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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평범한기적 Oct 23. 2022

비 오는 날 스냅 촬영

< 엄마 백번만 만나줘 > 

"엄마 하얀색 블라우스 잘 챙겼어?"


이제 내일이면 만나는 엄마, 아빠. 성큼 다가온 추석과 함께 내 마음도 바빠진다. 이번 여행 중에는 가족 스냅을 찍기로 했기 때문에 전화를 걸어 확인을 한다. 화려한 색을 좋아하는 엄마라는 걸 알지만 스냅 촬영의 '키 컬러'는 하얀색이기에 그 옷을 엄마가 슬쩍 빼놓았을까 봐 자꾸 전화를 했다.  


"무슨 사진을 찍어. 안 찍어."


가족사진을 찍자는 말에 대한 엄마의 첫 반응이었다. 예상했던 반응이라 괜찮았다. 나에게는 백 프로 설득 가능한 작전이 있기 때문이다. 엄마 오늘이 우리 생애 가장 젊은 날이야. 엄마 남는 건 사진뿐이야. 이런 말보다 더 확실한 말. 바로 그것은,


"엄마 애들이 너무 빨리 커. 더 크기 전에 사진 찍어두자. 엄마 아빠도 같이 찍고."


작전 끝! 엄마는 바로 좋다고 했다. 단 아빠도 좋다고 하면 찍겠다고 한다. 곧장 아빠에게 전화를 했다.


"사진? 사진이라고?"


역시나 예상했던 반응이다. 그러나 나에게는 천군만마가 있다. 바로 50% 엄마의 승낙. 아빠에게 말한다. 아빠만 찍는다고 하면 엄마도 찍겠다 한다고. 후훗. 이것으로 나의 작전은 성공으로 종료되었다. 


제주에서 활동하는 스냅 촬영 작가에게 연락을 하고 공손히 말한다. 추석 연휴 바로 다음날 사진 활영을 할 수 있겠느냐고. 부모님이 그날 저녁에 비행기를 타야 하니 꼭 그날, 그 시간이어야만 한다고. 그리고 하나 더, 부모님과 아이들은 물론 나와 동생도 함께 찍으면 추가 비용이 어떻게 되냐고.


친절한 답변이 도착했다. 원하는 시간으로 맞춰드리겠다고. 부모님과 함께 오는 거라면 추가 비용을 받지 않겠다고. 


아 역시, 엄마에게서 태어난 사람끼리는 통하는 게 있구나! 


다정한 답변을 받으니 그날 촬영 분위기도 왠지 훈훈할 것 같아 안심이다. 처음 보는 사람 앞에서 사진 찍는 일이 부모님은 물론 나도 어색하다. 그런데 다정한 기운을 지닌 사람 곁에 있으면 긴장도 슬며시 풀어지기 마련이니까. 엄마 아빠의 허락을 받고, 일정까지 모두 맞추니 흐릿했던 하늘이 맑아지는 느낌이었다. 


그런데 정작 스냅 촬영 날 아침, 주룩주룩 비가 내렸다. 


네 명의 아이와 네 명의 어른 모두 흰색옷으로 맞춰 입었는데. 늘 날이 좋다가 왜 하필 오늘 비가 오는지. 마음도 말도 몽땅 툴툴거리고 싶어졌다. 아이는 물론 어른도 비 맞고 감기 걸리면 안 된다는 생각에 더욱 마음도 움츠러든다. 


그래도 예약은 해두었고, 지금이 아니면 언제 또 이렇게 여덟 명이서 옷을 맞춰 입고 사진을 찍게 될지 모르니 취소하진 않았다. 


무엇보다 핸드폰 속 사진을 늘 보고 있는 엄마를 잘 알기 때문이다. 안 그래도 자주 보는 사진이지만 이렇게 함께 시간을 보내다 각자의 집으로 흩어진 후에는 더 자주 사진을 들여다볼 엄마의 모습이 눈에 선했기 때문이다. 


출근 준비로 바쁜 남편인 걸 잘 알지만 부탁했다. 편의점에서 투명 우산을 사다 줄 수 있겠냐고. 편의점 몇 군데를 열심히 돌아다닌 끝에 남편은 투명우산 5개를 건네주었다. 오늘 비록 함께 촬영은 못하지만 부모님과 좋은 시간 보내라는 다정한 말과 함께.  


자, 그럼 오늘은  비 오는 숲으로 출발! 애써 경쾌하게 말하며 송당의 어느 숲으로 향했다. 주소도 없는 숲이었다. 큰 길가에서 만난 스냅 작가의 차를 꼬리잡기 하듯 따라가며 좁다란 길을 운전했다. 깊은 숲으로 들어갈수록 점점 거세지는 비와 바쁘게 움직이는 와이퍼. 네 명의 어른과 네 명의 아이로 북적이는 차 안. 


아니 무슨 사진을 찍는 일이 이렇게 비장할 일인가? 싶은 마음이 들 무렵, 드디어 도착했다. 


