꿈
"왜. 그랬어?"
익숙한 목소리. 귓가에서 울리는 이상한 느낌에 주현은 고개를 들었다. 그리운 촉감, 딱딱하면서도 차가운 촉감이 손끝을 스쳤다. 학교 책상이었다. 엎드려 자다 깬 주현은 주변을 살폈다. 차가운 공기가 교실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손끝에서부터 느껴지는 한기에 몸이 떨렸다. 눈을 뜬 주현은 자신의 앞에 뒤돌아 앉아있는 민아를 보았다.
"민아야."
그리운 얼굴. 그때 그 모습 그대로인 민아였다. 그때와 달리 사나운 눈초리로 바라보고 있는 것만 빼면. 웃음이 아름답던 아이의 얼굴에는 그 흔적을 찾을 수 없었다. 처음 보는 차가운 모습에 주현은 그대로 얼어붙었다.
"너.... 잘 지낸 거지?"
반가움에 주현의 눈에서 눈물이 왈칵 쏟아져 나왔다. 하소연하고 싶은 것들이 한가득이었다. 매번 답 없는 물음을 허공에 던지기만 했는데, 이제는 답을 들을 수 있었다.
"너. 왜 그랬어."
하지만 민아는 쉽사리 답해주지 않았다. 다른 물음을 던졌다.
"민아야. 보고 싶었어. 나 정말 하고 싶은 얘기가 많아."
"정신 차려."
매정하게 민아가 주현을 노려보았다. 애처로운 주현의 손길을 뿌리치고 강하게 말했다. 아무리 붙잡으려 해도 민아는 받아주지 않았다.
"민아야 나 어떻게 해야 할까. 나는 정말 열심히 노력했거든. 내가 잘하고 있는 걸까."
눈물이 계속해서 흘러나왔다. 민아는 아무런 동요 없이 그런 주현을 말없이 바라보았다.
"나 때문에 시작한 일이잖아?"
민아의 말에 주현의 가슴이 턱 막혀왔다. 그의 표정 그의 눈동자 숨소리 말 모든 게 주현을 아프게 찔렀다.
"처음 시작할 때 항상 했던 말."
"그 사람의 가능성을 본다."
"그리고?"
"억울한 사람이 없도록."
또렷하게 말하려 해지만 목이 메어 목소리는 점점 뭉개졌다. 눈물로 흐려진 주현의 눈가를 민아가 손을 들어 닦아 주었다.
"잘 아네."
주현은 놀라 눈을 동그랗게 뜨고 민아를 바라보았다. 흐렸던 민아의 얼굴이 점점 선명해졌다. 어느새 자리에서 교복주머니에 손을 넣고 서있었다.
"너. 이주현."
"응."
목 메인 목소리로 주현이 답했다. 민아는 잠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고요하게 교실의 공기가 흘렀다. 매섭고 차가웠던 교실의 공기가 한순간에 바뀌었다. 따스한 햇살이 창문을 넘어 두 사람사이에 은은하게 비췄다. 시리던 손끝에 온기가 닿는 것만 같았다. 주현은 말없이 온기가 도는 손가락을 바라보았다. 포근하고도 따사로웠다.
"나는."
민아가 입을 열었다. 주현은 고개를 들어 민아를 보았다. 햇살에 반짝거리는 눈동자, 미소를 머금은 그 입술. 민아는 애정 어린 빛나는 눈망울로 주현을 바라보았다. 햇살을 받아 한층 부드러워진 얼굴로.
"나는 주현아. 너야. 처음부터 끝까지. 네가 사회복지공무원이 되기로 한 순간까지도. 너와 함께 있었어."
주현은 민아를 바라만 볼 수밖에 없었다.
"무슨 일이 있어도, 쉽게 포기하지 마. 언젠가 도움이 될 수 있을 거야."
"그러니까. 네가 선택한 길. 끝까지 걸어."
민아의 시선이 느껴졌다. 주현의 답을 기다리고 있는 것처럼 그곳에 머물러 있었다.
"나는....."
주현은 머뭇거리다 민아를 보았다. 강인하면서도 단단한 그 눈망울. 어디선가 본 적 있는 그 기억 속에 눈망울. 과거와 현재가 겹쳐 있는 그 탐이 나는 그 시선이었다.
"가능성."
"가능성을 보기로 했으니까. 쉽게 무너지지 마."
민아의 말에 주현은 자리에서 일어나 마주 보고 섰다. 한참 자라 어른이 되어버린 주현과 그때 그 시절 작은 소녀인 민아가 그곳에 있었다.
