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정적인 ’민셩셔취 (民生社區)’
도심 한가운데 자리한 송산(松山) 공항, 그 근처 당신이 꿈꾸던 타이페이 골목의 이미지가 실현되는 곳이 있다. <타이페이, 동네를 걷다> 시리즈 세 번째, 오늘은 아담한 옛날 아파트들과 오래된 나무들이 골목마다 가득한 정겨운 동네, ‘민셩셔취(民生社區, Minsheng Community)’를 소개한다.
예전부터 선생님, 공무원 등 비교적 보수적인 직업군이 많이 살고 있는 ‘민셩셔취(民生社區)’는 인접해 있는 송산공항의 ‘고도 제한’으로 유난히 재개발이 더딘 곳이다. 덕분에 하루가 다르게 변해가는 복잡한 도심 속에서 고만고만한 높낮이의 오래된 4-5층짜리 아파트들이 대거 자리를 지켰고, 현재 그 어느 곳보다도 주거 지역 특유의 ‘사람 사는 냄새’가 풍기는 동네이다.
이곳의 오래된 아파트들은 대부분 엘리베이터도 설치되어 있지 않은 소박한 외관을 가지고 있는데, 민셩셔취 거주자들의 생활 및 교육 수준이 평균 이상인만큼 그 내부는 놀랍도록 잘 꾸며놓은 집들도 많다. 또한 주민들이 이용할 수 있는 수영장, 테니스 코트, 야구장 등 다양한 공공시설이 잘 구비되어 있고, 탁아소, 유치원, 공립학교 및 각종 학원들이 생활 반경에 포진해 있어 굉장히 편리하다.
민셩셔취에는 싱그러운 녹음이 가득하다. 무려 20여 개의 크고 작은 공원이 산재해 곳곳에 푸르름을 선사한다. 이 동네 특유의 느긋한 분위기를 따라 발길을 옮기다 보면, 골목골목 100년은 족히 되어 보이는 거대한 나무들이 심심찮게 눈에 뜨이는데, 뿌리와 기둥이 어찌나 크고 튼실한지 서울에서는 보기 드문 아름다운 자태다. (참고로 타이페이는 시정부 주도하에 50년 이상의 고목은 주요하게 관리, 보호하고 있다.) 마치 도심 속 오아시스처럼, 전체의 10분의 1이 녹지로 덮인 민셩셔취는 타이페이 빌딩숲 속에서 보기 드문 특별함을 선사한다.
한가롭고 여유로운 라이프스타일로 알려진 민셩셔취에는 작은 규모의 특색 있는 상점, 갤러리 및 세련된 카페들이 들어서 있다. 이곳의 중심인 ‘푸진지에(富錦街)’는 한국에도 잘 알려진 영화 ‘타이페이 카페 스토리(第36個故事)’가 촬영된 장소이기도 한데, 오래된 아파트 1층을 개조해 만든 세트장은 영화 개봉 후 실제 카페로 운영되어 많은 한국인 관광객들이 발걸음 하기도 했다. 날 좋은 날이면 수없이 걸었던 정감 가는 동네, 골목골목 보석 같은 곳이 숨겨진 민셩셔취에서 개인적으로 가장 좋아하는 세 공간을 소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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琅茶本舖 Wolf Tea
주소: No. 8, Alley 6, Lane 97, Section 4, Minsheng E Rd, Songshan District, Taipei
영업시간: 월요일~토요일 13:00~19:00 (일요일 휴무)
‘홍콩, 그리고 차(茶)’를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한 번쯤 들어봤을 홍콩의 유명 티하우스 ‘티카(Teakha)’의 오너가 가장 아끼는 찻집으로 ‘대만 타이페이의 울프티(Wolf Tea)’를 꼽았다. 몇 년 전 매거진에서 이 인터뷰를 보고 반가운 마음에 주소를 찾고 웬지 기대감이 더 커졌는데, 바로 민셩셔취에 위치해 있었기 때문이다.
울프티는 중심에서 살짝 벗어난 주거지 골목에 위치해 있다. 일반적인 카페처럼 차를 앉아서 마실 수 있는 공간은 없지만, 시간에 구애받지 않고 전문적인 스태프에게 차를 추천받고 천천히 시음해 볼 수 있다. 울프티에서 판매하는 모든 차는 ‘싱글 오리진 티’라 불리는 ‘단일 품종 생산 차’이다. 같은 지역 동일 품종의 차라도 어느 차밭에서, 언제 수확했는지에 따라 맛이 다르기에 울프티에서는 관련 정보를 추적해 모든 차를 고유하게 취급한다. 각 패키지에 새겨진 숫자가 내가 방금 구입한 차가 유일무이하다는 것을 말해준다.
