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이라면 일생에 많이 겪어 봐야 한, 두 번 겪을 뼈가 부러지는 고통을 나는 어릴 적부터 매우 자주 경험했다. 내 의지와는 상관없이 더 많이 살아가야 하는 앞으로도 경험할 수도 있다. 이건 내가 평생을 안고 살아야 하는 병의 특징이었다.
엄마의 기억은 더 오래전 일이 있었지만, 내가 기억하는 처음 뼈가 부러진 사고는 언니랑 놀면서 책상 의자에서 떨어졌을 때였다. 그날의 아픔은 솔직히 기억은 나지 않는다. 사람이 참 바보 같다 생각이 들었던 부분은 견딜 수 없이 아프다가도 시간이 지나면 아픔에 무뎌져 아픈 것도 잊고 언제 그렇게 아팠을 때가 있었나 하는 생각도 들만큼 아득하게 고통은 시간 저편으로 사라진다.
처음으로 했던 깁스는 소위 통 깁스라고 부르던 초록색으로 꽁꽁 굳어있는 깁스였다. 팔을 감싸고 있던 짙은 녹색의 깁스는 세상에서 가장 무거운 팔을 만들어주었다. 보통 깁스를 하고 나면 건강한 사람은 4주, 즉 한 달 정도면 뼈가 붙는다고 한다. 하지만 내 경우는 뼈가 잘 붙지 않았다. 적어도 두 달은 견뎌야 뼈가 붙어 갑갑하고 무거운 깁스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학교에서 오른쪽 정강이를 다친 이후로 나는 어린 시절 대부분의 시간 동안 깁스를 하고 있었다. 다쳤던 다리에 힘을 덜 주기 위해 다른 쪽 다리에 힘을 주면 어이없게도 반대쪽 다리마저 뼈가 부러져버렸다. 그렇게 수차례 양쪽 허벅지 뼈와 오른쪽 정강이뼈가 번갈아가면서 부러졌고 어떤 때는 통 깁스, 어떤 때는 반 깁스가 다리를 감싸고 있으면서 앉아있지도 못해 병원에 입원해 몇 달을 누워서만 생활했다. 그 후로도 입원과 퇴원은 반복되는 일상을 보냈다. 엄마가 대소변을 받아주는 나날을 보냈을 때가 한참 뛰어놀 초등학생 무렵, 나의 어린 시절은 그렇게 사라지고 있었다. 매번 뼈가 부러지는 고통을 반복해서 느끼는 동안 점점 더 몸은 망가졌고, 그사이 뼈를 깎고 붙이는 대수술을 여러 번 하고 나니 불과 몇 년 사이 나는 완전히 걸을 수 없는 몸이 되어 있었다.
자주 겪으면 익숙해지기 마련이다.
그럼에도 익숙해지지 않던 건 바로 통 깁스에서 벗어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었다.
내 또래 아이들이 이 시기 가장 무서운 병원으로 뽑는 곳이 있다면 치과일 것이다. 위협적으로 들리는 윙윙윙 거리는 기계소리와 특유의 병원 냄새가 가득한 공간. 그곳은 어른, 아이 할 것 없이 공포가 찾아오는 공간이었다. 나는 아이들이 치과를 무서워했던 시기에 치과에서 경험하는 무서운 감각을 정형외과에서 먼저 접했다. 정형외과는 두꺼운 통 깁스를 자르기 위해서 둥근 미니 전기톱을 사용했다. 깁스를 양쪽을 반반 자른 후 뚜껑을 열 듯 들어 올린다. 깁스를 풀었다고 말하기보단 제거한다는 표현이 맞았다. 위협적인 소리를 내며 빠르게 돌아가는 둥근 미니 톱이 깁스 사이로 들어와 살을 찌르듯 움직였다. 쇠가 전하는 진동이 늘 고스란히 피부 위로 느껴졌다.
내가 너무 겁에 질렸던지 어느 날은 깁스를 풀어주시던 엄 선생님이 말씀하셨다.
안에 솜을 왜 감았는지 알아? 칼날이 닿아도 다치지 말라고 감은 거야. 거기에 닿으면 칼날이 안 들어요. 전혀 무서워할 필요 없어요.
