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평범한기적 Oct 24. 2022

제주에서 홍차 한 잔 어때?

< 엄마 백번만 만나줘 >

어떤 추억은 향기를 머금고 있다. 나에게는 홍차의 향기가 그렇다. 마을 언니들과 점심을 먹던 날, 함께 홍차를 마시러 갔다. '카페 판'이라고 불리는 그곳으로. 처음에는 원도심의 작은 골목에 카페가 아닌 홍차 집이 있다는 마을 언니의 말을 믿기가 힘들었다. 호기심에 한번 가보았지만 굳게 닫힌 문이 영영 닫혀있는 것처럼 보였다. 


그러다 우연히 인스타 추천으로 '카페 판'의 계정을 알게 되었다. 주인은 지금 프랑스라고 했다가 또 어느 날은 싱가포르이라고 했다. 맛있는 차와 독특한 소품을 찾아 여행 중이라는 피드를 보았다. 


그 후로 꼭 가봐야 하는 곳이 되었다. 


제주 돌담 위 둥근 티팟이 그려진 간판처럼, 독특한 자신감을 품고 있는 그곳이 궁금했고 무엇보다 홍차의 진한 향기를 기억하는 나라서. 


큰 아빠의 집에서는 늘 홍차 향기가 났다. 


큰 아빠라고 불렀지만 아빠의 이종사촌 형이었다. 읍내에서 자란 아빠가 시내에서 고등학교를 다닐 때, 아빠의 삼촌이자 큰 아빠의 아버지인 집에서 지냈기에 아빠는 큰 아빠를 친형처럼 여겼던 것 같다. 자연스럽게 명절이면 전라남도의 할머니 집 보다 가까운 신길동의 큰 아빠 집을 찾았다. 명절은 물론 주말에도 자주 갔는데 나는 그 일을 무척 좋아했다. 


삼 남매의 둘째로 태어난 나는 매사 억울한 일이 많았다. 분명 내가 동생인데 집에서는 오빠보다 더 자주 설거지를 했고, 학교에서는 공부 잘하는 오빠 때문에 민수 동생으로 불렸다. 그러나 정작 나를 억울하게 만든 오빠는 하도 나를 곰순이라고 놀려서 울분하게 만들었다. 울고 툴툴거리다가 가끔은 내가 진짜 곰순이처럼 못났건가 하는 생각을 품기도 했다. 


그런 나에게 큰 아빠는 '고려청자'라고 불러주었다. 


태어나 처음 들어본 세련된 이름이었다. 고려청자처럼 세상에 딱 하나 존재하는 빛을 지닌 사람으로 자랄 거라고 큰 아빠는 말하고 또 말해주었다. 그런 큰 아빠의 무릎에 앉아있으면 오빠도 더는 나를 곰순이라고 놀리지 못했기에 큰아빠 집에 가는 일이 더욱 좋았다.  


세련된 말만큼이나 큰 아빠의 집에서 나는 모든 냄새가 좋았다. 미군에서 일하던 큰아빠 집에는 신기한 물건과 함께 처음 맡는 향이 가득했다. 닫힌 뚜껑 위로 킁킁대며 맡아본 바셀린의 향,  알록달록 곰돌이 모양의 하리보 젤리의 향. 그중 특히 레몬을 짜넣은 향긋했던 홍차 향이 늘 은은하게 배어 있었다. 


나도 어른이 되면 저렇게 우유에 홍차를 넣고 마셔봐야지. 레몬 향이 나는데 왜 색은 갈색인 걸까. 호시탐탐 홍차 한 모금을 노리는 내 입에 엄마는 각설탕을 넣어주셨다. 혀끝으로 각설탕을 굴리며 나도 빨리 홍차를 마시는 어른이 되고 싶었다.  


어른이 되어 마신 홍차는 향긋한 향기와 달리 텁텁하고 씁쓸한 맛이 났다. 


이런 떫은맛을 왜 그때 엄마는 자주 마셨던 걸까. 평소 집에서는 마시지 않지만 큰 아빠 집에서는 홍차를 마시던 시간이 엄마에게는 쉬는 시간이었음을 어른이 되고서야 알게 되었다. 


나도 결혼을 하고 시집 식구가 생기고, 남편의 어머니가 아닌 남편 큰 어머니의 주방에 서있는 동안 자연스럽게 알게 되었다. 향긋하지만 텁텁한 맛, 씁쓸해도 뱉지 않고 삼키는 맛. 


