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 결심 그리고 계기
불 꺼진 사무실, 주현의 컴퓨터만 불빛을 내고 있었다. 바깥은 이미 어둠이 내린 후였다. 모니터에는 ‘제거 대상자 30명’이라는 명단이 떠 있었다. 형광빛 글자가 눈을 찔러오는 것처럼 아파왔다. 충혈되어 뻑뻑해진 눈을 감고 주현은 의자에 기대었다. 그리고 문득, 몇 년 전 공시생 시절 사람들이 했던 말이 귓가를 스쳤다.
“요새 안정적인 게 최고지.”
“우리 같은 사람들은 많은 걸 바라면 안 돼. 그냥 제거될 걱정 없이 사는 거, 그게 제일이지.”
주현은 그저 흘려듣는 척했지만, 말들은 이상하게도 마음속 깊이 파고들어 왔다. 잊을 수 없을 정도로 깊이. 사람들은 안정성 때문에 그녀가 이 길을 택했다고 믿었지만, 진짜 이유는 따로 있었다.
'가능성.'
사람이 가진 가능성을 보고 싶었다. 시스템에 찍힌 숫자와 데이터가 아닌, 살아 있는 그들의 얼굴에서 직접 확인하고 싶었다. 주현이 생각하는 세상은 그런 곳이어야 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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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등학교 3학년. 늦겨울이었다. 늦은 추위가 온 세상은 얼어붙어있었다. 기후위기로 더욱더 혹독한 겨울이었다. 한기가 창문에 맺혀 차가운 기운이 틈으로 새어 나오고 있었다. 학생들은 담요를 덮은 채로 히터에서 나오는 바람을 맞으며 수업을 들었다. 터치스크린 칠판에는 선명하게 한 문장이 떠 있었다.
“쓸모없는 사람은 제거해야 한다.”
선생님은 감정 없는 목소리로 반복적으로 말했다.
“알겠지? 일을 하지 않고 세금만 축 내는 사람들은 사회의 기생충이다. 우리 모두는 노동으로 존재를 증명해야만 한다.”
학생들은 고개를 끄덕였다.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어온 말이었다. 하지만 그 순간, 주현의 손이 천천히 올라갔다.
“선생님. 생명은 소중하다고 배웠는데… 왜 제거해야 하는 건가요?”
순간 교실이 얼어붙었다. 선생님의 차가운 시선이 주현을 찔렀다.
“이주현. 밖으로 나와.”
싸늘한 목소리. 복도는 어둑했고, 창밖으로 들어온 겨울의 차가운 볕만이 서늘하게 빛났다. 선생님은 그 아래에 주현을 세웠다.
“생명은 소중해. 하지만 다른 사람의 생명을 갉아먹는 존재들은 다르지. 그들은 우리를 숙주 삼는 기생충일 뿐이야. 없어져야 해.”
단호한 말이었지만, 주현은 이상하게 와닿지 않았다. 그들이 정말 기생충일까? 환경이 달랐다면, 그들도 다른 삶을 살았을지도 모른다. 주현의 머릿속에 가장 친한 친구, 민아의 얼굴이 떠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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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등학교 2학년 같은 반이던 민아는 주현의 절친이었다. 언제나 꿈을 얘기하던 아이.
“난 식량 과학자가 될 거야. 그러면 모두가 걱정 없이 살 수 있잖아.”
그렇게 빛이 나게 웃던 민아는, 며칠 전부터 학교에 나오지 않았다. 주현은 민아에게 무슨 일 있는지 궁금했지만, 연락이 닿지 않아 발만 동동 구르고 있었다. 그러다 문득 소식이 들려왔다.
“민아네 아버지가 교통사고로 돌아가셨대. 어머니도 크게 다쳐서 거동이 힘들다더라.”
주현은 전화받지 않은 민아에게 다시 한번 전화를 걸었지만, 받지 않았다. 급히 주소지로도 찾아가 봤지만 그곳에도 민아는 없었다. 사라진 것처럼 흔적도 없이.
발길을 돌리고 우연히 어느 날, 교무실 앞에서 선생님들의 대화가 들렸다.
“민아네 집, 수급자 됐다던데?”
“일할 사람이 없으니 곧 제거 대상이지. 애 혼자서는 버티기 힘들 거야.”