상냥한 말은 커다랗게 안심이 되어 돌아왔지만 그래도 무서운 건 똑같았다. 당시에는 지금처럼 가볍고 얇은 깁스 대신 투박하게 그지없는 깁스가 유일했다. 보통 깁스의 단계는 두 단계였다. 하얀 솜털 붕대를 감고 위에 딱딱하게 굳는 석고 붕대를 감는다. 다리가 부러진 상태로 갔을 때 그 긴 과정 동안 뼈가 부러진 다리가 너무 아파서 늘 울면서 처치를 받아야 했다. 붕대를 감기 전 상태를 살피기 위해 뼈가 부러진 부위를 여러 각도로 촬영해야 되는 X-ray 촬영이 더 고통스럽긴 했다. 그러한 과정에 비해 깁스를 제거하는 과정은 안전하고, 아프지도 않았지만 그것들과는 다른 공포심이 일어나는 순간이었다.
깁스를 해주시는 엄 선생님은 시골로 내려와 다친 이후로 다니던 정형외과 병원의 의사 선생님이었다. 그분은 주로 내가 울면서 병원에 실려 가면 항상 농담으로 긴장을 풀어주며 깁스를 해주시거나 다 나으면 깁스를 제거해주시는 걸 담당하셨다. 내가 가장 아팠을 때 주로 울고 있는 나만 보셨던 엄 선생님은 내가 성인이 되어 검진을 받으러 병원을 다시 찾았을 때도 웃으며 오늘은 안 울고 있냐고 물어보셨다. 그때는 나도 부끄러운 마음에 멋쩍은 웃음을 보였었다.
나무는 살아갈수록 나이테가 한 개씩, 한 개씩 늘어나는 거처럼 나도 다치고 나을 때마다 달라지는 게 있었다. 다쳤던 부분의 뼈가 솟아오르고, 늘 욱신거리는 통증과 함께 언제 변했는지 모를 정도로 곧게 뻗어야 할 뼈는 온전한 모양을 잃어버린 채 울퉁불퉁 솟아 오른 상태로 휘어지듯 뼈가 꺾여있다. 이게 내 병이 가지고 있는 또 다른 특징이었다.
골다공증을 동반하여 뼈가 쉽게 부러진다. 또한 부러진 자리는 원래의 뼈 형태로 나아 굳는 게 아닌 뼈가 변형되어 솟아올랐다. 아픔이 사라진 자리에는 흔적이 남았다. 솟아오른 부위는 점점 뼈가 실 가닥처럼 가늘어져 더 쉽게 부러지고 잘 낫지 않게 되었다. 원래의 일자로 뻗어 있어야 할 정강이뼈의 모양은 온전히 잃었다. 내 오른쪽 다리는 ㄱ자처럼 꺾인 채 늘 실금이 가있는 상태로 살아야 했다. 당시 내 다리를 볼 때면 낙타의 등을 연상시켰다. 훗날 여러 차례의 수술로 다리의 모양을 바로 잡을 수 있었지만 대신 반대쪽 다리와 10cm가 넘는 차이가 생겨버렸다.
생각해보면 오른쪽 다리의 모습은 점점 변했을 텐데 내 기억 속에서는 시간의 흐름대로 변화가 된 게 아닌 어느 순간 ㄱ자 모양이 되어 버린 다리의 모습만 기억이 난다. 내 기억은 단편적으로 혼자 걸어 다녔던 아주 어린 시절이라든가 가장 아팠을 때가 잘 생각이 나지 않는다. 마치 기억을 지워버린 거처럼 아주 드물게 순간순간만이 기억에 남아 있을 뿐. 엄마는 잦은 수술로 인한 마취 때문에 그런다고 하는데 잘 모르겠다. 그냥 그 순간들이 이제는 돌이킬 수 없는 아득한 시간이기에 스스로 기억을 해내지 않은 거 같기도 하다. 어떤 사람은 모든 경험은 인생에 도움이 되고 경험이 쌓이면 또 다른 인생이 펼쳐진다고 했다.
비록 상처는 나아 통증도 사라지지만 내 몸에는 고스란히 그 시간이 쌓여가고 있다. 나의 경험은 특별하진 않지만 평범하다면 겪지 못할 아픔과 변화를 받아들이는 시간인 거 같다.
어떤 경험이든 헛된 경험은 없듯 나의 아픔이 앞으로 내 인생에 어떤 도움을 줄지는 아직 모르는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