지만, 나중에 내가 너무 슬퍼할까 봐. 너무 후회하게 될까 봐 엄마에게 전화하고, 시시콜콜한 이야기를 나눠.


아침에 동네 동산에 올라 운동을 한 엄마를 칭찬해주고, 엄마 혼자 쓸쓸히 점심 먹을 것을 알면서도 밝은 목소리로 전화를 끊어. 그리고 나도 곧 쓸쓸한 점심을 먹어.


엄마 그때 기억나? 우리 신정동 집에 살 때 말이야. 한 열 살 쯤이었던 것 같아. 해는 넘어갔지만 아직 저녁이 남아있던 하늘을 보며 옥상에 아빠와 앉아 있었는데, 오늘 배운 동작이라며 엄마가 에어로빅을 선보였잖아.


그러고 보니 엄마의 박자 감각은 아프기 전인 그때도 참 별로였던 것 같아. 열 살의 내 눈에도 쉬워 보이는 찌르기 동작을 어쩜 그렇게 엇박자로 선보이던지. 엄마가 나에게 처음 보여준 많은 것 중 하나가 바로 그 엇박자였어. 아빠와 나는 깔깔거리다 아무래도 에어로빅은 그만하는 게 좋겠다고 했고, 그 말에 엄마도 동의를 했었지.


엄마. 그런데 말이야. 난 그때 엄마에게 배운 엇박자로 살고 있나 봐.


같은 서울 하늘 아래 살 때는 애들이 너무 어리다고, 애 둘 데리고 오가는 길이 너무 힘들다고, 엄마가 그렇게 애들 보고 싶어 해도 자주 안 갔으면서 지금 엄마는 충남에 나는 제주도에 사는데 엄마가 참 자주 보고 싶어.


울 엄마 지금은 뭐할까? 오늘은 시장에서 또 무얼 샀을까? 볼 때마다 스카프 색이 점점 화려해지던데 이번에는 또 어떤 컬러가 엄마의 지갑을 열게 했을까? 사소한 게 다 궁금해. 젊은 시절 엄마가 삼 남매를 학교에 보내고 훌쩍 관악산 정상을 찍고 왔던 것처럼, 나도 엄마를 보러 훌쩍 청주 공항으로 날아가 볼까? 마치 별일 아니라는 듯 말이야.


그래 알아. 그냥 말로만 하는 말이야. 현관에 서서 벨을 누르면 나한테 무슨 큰일이 생긴 줄 알고 엄마가 엄청 놀랄 테니 그런 일은 하지 않을게. 그렇게 오가면서 하늘에 돈 다 쓰면 안 된다고 엄마가 또 새로운 걱정을 시작할 테니까 아무리 엄마가 보고 싶어도 지금은 참아보겠어.


엄마, 그래도 말이야. 난 이 엇박자가 소중해.


엄마에게 내 마음을 표현할 수 있고 시시콜콜한 이야기를 나누는 지금이 얼마나 좋은지 몰라. 엇박자쯤이야. 정박이 아니면 뭐 어때. 늘 정박에 맞춰 사는 것도 노잼 아니겠어? 그러니 엇박자든 무엇이든, 엄마에게 더 자주 전화하고 더 자주 내 사랑을 표현할래. 오늘도 지금 이 순간도 그리고 아마도 내일 점심 무렵에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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