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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평범한기적 Oct 21. 2022

승마로 갚는 의리

< 엄마 백번만 만나줘 >

'의리'라는 한자어를 자주 검색하던 때가 있었다. 사람 사이 관계에서 지켜야 할 '도리'라는 뜻풀이를 읽는다. 그러면 다시 '도리'를 검색했다. 길'도' 다스릴 '리'. 의리를 지키는 일은 무언가를 다스리며 가야 하는 길인가 보다 하며 눈물을 닦곤 했다.


엄마는 종종 말했다. 삼 남매 중 영어를 가장 잘하는 나와 해외여행 가는 게 소원이라고. 그 소원을 들어주는 일은 엄마와 아빠에 대한 나의 의리였다. 삼 남매가 동시에 대학을 다니던 시절, 하필 아빠 사업도 어렵던 그때 나는 기막힌 소식을 듣고 귀가했다. 어학연수가 너무 가고 싶은데, 돈을 벌면서 갈 수 있는 방법이 있다고. CCUSA라는 프로그램을 통해 미국의 초등학생이 오는 캠프에서 근무하는 일이라고 설명했다. 워킹홀리데이보다 일도 수월하고, 현지인과 교류도 할 수 있다며 엄마 아빠를 설득했다.


이윽고 본심을 드러냈다. 항공료를 포함해서 200만 원이 드는데 삼 개월 근무를 마치고 나면 180만 원을 받게 된다고. 그때 다 갚을 테니 먼저 돈을 좀 빌려달라고. 가만히 내 말은 들던 아빠는 고개를 끄덕였다. 전혀 예상치 못한 답과 함께. 아빠차분히 말했다. 이왕 휴학하고 미국까지 가는데 캐나다로 가서 어학연수도 하고 돌아오라고. 돈 걱정은 네가 하는 거 아니라고. 그래도 돼? 토끼 눈을 뜨며 되물었지만, 이미 출국 중인 나를 상상했다. 오랜 친구 은서가 캐나다로 어학연수 간다고 말한 걸 아빠가 기억하고 있었다는 반가운 마음과 함께.


나의 영어는 그 시절 아빠의 대출로 쌓였다. 학교 졸업 후 직장생활을 수월하게 이어갈 수 있었던 것도 그때 아빠가 쌓아준 영어 덕분이다. 그랬기에 내가 직장에서 돈을 벌고 휴가를 받으면 엄마 아빠랑 꼭 해외여행을 갈 거라고 생각했다. 캠프생활을 했던 알래스카까지는 못 가더라도 캐나다만큼은 꼭 엄마 아빠와 함께 가려고 했다.


그러나 생각만 했다. 휴가철이 되면 함께 어학연수를 했던 은서와 태국, 필리핀, 일본으로 여행을 다녔다. 언젠가는 조만간은 하며 늘 집에 있는 엄마를 모르는 척하고 부지런히 놀러 다녔다.


철이 든다는 건 의리를 지키지 못한 일에 대해 후회하는 순간이다. 의리를 채우지 못한 자리에 후회가 고 마음속에 물드는 것이 바로 철드는 것이라고 누군가 내게 물어본다면 말해줄 것이다.


삼 남매의 학자금 대출에 새롭게 더해진 대출을 갚는 동안 이렇다 할 취미가 없던 아빠는 더 많은 담배를 태웠을 것이다. 타들어 가는 담배와 함께 아빠의 건강도 조금씩 사그라들었을 것이다. 어학연수를 다녀온 지 스무 해가 지난 어느 날, 자꾸 기침을 하던 아빠를 모시고 병원에 다녀온 동생이 진료 결과를 전해왔다.


"언니, 앞으로 아빠가 감기만 걸려도 바로 응급실로 오라고 하더라고. 혹시라도 폐에 가래가 많이 끼면 위험할 수 있다고."


그제야 묻어둔 의리가 떠올랐다.


"그럼, 아빠랑 이제 해외여행은 못 가는 거야?"


그에 대한 답은 동생도 나도 병원에서 듣지 못했지만 어느 정도 알고 있다. 장거리 비행 시 목에 스카프를 두르지 않으면 나도 금세 감기에 걸리는데, 한여름에도 에어컨을 잘 안 켜는 아빠에게는 더 조심해야 할 일이었다. 늘 익숙한 집에서 아빠에게 맞는 온도와 습도로 잠을 자다가 낯선 호텔 방에서 자는 일도 더 많은 주의가 필요한 일이 되었다.


"그러게 아빠 왜 그렇게 담배를 많이 피운 거야!" 화가 났지만, 아빠에게 화를 낼 수는 없는 일이다.

"지금이라도 가자!" 자리를 털고 일어나고 싶지만 택시 잡듯 비행기를 잡아탈 수도 없는 노릇이다.


그러나 계획대로 의리를 못 갚았다고 해서

앞으로도 갚지 말란 법은 없다. 


캐나다에 함께 가는 일은 어려워졌지만 캐나다에 갔다면 함께 해보고 싶었던 일을 이곳 제주에서 찾았다. 바로 말 타고 숲 속을 걷는 일이었다. 잔기침만 빼면 일상에 무리가 없는 아빠에게 충분히 가능한 도전이었다.


승마를 떠올리게 된 건, 두 아이가 제주 교육청에서 지원해주는 학생 승마 체험을 받게 된 덕분이었다. 아이들이 말에 올라탄 후 숲 속으로 사라질 때 잊고 지낸 기억이 떠올랐다. 바로 아빠가 보내준 캐나다에서 배운 나의 첫 승마가.