엄밀히 말하면 엄마는 굳이 큰 아빠 집을 자주 가지 않아도 되었다. 아빠와 큰 아빠는 이종 산촌 지간이었을까. 적당히 주방일을 거들며 담소를 나누기만 해도 괜찮았을 것이다. 그렇지만 그 시절은 딸이라는 이유로 오빠보다 내가 더 자주 설거지를 했던 시절이니까, 엄마도 당연히 큰 집에 가면 분주히 움직였다. 


온갖 일을 다 하고도 고된 시집살이로 맘고생 마저 시키는 고모들과 달리 조금은 편안한 마음으로 엄마는 큰 엄마의 주방에서 서있었을 것이다. 그래도 큰 엄마도 엄연히 시집 식구였고, 처음에는 호의로 했던 행동도 당연시되었을 것이다. 당연해진 일은 그만두기가 힘든 법이다. 그러면서 점점 엄마는 지쳐갔을 것이다. 


엄마에게 찾아온 파킨슨병은 '나를 사랑해 달라고' 말하는 병이라는 걸 어느 책에서 읽었더랬다. 또 다른 책은 말했다. 


슬플 때 울지 않으면 다른 장기가 대신 운다고. 


자기감정을 잘 들어내지 않는 엄마를 그저 무뚝뚝하다고만 생각했었다. 그러나 지금의 나보다 어렸던 엄마는 힘든 것을 느끼지 않으려 참다 보니 좋은 것도 느끼기 힘들 졌을 것이다. 병의 모든 원인이 시집 스트레스가 아니라는 걸 알면서도 아이를 낳고 키우는 동안 큰 아빠와 거리를 두게 되었고, 큰 아빠가 돌아가신 후 더는 큰 집에 가지 않았다. 


엄마에게 묻고 싶었다. 엄마가 나의 보호자이던 시절 엄마는 왜 엄마를 보호하지 못했던 거냐고. 


힘든 일 궂은일 다 마다하며 억울했을 텐데 왜 말하지 못했냐고? 그러다 일상을 지탱하는 감각마저도 닫아버렸던 거냐고.


어쩌면 그 시절 엄마는 울타리를 갖고 싶었던 거라고. 그때 엄마의 나이보다 다섯 살 많은 나는 생각한다. 모진 시집살이를 시키던 네 명의 고모보다 어른인 큰 아빠 큰 엄마에게 기대고 싶은 마음이었을 거라고. 이유 없는 구박을 한 번쯤은 막아줄. 엄마 편에서 목소리를 내줄 그런 울타리 같은 사람이 엄마는 필요했던 거라고. 


그 울타리에 기대기 위해 힘들어도 묵묵히 주말이면 시내버스에 삼 남매를 태워 역곡에서부터 신길동까지 그 먼길을 오갔던 거라고 엄마를 이해한다.


그런 엄마에게 말해주고 싶다. 


그렇게 얻어낸 울타리는 결국 엄마가 바라던 진짜 울타리가 되진 못 했지만 나에게 엄마는 그런 울타리였다고. 


한 번도 나에게 고려청자 같은 세련된 이름으로 불러준 적이 없는 엄마지만 마음 깊이 나를 사랑해준 덕분에 나는 감정을 느끼고, 표현할 줄 아는 어른으로 자랐다고. 


부당한 일 앞에 부당하다고 말할 줄 아는 사람이 되었고, 무엇보다 내 마음을 우선적으로 돌볼 줄 아는 어른이 되었다고. 그랬기에 지금 내가 누리는 행복의 많은 지분이 바로 엄마가 지나온 시간들에 있다고 꼭 이야기해주고 싶다. 


비가 주적주적 내리는 어느 날. 

딱히 할 일이 없어 지루한 어느 오후 

엄마와 함께 홍차카페에 앉아 괜스레 옛이야기 꺼내기 좋은 홍차 향기를 앞에 두고.    

+제주 원도심의 숨은 보물,

티하우스 '카페 판' 부모님도 좋아하실 티웨어가 가득한 곳이라 절로 옛 추억을 꺼내보기 좋은 곳입니다.

@cafepanjeju


+이미지 출처

© pixeldustie, 출처 Unsplash 

© priscilladupreez, 출처 Unsplash

이전 10화 비 오는 날 스냅 촬영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