느리고 향기롭게
‘다안취(大安區)’는 타이페이에서 교육, 상업, 주거 수준이 가장 높게 형성된 지역이다. 매년 백화점 매출 탑을 찍는 소고(SOGO) 백화점이 번잡한 중샤오동루(忠孝東路)에 위치해 있고, 울창한 나무가 우거진 둔화난루(敦化南路)와 런아이루(仁愛路)에는 최고급 아파트들이 즐비하다. 평단가가 손꼽히게 비싼 지역인 만큼 이름난 사립, 공립학교들이 위치해 있으며 대만 최고의 대학교인 국립대만대학교(國立台灣大學) 역시 다안취에 자리한다.
개인적으로는 대만 이주 후 1년여 동안 매일같이 중국어를 배우러 다녔던 사범대학교(師範大學)와 방과 후 줄기차게 걸었던 학교 뒤 용캉지에(永康街)가 있어 특히 추억이 많은 곳이기도 하다. 우리에게도 잘 알려진 용캉지에에는 뉴욕 타임스 선정 ‘세계 10대 레스토랑’에 선정된 딘타이펑의 본점과 한국인이 좋아하는 망고빙수, 펑리수, 누가크래커 등 각종 디저트샵이 자리해 있어 거리를 걷다 보면 이곳이 한국인지, 대만인지 분간이 가지 않을 정도다.(타지에 사는 한국인으로서 코로나 시절엔 이 분위기가 꽤나 그립기도 했었다!)
전반적으로 생활 수준이 높은 다안취에는 그 어느 행정구보다 많은 레스토랑, 카페, 상점들이 몰려있다. 넘쳐나는 리스트에 어디를 가야 할지 감이 오지 않는 여행자들을 위해 대만살이 8년 차, 아껴두었던 폴더를 열었다. 가이드북이나 블로그에서는 쉽게 볼 수 없는 곳들로 구성한 ‘다안취에서의 하루’, 지금부터 함께 해보자.
Daan Forest Park l 오전 10:00
주소: No. 1, Section 2, Xinsheng S Rd, Da’an District, Taipei City
숙소에서 느지막이 일어나 낯선 도시를 탐험할 시간. 간단히 채비를 하고 다안삼림공원(大安森林公園)으로 발걸음을 옮겨본다. 지하철을 탄다면 다안공원역에서 하차, 택시를 타더라도 타이페이는 서울 면적의 절반이 채 안되기에 어디서든 큰 부담이 없다.
타이페이의 센트럴파크라고 불리는 다안공원은 도심의 허파라고 할 수 있다. 공원을 걷다 보면 각양각색의 타이페이 로컬들을 마주할 수 있는데, 각종 야외 활동을 즐기는 사람들, 놀이터에서 땀을 뻘뻘 흘리며 신나게 뛰어노는 아이들, 잔디 위에 아예 텐트를 치고 느긋하게 한나절을 보내는 가족들 등, 사람 구경은 역시 이국에서 더 재미있는 법이다. 다안취의 중심, 다안공원을 천천히 거닐며 이 도시의 좋은 기운을 흠뻑 받아보자.
Le Blanc l 오전 11:30
주소: No. 183, Section 1, Da'an Rd, Da’an District, Taipei City
영업시간: 목요일~화요일 11:30 AM~2:30 PM, 5:30 PM~10 PM (수요일 휴무)
무더운 타이페이 날씨 속 오전 산책을 성공적으로 끝마쳤다면 단백질 섭취를 해 줄 시간이다. 오늘의 점심 장소, 로컬들 사이에서 입소문 꽤나 탄 스테이크집 ‘Le Blanc’은 푸른색 차양을 드리운 새하얀 부띠크 호텔, ’Swiio Hotel Daan’ 1층에 위치한다.
오픈한 지 어느덧 8년이 다 되어가지만 여전히 타이페이에서 가장 ‘힙한’ 스테이크하우스인 Le Blanc은 방문 몇 주 전 예약이 필수일 정도로 인기가 좋다. 이곳에서는 (보기 드물게) 영문과 중문이 함께 적힌 메뉴판이 테이블에 놓이는데 한눈에 보아도 매우 단순하다. 그날의 기분에 따라 스테이크와 랍스터 중 한 가지를 정하고 스타터로 샐러드와 수프 중 하나를 골라주면 된다.
Le Blanc의 모토는 ‘심플함’이다. 메뉴에서 볼 수 있듯 손님들은 머리를 굴려가며 복잡한 메뉴 선정을 하지 않아도 된다. 전통적인 스테이크 하우스처럼 질 좋은 스테이크를 제공하되, 좀 더 힘을 빼고 합리적인 가격에 타이페이 로컬의 근사한 한 끼를 책임진다. 2015년 오픈 후 금년 5월까지 Le Blanc의 스테이크 세트 가격은 NT$1,000원, 한화로 4만 원이었다. (대만 역시) 코로나 후 급등한 물가에 현재는 NT$1,500원(한화 6만 원)으로 가격이 상향 조정되긴 했지만 이 또한 비슷한 퀄리티의 다른 스테이크 하우스와 비교했을 때 아직은 아름다운 가격이라고 할 수 있다.
주먹만 한 크기의 쫀득 따끈한 빵, 샐러드(혹은 수프), 미디엄 레어로 딱 알맞게 구워져 나오는 속살 촉촉한 스테이크와 특제 화이트소스, 게다가 Le Blanc에서는 막 튀겨낸 감자튀김이 무제한으로 제공된다. 맛있는 음식과 함께 항상 기분 좋은 스태프들의 젊은 에너지도 타이페이 로컬들이 여전히 Le Blanc을 사랑하는 이유 중 하나이다. 여담으로 비슷한 콘셉트의 스테이크 하우스로는 가까운 홍콩의 ‘La Vache!’, 그리고 실제 Le Blanc이 영감을 받았다는 프랑스 파리의 ‘L’Entrecôte’가 있다.
