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읽는 걸 좋아하는 나라서 몸조리할 때부터 그 모임을 기다렸다. 어떤 책이 선정되더라도 몽땅 읽고 부끄럼 없는 이야기를 나누고 싶었다. 그런데 책의 첫 챕터를 읽자마자 부끄러워졌다.
몹시도 부끄러워서 엄마에게 전화하는 일이 망설여질만큼.
함께 읽기로 한 책은 아서 프랭크의 <아픈 몸을 살다>였다. 저자는 말했다. 가장 아팠던 시기에 듣고 싶었던 말이 있었다고. 우리는 당신의 고통을 알고 그 고통을 받아들인다는 말을 듣고 싶었다고. 의사이면서 고환암환자였던 저자는 아픈 몸으로 살았던 시간을 덤덤히 말해주었다.
"나는 의사와 간호사가 때로 제대로 치료하지 못한다는 사실을 받아들일 수 있다. 받아들일 수 없는 일은 가족과 친구들이 자신 또한 나의 질병 과정에 동참하고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는 것이다." - '아픈 몸을 살다' 아서 프랭크 -
표현에 서툰 엄마가 삼켜두었을 감정이 쓰여있었다. 엄마의 고통을 인정하고 받아들이며 함께하겠다는 말을 엄마는 기다렸을지도 모르겠다. 책 장을 넘기며 자주 울컥했다. 많이 외로웠을 엄마가 읽혔다.
다 키운 자식이 있음에도. 마음 한 번 물어봐 주지 않고, 건성으로만, 그저 밝게 포장한 웃음으로만 질병을 이야기했던 내가 떠올랐다. 가끔씩만 진지해지는 딸을 보며 엄마는 얼마나 외로웠을까.
'내 자식이 아팠어도
과연 내가 그랬을까?'
아이의 몸이 아프면 내 마음도 함께 아팠다. 작은 증상도 책을 찾아보고, 병원에 갈 거지만 혹시 그전에 할 수 있는 일이 있을지 살폈다. 아이의 몸은 물론 마음까지 살피려 부단히 애를 썼는데 그걸 보는 엄마의 마음이 어땠을까.
사실 엄마의 질병에 비하면 아이의 아픔은 지극히 사소한 일이었다. 그런데도 그렇게 부지런을 떨었으면서 엄마의 생을 관통하게 된 질병을 앞에 두고 게으름을 부렸음에 미안했다. 미안하다는 말도 너무 미안할 만큼 미안해졌다.
발병 이후 엄마는 모임에 나가는 일을 꺼렸다. 동네 사람들에게 자꾸 떨리는 손을 보여주기 싫다고 했다.
"에이 엄마 괜찮아. 뭐 그런 걸 가지고 그래" 어렵게 꺼낸 이야기도 별일이 아니라는 듯, 별거 아닌 일로 또 그런다는 듯 일갈하던 나였다. 그랬기에 과연 엄마는 한 번이라도 마음속 이야기를 털어놓은 적이 있었을까.
"아픈 사람을 도와주는 대가로 명랑하고 용감한 모습을 요구하는 사람은 자신의 인간 성을 부정하고 있는 것이다. 이런 사람은 인간이 언젠가는 아프고 죽을 수밖에 없는 존재임을 부정한다. 아픈 사람에게 필요한 것은 인간의 몸이 얼마나 취약한지 주변 사람도 함께 인정하는 것이다." - '아픈 몸을 살다' 아서 프랭크 -
책 속 이야기는 사실이었다. 나는 엄마가 아프다는 것은 물론, 나도 얼마든지 아플 수 있다는 것을 부정하고 있었다. 그 사실을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데 이토록 오랜 시간이 걸렸다.
엄마에게 말하고 싶다. 너무 오래 걸려서 미안하다고. 알다시피 내가 좀 많이 느리지만, 앞으로는 그러지 않겠다고 새끼손가락 걸고 약속이라도 해두고 싶다. 아이들이 아플 때 작은 일 하나도 물어봐주고, 마음 알아주고, 토닥여 주며 곁에 있었던 것처럼 앞으로 엄마의 질병에 진심으로 동행하겠다고 말하고 싶다.
그런데 사실 이 말을 어떻게 전해야 할지 잘 모르겠다. 모르는 게 투성이라 울기만 하는 바보가 되어버렸다. 그래도 조금 더 용감하게 명랑해 지기로 결심한다. 많이 울었으니 앞으로는 그래야 할 것 같았다. 그나마 할 줄 아는 일인 책을 읽으며 알게 된 사실이 있으니.
"아픈 사람의 질병을 인정할 때, 아픈 사람은 정말로 용감하고 명랑해질지도 모른다.
애써 유지하는 겉모습이 아니라 사람들과 공유하는 감정을 자연스럽게 표현한 모습으로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