순간 심장이 내려앉았다. 주현은 뭐에 홀린 듯 그곳으로 향했다.
“선생님, 민아 집 주소 아세요? 연락이 안 돼서요.”
선생님은 피곤한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
“잊어라. 민아는 말이다......"
선생님은 말을 이어가기 힘이 들었는지 뜸을 들였다.
"네?"
"그게."
"곧… 하..... 곧 제거될 거다.”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대신 선생님은 주현을 피하듯 사라졌다. 믿을 수 없었다. 떨리는 손으로 다시 전화를 걸었다. 반복되는 연결음. 끊어지려는 순간. 딸깍.
“민아야!”
주현이가 온 마음을 담아 말했다
“주현아…”
낮고 떨린 목소리였다. 낯설 만큼 처연했다.
“괜찮아? 왜 연락 안 받았어.”
“고마웠어. 네가 내 친구여서.”
그 한마디에 심장이 미친 듯이 뛰었다. 온몸에 털이 바짝 서는 것만 같았다. 등골이 서늘해진 느낌.
“그게 무슨 소리야. 무슨 말이야, 민아야.”
잠시 정적. 민아의 숨소리가 들렸다.
“나 없어져도… 네가 기억해 줄 거지?”
“민아야, 어디야? 내가 갈게. 제발.”
“주현아. 나 정말 열심히 해보려 했는데… 한 번 무너진 상황은, 변하지 않더라.”
목소리가 끊어질 듯 떨렸다.
"그게 무슨 말이야."
“잘 지내.”
뚝.
신호음만이 들려왔다.
주현은 핸드폰을 떨어뜨린 채 복도 바닥에 주저앉아 울부짖었다.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그 무력감이 온몸을 짓눌렀다. 세상은 아무 일도 없던 것처럼 돌아갔다. 하지만 주현은 잊을 수 없었다. 민아의 마지막 목소리, 마지막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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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표가 생겼다.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던 주현은 그날 이후로 달라졌다. 열심히 공부했고, 대학도 사회복지학과에 들어갔다. 평범한 일상 속에서도 그녀는 한 가지만 생각했다.
그리고 끝내 사회복지 선별관이 되었다. 시험공부가 고될 때마다 민아가 떠올랐다. 웃던 얼굴, 과자를 먹으며 장난치던 모습, 문제를 쉽게 풀어주던 손길. 모든 순간이 주현을 붙잡아 무너지지 않게 했다.
사람들이 공무원의 안정적인 면만 볼 때도, 주현은 일부러 설명하지 않았다. 지금은 그런 것보다 더 중요한 것 이 있었으니까.
“그 사람의 가능성을 볼 거야. 민아 같은 사람이 다시는 생기지 않게.”
첫 출근날, 주현은 그렇게 다짐했다. 사람을 믿고, 기다리고, 판단하는 사회복지 공무원. 가능성이 보인다면, 끝까지 버텨주는 사람이 되겠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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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을 감았다가 뜬 주현은 다시 모니터를 바라보았다.
“김하율 씨…”
그 이름을 조용히 불렀다. 시스템 속 기록이 전부는 아니었다. 환경이 문제일 뿐, 사람은 변할 수 있었다. 민아가 그랬듯, 누구든 기회가 필요했다.
“억울한 사람이 없도록. 그게 내가 해야 할 일이니까.”
주현은 모니터를 끄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불이 꺼진 건물 안으로 가로등 불빛이 은은하게 들어왔다. 그늘진 얼굴 위로 굳은 의지가 흘러나왔다. 그리고 그녀는 속으로, 아주 조용히, 민아의 이름을 다시 한번 불러보았다.
'민아야.'
"잘 지내."
그에 답하듯 마지막 통화 속 그 처연하고 쓸쓸했던 목소리가 귓가에 머물렀다.
"나는 언제쯤 너에게 답을 할 수 있을까."
입술을 깨문 주현은 한숨을 깊게 내쉬었다. 민아에게 떳떳하게 답 할 수 있는 날이 올 수 있을 거라. 주현은 그렇게 믿었다.
"민아야. 그래도 해볼게."
씁쓸한 웃음을 짓고는 주현은 걸음을 옮겼다. 어둠 속으로 천천히 그녀는 사라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