Liquide Ambré 琥泊 ㅣ 오후 2시
주소: 2F. No.15, Lane 72, Leli Rd, Da’an District, Taipei City
영업시간: 수요일~일요일 12 PM~7 PM (월, 화요일 휴무)
양질의 음식으로 든든히 배를 채웠다면 소화도 시킬 겸 조용한 티샵으로 자리를 옮겨보자. 다안취 한적한 주택가 2층에 자리한 ‘Liquid Ambré’는 디자인 스튜디오의 오너이자 홍콩, 한국 편집샵 등에서 찾아볼 수 있는 대만 유명 문구 브랜드 ‘Tools to live by’를 만든 여성 오너가 오픈한 현대적 티샵이다.
마침 같은 건물 1층에 위치한 빈티지한 매력이 물씬 풍기는 그녀의 문구 브랜드(Tools to live by)를 천천히 구경한 후 옆의 가파른 돌계단을 올라가면 단 6석의 프라이빗한 살롱이 모습을 드러낸다. 내외국의 젊은 층에게 더 친숙하게 차 문화를 전파하기 위해 의도적으로 30대의 젊은 티 마스터(Tea master)를 고용했다는 이곳은 오랜 시간 운영해 온 문구 브랜드의 영향인지 소품, 패키징 등 디테일이 참 아기자기하게 예쁘다.
현재 타이페이에서 가장 핫한 디자인 스튜디오를 운영하는 오너인 만큼 인테리어도 특색 있는데, 커튼이 드리운 은은한 조명 아래 앉아있으면 마치 어디 ‘비밀스러운 아지트’에 놀러 온 것만 같다. 공간 안쪽으로는 돌계단을 활용해 Liquid Ambré에서 사용하는 다기를 전시, 판매하고 있는데 단아한 모양새가 마음에 쏙 들어 물어보니 대부분은 오너가 중국 본토를 여행하며 직접 골라 들여온 것이라고 한다.
평소 좋아하는 동방미인(東方美人) 차를 고르고 기다리니 티 마스터가 바로 앞에서 찻잎을 고르고 차를 우려내는 과정을 천천히 보여준다. 그녀의 나지막한 목소리와 함께 사각사각 들리는 마른 찻잎의 소리, 쪼르르 차를 우리는 소리가 들뜬 마음을 차분하게 만든다. 정성스레 내린 차 한잔을 느긋하게 마시며 여행지에서의 고단함도 잠시 잊어버리자.
Delicate Antique ㅣ 오후 4시
주소: No. 346, Jiaxing St, Da’an District, Taipei City
영업시간: 화요일~일요일 12 PM~8 PM (월요일 휴무)
어느덧 오후 4시가 되었다. 여행지에서 보다 특별한 물건을 만나고 싶은 취향 있는 여행자들을 위한 앤티크 샵을 하나 소개한다.
거의 버려진 듯한 공간을 개조하여 멋지게 탈바꿈시킨 ‘Delicate Antique’의 오너는 젊은 남성이다. 어릴 때부터 ‘물건’에 관심이 많아 또래 남자아이들이 용돈을 모아 만화책을 사서 볼 때 본인은 야금야금 무언가를 계속 사모았다고 하는 이 오너는 결국 27살이라는 어린 나이에 앤티크 샵을 열었다.
오픈 초창기에는 주로 일본에서 앤티크를 수입해 왔었다고 한다. 아무래도 지리적으로 가깝고 문화적으로도 대만사람에게 친숙한 나라이기 때문이다. 10년 전인 그때만 해도 대만으로의 앤티크 수입은 정보가 전무하여 시간이 날 떄마다 일본으로 날아가 로컬의 샵오너들을 하나하나 만나며 공들여 관계를 쌓았다고 한다.
시간이 지나면서 그의 관심은 유럽, 특히 프랑스로 옮겨갔고 지금은 대부분의 앤티크들이 프랑스에서 건너온 것들이다. 특히 그의 샵에 있는 앤티크들은 클래식한 원목 가구 중심이라 실생활에서 보다 유용하게 쓰이는 작품들이 많다는 것이 특징이다.
Taihu Gyoza Bar 台虎居餃屋 ㅣ 오후 7시
주소: No. 155, Jinhua St, Da’an District, Taipei City
영업시간: (월~목)4 PM~11:30 PM, (금~토)11 AM~12:30 AM (일)11 AM~11:30 PM
간단한 저녁 및 시원한 생맥주를 들이키며 하루의 마무리를 할 수 있는 곳이다. 미국에서 유년시절을 보낸 다섯 명의 공동 창립자(Co-founder)가 만든 로컬 맥주 브랜드 ‘타이후(臺虎)’는 대만의 차(Tea)와 열대 과일을 중심으로 한 무려 100여 가지의 독창적인 레시피를 보유하고 있는데, 방대한 리스트 속 그 어떤 걸 시켜도 실패가 없다. 최근 따끈하게 오픈한 이 지점은 ‘스탠딩바 만두집’ 콘셉트로 만두를 비롯한 맥주와 어울리는 간단한 안줏거리를 판매하는데, 꼭 이곳이 아니더라도 대만 여행 시 ‘타이후 생맥주’ 혹은 ‘타이후 IPA’를 발견한다면 꼭 한번 시켜 마셔보기를 바란다.
글, 사진 ⓒ dreamju