심호흡을 하며 생각한다. 나는 오늘 아이들의 그 어떤 땡강이 몰려와도 짜증 내지 않을 것이다. 나는 오늘 그 어떤 화가 치밀어도 참을 것이다. 나는 울면서 사진찍는 아이를 만들지 않을 것이다. 


깊이 숨을 들이마신 후 차에서 내렸다. 우산을 펼치고 고개를 들었다. 세상에나. 온 세상이 다 초록이었다. 와이퍼가 닦아준 면적만큼만 볼 때는 보이지 않았던 초록 풍경이 내 눈앞에 펼쳐져 있었다. 엄마와 아빠도 감탄하기는 마찬가지였다. 낮은 구릉에 끝없이 펼쳐진 초록빛 잔디. 능선 너머 물안개가 가득한 숲이 그곳에 있었다. 


"어머, 어쩜 이런 곳을 다 알고 계셔요?"


이렇게 궂은 날씨에 촬영을 나와준 이에게 더 세련된 인사를 건넸으면 좋았을 텐데. 그러나 대답 없이 소박하게 웃는 스냅 작가의 미소가 이것도 꽤 괜찮은 인사라고 말해주는 듯하다. 내리는 비에 아이들도 긴장한 걸까. 평소와 달리 차분하게 차에서 내려 할아버지와 할머니의 우산으로 쏙 들어갔다. 


"그런데 우산을 안 쓰셨네요?"


아이들의 말에 그제야 알아차렸다. 우리는 우산이 없으면 안 되는 것 마냥 꼭 붙들고 서 있는데, 작가님은 우산 없이 소박하게 웃고 계셨던 것이다. 그 모습에 모두 즉각 협조적으로 변한다. 


이쪽으로 오세요. 하면 이쪽으로 가고. 

손잡고 걸어보세요. 하면 냉큼 더듬어 손을 잡는다. 


"비 맞아서 어떻게 해요! 

이제 우리 그만 찍고 어서 우산 써요." 

엄마가 스냅 작가에게 말하면


"허허허 괜찮습니다." 

하는 도돌이표 대화가 촬영 내내 이어졌다.

 

좋은 순간을 포착하기 위해 우산을 버리고 묵묵히 촬영을 하는 모습에 네 명의 어른과 네 명의 아이는 모두 성실하게 응했다. 그 덕분에 딱 한 시간 만에 촬영을 마쳤다. 그 한 시간도 순식간이었다.  


괜히 전문가가 아니었다. 매우 신속하고 유쾌하게 그리고 따뜻한 매너로 시간 가는 줄도 모르게 촬영을 마쳤기에 '노벨 평화 스냅상'이라도 주고 싶은 마음이었다.


비 오는 날 숲에서 사진 찍는 일은 분명 색다른 경험이었다. 


차에서 내린 우리를 스냅 작가는 어느 작은 오솔길로 안내해주었는데, 그 길을 따라가니 제주의 삼나무 숲이 펼쳐져 있었다. 


"비 오는 거 맞아?"


빽빽한 삼나무 숲이 우산이 되어준 덕분에 촬영 중간중간 우산을 내려놓은 모습도 카메라에 담을 수 있었다.

비를 피할 수 있음은 물론 빗방울 가득 머금은 진한 숲 향기와 잔잔하게 퍼져있는 물안개를 보며 생각했다.

이 순간을 사진으로 남기길 잘했다고. 


비 온다고 겁먹거나 취소하지 않고,  비 오는 날에만 만날 수 있는 이 풍경 속에 엄마 아빠와 함께 서 있어보기를 잘했다고. 우리가 소유할 수 있는 건 과거도 미래도 아닌 오로지 지금 이 순간이기에 그 순간을 사진으로 남기길 정말 잘했다고. 


사진은 남기기 위해 찍는 것이라면, 

이날 우리는 무엇을 남긴 것일까?


다이어리에 나는 이날을 '작은 승리'이라고 적어두고 싶다. 함께 살게 된 부모님의 질병은 어차피 이길 수가 없다. 비단 두 분의 질병만 그런 게 아니고 세상에 나만 그런 것도 아니다. 흘러가는 시간과 싸워서 이길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고 누구에게나 찾아오는 보편적인 패배 중 하나이니까.  


그렇다면 나는 즐겁게 지고 싶다. 결국에는 지더라도 오늘 하루, 지금 이 순간을 재미와 의미로 가득 채우며.가끔은 소소한 승리도 즐기며. 그러던 어느 날 모든 시합이 끝났을 때, 그날 그 경기만큼은 참 재미있는 경기였어라고 말할 수 있도록. 그 작은 승리를 오늘 남겼다. 그 승리의 증거가 이렇게 사진으로 남아있다.

+날씨가 변덕스러운 제주, 비가 내렸던 스냅 촬영 날 준비한 것들이에요. 


1. 갈아입을 여벌 옷과 신발을 챙겨갔어요.

2. 아이들과 부모님 감기 걸리지 않도록 수건도 챙겨갔습니다.

3. 편의점에서 파는 투명은 화장과 머리스타일을 고수할 수 있게 해 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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