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끝은 엄마가 있었다.
어릴 적 자전거를 타고 혼자 노는 걸 좋아했다.
우리는 줄곧 서울에서 살았기에 갓 이사를 왔던 시기에는 함께 놀 수 있는 친구는 오직 언니와 나뿐이었다.
언니가 학교에 들어가 친구가 생길 무렵부터는 혼자 노는 시간도 많아졌다. 혼자 배운 자전거를 친구 삼아 온종일 동네를 타고 다니며 모두가 하교한 학교 운동장을 배회하기도 했다. 그때나 지금이나 혼자인 게 딱히 심심하거나 어색하진 않았다. 언니의 생애 첫 운동회가 있기 일주일 전에도 나는 자전거를 친구 삼아 온 동네를 돌아다녔다. 대부분의 시골 동네 골목처럼 우리 집으로 향하는 골목길은 오르락내리락하는 경사와 좁고 확 꺾이는 구간도 꽤 많았다.
나는 자전거를 타고 그런 길목을 지날 때면
그때의 내 나이에 경험해본 가장 빠른 속도감과 스릴감에 흠뻑 빠져있었던 거 같다.
그날도 집으로 가는 뒷골목 길이던 문제의 구간을 지나가고 있었다.
유독 꺾이는 정도가 심했던 곳의 담벼락은 집주인 할머니의 고약한 성향을 엿볼 수 있는 담벼락을 가지고 있었다. 그 시대를 대표하는 담이었는지 모르겠지만 시멘트가 덕지덕지 울퉁불퉁하게 발라진 상태로 굳어 불규칙하게 솟아 오른 시멘트가 꽤나 위험한 담벼락이었다.
평소처럼 빠르게 페달을 밟았던 나는 그날따라 속도를 이기지 못하고 울퉁불퉁한 벽면에 그대로 들이박혔다. 경사로였던 그곳에서 여전히 줄지 않는 속도와 벽에 닿아 돌릴 수 없는 자전거 핸들 때문에 나는 한쪽 얼굴과 팔, 손을 고스란히 긁히며 내려올 수밖에 없었다. 손이며 얼굴이며 피범벅이 되어 엉엉 울면서도 여전히 자전거 위에서 경사로 끝에 위치한 집으로 가기 위한 페달을 밟았다.
경사로 끝엔 우리 집이 있고 그 안엔 엄마가 있었다.
아파도 아프다는 소리 대신 그렁그렁 눈물만 흘리던 나를 무릎에 앉히고 사색이 되어 약통에서 많은 약들을 쏟아내어 찾았던 빨간색 소독약으로 행여 아플세라 조심스럽게 발라주던 엄마의 손길은 아직도 잊히지 않는다.
많은 사람들과 친척들까지 모였던 언니의 운동회 날, 얼굴 반쪽이 갈색의 상처 딱지가 앉은 모습으로 자리를 함께했고 당시에는 흉했지만 다행히 얼굴엔 상처가 남지 않았다. 대신 새끼손가락에는 여전히 그날의 시간을 간직한 흉터가 남아있다. 내가 지내온 시간이 흐른 만큼 손에 남아있는 흉터는 옅어지고 있다. 지금 생각해보면 훨씬 더 많이 다쳤던 얼굴에 상처가 남지 않은 건 기적 같은 일이지만 나의 인생은 언제나 기적의 연속이다.
이젠 자전거를 타본지 10년을 넘어 20년 가까이 되어버려서 타는 방법도 잊어버린 것 같지만 탈 때 느꼈던 감각들이 아직도 선명해 가끔 그리울 때가 있다. 어느 날 엄마와 거실에서 함께 보던 TV에서 나오는 자전거 타는 장면을 보다가 넌지시 엄마에게 물어본 적이 있다.
“집에서 타는 자전거라도 타볼까?”
당시 한 동안 몸짱 아줌마 붐이 일어났을 때 집에서 할 수 있는 운동기구도 참 많이 나오던 시기가 있지 않았던가. 코로나19 때문에 홈 트레이닝이 유행하는 지금보다 더욱 핫 했던 아줌마들의 홈트 원조의 시기가 그때였다. 그 덕에 집에서 이용할 수 있는 다양한 소형 운동기구 중 하나였던 실내 자전거를 집에 들여놓고 탈 수 있을까에 대한 물음이었다.
엄마의 대답은 심플했다. 고민조차 없었다.
“그래, 타보자!”
엄마의 긍정적인 반응에 나는 배시시 웃음을 보였다.