"나...... 할 수 있겠지? 민아야."
주현이 조심스럽게 입을 열자 민아는 피식 웃으며 그저 바라보았다. 그 미소가 어떤 의미인지 주현을 알 수 있었다. 매번 마음이 통했을 때 지었던 그 개구쟁이 같던 표정이었다. 아무 말도 하지 않아도, 두 사람은 통하고 있었다. 민아는 고개를 천천히 끄덕였다.
"네가 선택한 길. 누구도 아닌 네가 책임지고 걸어야 할 길이니까."
민아의 말에 주현의 볼을 타고 눈물이 흘러내렸다. 민아의 모습이 또다시 눈물에 얼룩져 보였다.
"응... 맞아. 내가 가야 할 길."
민아는 조심스럽게 손을 들어, 주현의 흐려진 눈가를 닦아주었다. 민아의 손길에 주현은 이상하게도 계속해서 눈물이 흘렀다.
"흔들리지 마."
주현이 힘주어 고개를 끄덕였다. 다정하면서도 담담한 그 말이 주현의 마음속에 깊이 파고들었다. 흔들리고 있었던 그녀의 마음이 한순간에 단단해졌다. 마음속을 오랜 시간 흔들었던 불안과 의문들이 한순간에 거품처럼 사라졌다.
"나. 지켜보고 있을 테니까. 잘할 수 있지?"
민아가 싱긋 웃으며, 손을 내밀었다. 그때 그 모습처럼 발랄하고 다정했다.
"그럼. 당연하지."
주현이 민아의 손을 조심스럽게 잡았다. 그녀의 손을 잡는 순간 민아는 온데간데없이 사라져 버렸다. 봄날의 햇살처럼 온기가 도는 교실뿐이었다. 주현은 자리에서 일어나 주변을 살폈다. 그곳에 주현 혼자뿐이었다.
"...."
주현은 민아의 온기가 남아있는 손을 들어 바라보았다. 진짜 같은 그 촉감. 하지만 남아있지 않는 그 감각을 하염없이 바라보았다. 민아가 떠난 자리에는 아무도 없었지만, 민아의 눈빛과 목소리는 강하게 남아있는 것만 같았다.
"민아."
주현은 잠시 숨을 고르고 주변을 살폈다. 눈물이 흐르고 있었지만, 그 눈물은 아프지도 슬프지도 않았다. 이상
하게 안도가 되는 눈물. 더 강해지는 것처럼. 주현의 몸을 단단하게 만들었다.
"내가 내린 결정이니까."
주현은 혼자 중얼거렸다.
"그 오랜 시간 동안 바라오고 걸어온 길이니까. 가능성을 보는 거야."
주현의 목소리는 낮았지만, 그 단단한 감정은 그 안에 깊이 자리 잡고 있었다.
"끝까지 갈 거야 흔들리지 않아 반드시."
그 말과 함께 주현은 벌떡 잠에서 깼다. 자신도 모르게 입 밖으로 잠꼬대하듯 다짐을 하며 일어났다. 늦잠을 잔 것처럼 개운한 아침이었다. 부드러운 이불 따뜻한 온기가 느껴지는 침대, 커튼 사이로 조용하게 스며들어 들어온 햇살. 밖에서 평온하게 지저귀는 새소리마저 평온했다.
"꿈....이었구나."
자면서 울었는지 주현의 눈가는 촉촉했다. 뺨을 따라 흐른 눈물을 닦았다. 주현은 멍하니 창밖을 바라보다가 손을 들었다.
"아......"
손끝에는 여전히 민아의 흔적이 남아있는 것만 같았다. 귓가에 그 말, 목소리 공기가 여전히 남아있었다. 꿈이었지만 이상하게 선명해서 진짜 같았다.
"그 결심들이. 그 말들이."
이상하게 깊은 여운이 남은 그 꿈이 자꾸만 어른 거렸다. 하지만 그 순간도 잠시 주현은 마른 얼굴을 쓸어내리며 침대에서 일어났다.
"진짜니까. 그게 내 진심이니까. 절대 흔들리지 않을 거야. 반드시."
주현은 다시 태어난 것처럼 강하게 다짐하고 있었다. 며칠간의 처음 가졌던 꿀 같았던 휴식 끝에 다시 시작되는 일상으로 나아갈 준비를 했다. 흔들렸던 마음속 신념은 이제 다시금 단단하게 뿌리를 내리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