캐나다에서는 홈스테이 가정에서 지냈다. 다행히 좋은 호스트를 만났고 그 부부는 나에게 4살이던 아들의 베이비 시터를 맡겼다. 캐나다 대학생들은 이렇게 용돈을 번다며 나에게 용돈도 두둑이 주었다. 그렇게 번 돈으로 승마를 배우고, 그 소식을 적어 아빠에게 편지를 보냈다. 그 시절 아빠는 답장을 참 많이도 해주셨는데, 답장의 내용은 늘 같았다. 아빠가 해보지 못한 경험을 내가 하는 것만으로도 아빠는 마음이 벅찬다는 내용이었다.   


민정아 아빠가 너에게 도저히 해줄 수 없는 것을

너는 마음껏 만끽할 수 있다는 게

얼마나 고마운 일인지 몰라.

이 모든 것을 직접 경험하고 체험하는 너 못지않게 아빠도 설레고 신나고 재밌고 좋단다.

마냥 흐뭇하고 다음에는 어떠한 즐겁고 환상적인 얘기를 들려주려나 하고 기대 속에 설레기도 한단다.

정말 정말 내 딸 민정이가 장하고 믿음직스럽다.       

그 시절 아빠로부터 받았던 편지



반듯하게 적힌 아빠의 손 글씨. 그 안에 담긴 나를 향한 아빠의 기울임 없는 한결같은 사랑을 기억한다.


그렇기에 나 만큼이나 새로운 경험을 좋아하는 아빠에게 승마의 경험도 맛보게 해주고 싶었다. 비록, 의리의 '의'자도 못 갚을 일이지만 자책하고 슬하며 시간만 낭비하느니, 조금씩, 하나씩 갚고 싶었다.


초보도 가능한 숲 속 승마 체험이 있는지 알아보았다. 친절하고 안전하게 이끌어 줄 선생님도 알게 되었기에 이번 가을 부모님이 오면 하고 싶은 일 중 하나로 정해두었다.


칠순이 훌쩍 넘은 아빠에게 숲 속 승마를 하자고 제안을 했다. 잠시 고민하던 아빠는 "그럴까?" 하고 덤덤히 따라준다. 자식이 하자고 하는 것을 무엇이든 묵묵히 해주는 모습. 묻거나 따지지 않고 덤덤히 동행해주는 모습을 나는 늘 아빠에게 배운다. 그 믿음이 바로 나를 향한 아빠의 사랑임을 안다. 어릴 때부터 지금까지 내가 느껴온 가장 큰 종류의 사랑을.


승마 예약 시간 맞춰 갔는데 하필 비가 내렸다. 날씨 상황을 보고 다시 오기로 했다. 재빨리 비를 피할 수 있는 인근 관광지를 검색해 보니 차로 십 분 거리에 '제주 세계 자연 유산센터'가 있었다. 마침 근처에 아빠가 좋아하는 꼬막 비빔밥이 유명한 밥집도 있었다. 맛집이라 그런지 한 시간이 넘는 대기 시간이었지만 괜찮았다. 번호표를 받고 바로 옆 세계 자연 유산 센터를 둘러보면 되니까. 산책하듯 구경을 하고 든든히 점심도 먹었다. 점심을 먹자마자 기가 막히게 날씨가 화창해졌다.


"아빠! 가자! 말과 함께 숲 향기 맡으러!"


엄마는 그러다 다치면 어쩌냐고 했지만, 지금이 아니면 또 언제 해보겠냐며 엄마의 염려를 다독였다. 아빠는 승마 조끼도 스스로 골라 입고, 안전모의 조임 줄도 단단히 조여두었다. 아빠, 두 아이, 남편, 그리고 나. 각자의 말 등에 오른다. 함께 숲으로 들어간다. 무리의 앞 말과 뒷 말을 끈으로 연결한 후 그 끈을 잡고 두 명의 선생님도 함께 걷는다.


한 시간 전까지만 해도 비가 내려서 숲 길은 진흙 투성이었지만, 숲 길을 잘 아는 두 분이 동행해주니 든든했다. 덕분에 앞서 가는 말의 엉덩이만 바라보다 조금씩 주변 풍경도 눈에 담다. 쭉쭉 뻗어있는 삼나무와 이름 모를 들풀. 그러나 잊지 못할 향긋한 숲의 향.


말 등 위에서의 리듬이 어느 정도 익숙해지자 이내 숲의 고요함에 편안해진다. 그 고요함을 기억한다. 말 발자국 소리와 풀벌레 소리 외에는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던 캐나다 숲에서의 고요함을. 더는 무엇이 필요하지 않고 그저 걷기만 해도 충분했던 그 적막함을.


약 30분 여분의 승마를 마친 후 숲 밖으로 나왔을 때, 기다리고 있던 동생이 아빠의 사진을 남겨주었다. 엄마도 곁에서 손을 흔들며 숲에서 나온 우리를 반겨준다.


나도 나를 반긴다. 지금의 나에게 맘속으로 손을 흔든다. 아빠와 해보길 잘했어. 비록 캐나다에서 갚지 못했지만, 그래도 캐나다의 기억 한 조각에 아빠와 함께한 지금을 더할 수 있게 되었으니.


늘 나의 등 뒤에 있던 아빠지만 이 날 만큼은 아빠의 등 뒤에 있어보 잘했다고 내가 나에게 말해준다.


+부모님과 함께 갔던 숲은 부대 오름이예요. 제주 오름 승마랜드에서 약 30분 코스로 체험할 수 있습니다.

초보자도 가능한 코스예요.

그래도 심장이 쫄깃한 순간은 있습니다.

헬멧과 조끼는 승마장에서 빌려줘요.

대신 운동화랑 긴 바지는 필수랍니다.

승마체험과 함께 일정 짜기 좋은 식당은 제주 쌍 춘재와 제주 세계 자연유산 센터였습니다.

방문 전 전화는 필수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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