이미 나에게는 상처가 옅어지는 지난 시간 동안 자전거 기구의 높이조차 무서워하는 고소공포증이 생겼고, 자전거 페달이 닿지 않는 발을 핑계 삼아 바퀴 한 번을 굴려보기도 전에 실천을 포기했다. 나는 클수록 용기를 잃어갔지만 엄마는 여전히 나에게 꿈과 희망을 주는 존재다. 그 꿈을 먹고 자라나는 나는 아직도 엄마의 품속에 있는 어린아이였다.
엄마는 어릴 적부터 나를 다른 아이들과 다르지 않게 키우기 위해 무던히도 노력했었다. 엄마가 여느 아이들과 내가 다르다는 걸 처음 알았을 때는 내가 걸음마를 시작할 무렵이라고 하였다.
하루는 옆집에 살던 아주머니가 엄마에게 이렇게 말했다고 했다.
“새댁, 얘 걸음이 좀 절뚝거리는 거 같지 않아?”
아장아장 예쁘게 걸음마를 떼는 아가들과 나의 걸음마는 조금 다른 모습을 하고 있었나 보다. 그 당시 엄마는 그분의 말에 불같이 화를 냈다고 했다. 물론 엄마 또한 내가 다른 아이들과 다르다는 걸 이미 알고 있었지만 자기 자식이 아프다는 걸 믿고 싶지 않으셨다고 한다.
그 무렵이 지나고 나서부터 내 얄궂은 인생의 운명은 시작되었다. 사실 내 인생이라고 말하기보단 엄마의 운명 혹은 우리 가족이 맞이한 운명이라고 말하는 게 더욱 맞을 수도 있다. 집안에 환자가 있다는 건 평범한 가정에서는 생각지도 못한 긴장의 연속과 경제적 어려움을 동반하는데 특히 중증의 환자라면 그 정도는 더욱 심하다.
우리 집도 마찬가지로 과거에는 내 병명조차 제대로 알 수 없다는 말에 병명을 찾아 수많은 크고 작은 병원들을 다녀야 했고, 아주 길고 힘든 시간이 지난 후에서야 정확한 병명을 들을 수 있었다.
병명을 찾으러 병원을 다닐 무렵 아빠는 작은 자개 공장을 운영하시고 계셨다. 우리가 병원을 자주 갈수록, 자리가 비어있을수록 아빠의 공장에 생긴 작은 균열의 구멍은 점점 커다랗게 변하고 있었다. 의지하며 함께 일하셨던 삼촌들은 우리가 모르는 새에 공장 운영하던 돈에 손을 대기 시작하셨고 차츰 빈도가 높아지고 대담해지기 시작했다. 어느 날은 대금으로 받았던 돈을 몽땅 들고 도망가시기도 했다. 병원을 다닐수록 엄마와 아빠는 사람도 잃고, 돈도 잃어가고 있었다. 그런 일들이 비일비재하게 일어나더니 결국 아빠가 운영하던 자개 공장은 한순간에 부도라는 종착점에 다다랐다.
우리 집은 원래도 부자거나 돈이 많은 건 아니었지만 그렇게 남들이 소위 말하듯 쫄딱 망해버렸다.
초등학교 입학 전까지는 그래도 그 나이 또래 아이들이랑 비슷하게 생활했던 거 같다.
세 살 차이 나는 언니랑은 투닥거리면서 잘 놀았고 유치원에서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오히려 유치원에서는 키가 또래 아이들보다 너무 커 항상 친구들보다 뒤에 서있어야 했다. 엄마와 아빠에게 특별히 몸이 아프다고 해서 차별받으면서 자랐다고 생각하지 않을 정도로 언니와 싸우거나 잘못했을 때도 함께 손을 들고 있거나 손바닥을 맞기도 했다.
어쩌면 이때가 엄마, 아빠가 가장 과보호하지 않았던 시기였던 거 같기도 하다. 다르게 말하면 이때 내가 가장 건강했고 스스로 땅을 밟을 수 있던 마지막 시기이기도 했다.
나는 처음부터 못 걷는 건 아니었다. 앞서도 말했듯 걸음마를 시작하였고 절뚝거림이 있었지만 잘 걷기는 했었다. 지금처럼 많은 건물들이 주위에 생기기 전 걷던 길목에 달랑 건물 한 개가 우뚝 서있던 시기 언니와 사촌들이 나란히 줄지어 2시간 남짓한 거리도 걸어 가보기도 하고, 심지어 오래된 기억 한편에서는 달리기도 종종 했던 나의 모습이 떠오른다.