차로 유명한 대만이지만, 막상 어떤 차를 사야할지 감이 오지 않는다면 우선 ‘동방미인(東方美人)’을 추천한다. 대만 신주(新竹) 지역에서 재배되는 동방미인은 우롱차의 일종인데, 발효도가 높아 청아한 우롱차의 맛과 진한 홍차의 향이 함께 느껴진다. 한 가지 재미있는 사실은, 동방미인의 이 특별한 향은 ‘부진자’라는 곤충이 찻잎을 갉아먹으며 잎의 효소와 결합해 만들어진다는 것이다. (‘벌레 먹은 찻잎’이라고도 불린다.) 동방미인은 농약을 사용할 수 없는 데다 까다로운 공정 탓에 생산량이 적어 보통의 우롱차보다 가격대가 높은데, 한국에서는 적어도 두세배 이상에 판매가 되니 지금, 지갑을 활짝 열 시간이다.
울프티의 작은 공간에서 차에 대한 해박한 지식을 가진 나긋한 목소리의 스태프와 함께 천천히 찻잎을 고르고, 차를 내리고, 향을 맡는 총체적 경험을 한다. 30여분 동안 5개 이상의 차를 시음한 후, 결국 내가 가장 좋아하는 ‘동방미인’을 사들고 문을 나섰다. 울프티의 동방미인은 어떻게 다를지, 내일 아침이 기대된다.
微熱山丘 Sunny Hills on the Park
주소: No 1, Alley 4, Lane 36, Section 5, Minsheng E Rd, Songshan District, Taipei
영업시간: 매일 10:00 ~18:00
대만 여행을 처음 온 사람이라면 하나쯤은 꼭 사가는 기념품이 바로 ‘펑리수(鳳梨酥)’, 파인애플케이크이다. 수십 년 전 대만이 세계에서 손꼽히는 파인애플 생산국이었던 시절, 남는 물량을 내수에서 소진하는 방법의 일환으로 로컬 빵집에서 펑리수가 탄생했다고 한다. 대만에는 수십 개의 펑리수 브랜드가 있는데, 그중 써니힐(Sunny Hills)은 단연 독보적이다.
‘Sunny Hills on the Park’라는 이름에서 알 수 있듯, 써니힐의 대표 매장은 민셩공원(民生公園) 앞에 위치하고 있다. 갖가지 나무와 돌로 꾸며진 정원을 지나 안으로 들어가면 직원이 조용하게 자리를 안내해 주는데, 앉으면 바로 원형 나무 쟁반에 써니힐 펑리수 한 개와 우롱차 한 잔이 제공된다. 방문하는 모든 손님들에게 무료로 제공되는 서비스인데 시식 후 꼭 구매를 하지 않아도 되어 부담이 없다.
이곳에서 사용되는 모든 파인애플은 직접 계약을 맺은 대만 중부 지방의 농부들이 수확한 것이다. 써니힐의 조건에 따라 비교적 높은 가격을 받되, 농약은 전혀 사용하지 않고 재배한다고 한다. 또한 보통의 펑리수는 파인애플과 (단가가 비교적 낮은) 동과(冬瓜)의 과육을 섞어 만드는데 반해 써니힐 펑리수는 순수하게 파인애플만 넣는 것으로 유명하다. 100% 파인애플 속은 과육이 살아있고 더 새콤하되, 유통기한이 비교적 짧다. 파인애플파 VS 동과파로 입맛은 제각각이지만 써니힐의 패키징이 워낙 세련된 데다 오가닉한 매력을 담은 에코백까지 함께 제공되니 한국에 있는 친구들 선물로는 이만한 게 없다.
“푸르름을 한껏 만끽하며 공원에서 흘러나오는 노인과 아이들의 행복한 웃음소리에 가만히 귀를 기울여보세요” ‘Sunny Hills on the Park’의 매장 소개 문구에서 민셩셔취의 매력이 고스란히 드러난다.
All Day Roasting Company
주소: No 329, Yanshou St, Songshan District, Taipei
영업시간: 매일 10:00 ~21:00
유난히 카페가 많은 민셩셔취이지만 그 터줏대감은 올해로 10년 차에 접어든 ‘All Day Roasting Company’이다. All Day는 대만 전역에 있는 유명 커피 로스터스와 협업하여 여러 스페셜티 커피를 대중에게 소개하며 이름을 알리기 시작했는데, 현재는 ‘싱글 오리진 커피(Single Origin Coffee)’를 중심으로 보다 선별된 커피를 선보이며 민셩셔취의 카페씬(Scene)을 묵묵히 이끌고 있다.
커피뿐 아니라 이곳에서 판매하는 바게트 샌드위치도 한 끼 식사로 훌륭하다. 카페인 민감도가 매우 낮은 나에게 All Day는 한적한 평일, 여유로운 브런치에 최적화된 공간인데, 기본 블랙커피를 시키면 계속해서 리필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통창으로 들어오는 채광이 워낙 좋아 음식, 인물 모두 인생샷을 건질 수 있어 오픈 초기에는 인스타그래머들에게 큰 인기를 끌었는데, 수년이 지난 현재까지도 한결같은 커피 퀄리티로 승부를 보며 타이페이 힙스터들의 사랑을 받고 있는 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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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이페이에 여행을 온다면 날 좋은 날 꼭 한번 민셩셔취를 걸어보자. 당신이 그리던 가장 보통의, 그래서 여행객에게는 더 특별한 타이페이가 여기에 있다.
글, 사진 @dreamju
인스타그램 @dreamju
유튜브 @타이페이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