초등학교 입학 당시에는 나를 오리, 오리 하면서 쫓아다니며 놀렸던 남자 애도 있었다. 그때는 보이는 모든 걸 놀릴 수 있는 나이이자 타인의 상처보다 자신의 즐거움을 우선으로 생각하는 가장 용감무쌍한 나이가 무기일 때였기에 모든 아이들은 용감했고, 무지했다. 누구도 쉽게 말하지 않았던 내 걷는 모습을 빗대어지어 놓은 별명을 들으며 학교를 다녔던 시간도 소중한 추억이 될 만큼 나에게 걸을 수 있었던 순간은 생각보다 짧았다.
초등학교 생활이 익숙해지는 시기였던 운동회가 있을 때쯤 유난히 부산스러웠던 그날의 학교 교실 풍경, 소란스러운 아이들과 무서운 선생님까지.
내가 다니던 1학년 3반 담임선생님은 옛날의 고지식한 사고방식과 쌀쌀맞고 못된 옆집 할머니 같은 제법 나이가 드신 분이었다. 나는 당시에는 병명을 알 수 없었지만 다치는 걸 무척 조심해야 되는 아이였기에 엄마는 담임선생님에게 부탁의 당부와 함께 좋지 않은 살림에도 자주 우리 반에 간식거리를 보내 주셨다. 선생님은 종종 엄마의 보살핌을 과하게 받는다며 핀잔 어린 소리를 나에게 들리게 말하시기도 했다. 그때는 몰랐던 감정이었지만 지금 돌이켜보면 나를 마주할 때면 선생님이 보였던 모습들에는 어쩌면 적의가 담겨 있지 않았나 싶을 정도였다.
평소와 다름없던 그날은 운동회가 있기 전 교실마다 대청소를 하고, 운동회 연습이 한참이었다. 의자와 책상을 한쪽으로 모아놓고 교실을 청소하기 위해 선생님은 나에게 의자를 옮기는 걸 도우라고 했었다. 그때의 나는 또래 아이들보다 큰 키와 겉보기에는 제법 활발하고 건강했기에 선생님은 스스럼없이 나에게 그 일을 시켰던 거 같다. 의자를 옮기다가 평범한 아이들은 부딪혀도 큰 탈 없이 지나가는 작은 부상도 나에게는 상황이 달랐다.
의자 다리 부분이던 철에 어쩌다 다리를 부딪쳤었다. 아찔할 만큼 아프고 욱신거려 발을 잘 딛지 못했는데 하필이면 부딪쳤던 다리는 평소에 절었던 다리라서 부자연스러운 걸음을 아무도 눈치 채지 못했다. 나를 학교에 보내면서 엄마가 선생님에게 당부를 부탁드린 것 중 하나가 달리기와 운동에 관한 수업은 참여시키지 말아 달라는 거였다. 하지만 그날의 선생님은 이런 건 아무도 빠지면 안 된다며 모두에게 달리기 연습을 시켰었다. 모두에는 물론 나도 포함이 되어 있었다.
어린 나이에 나는 늘 인상을 찌푸리고 계셨던 선생님을 무섭게 여기고 눈치를 봤었다. 엄마와의 약속도 지키지 못하고 매서운 선생님 눈초리를 의식하며 모래가 휘날리던 운동장을 아픈 다리로 걷듯 움직이다 이내 얼마 가지 못하고 넘어지며 아픈 다리를 부여잡았다. 어릴 때부터 자주 아팠던 나는 아파서 울지언정 소리 내어 울거나 어디가 아프다고 말하기보다는 꾹꾹 참아내는 편이었다. 다리는 아팠고 넘어져 있는 날 바라보는 선생님의 시선은 무서웠다. 귓가에 들리는 아이들의 웅성거림이 커질수록 창피했다. 아파서 일어나지도 못하고 그 자리에서 울면서 엄마를 기다려야 했다. 다행히 집은 학교와 5분 거리에 위치해 있어 집에 있던 엄마는 연락을 받고 얼마 지나지 않아 곧바로 나를 데리러 오셨다.
엄마에게 업혀 집에 돌아와 다리도 펴지 못하는 나를 달래며 엄마는 나의 몸 이곳, 저곳 살피며 다친 곳을 확인했다. 다리를 부여잡고 있는 내 손을 조심스레 치우고 다리를 살피기 위해 옷을 걷어 올리자 전과 확연히 달라진 나의 다리를 어렵지 않게 알아차릴 수 있었다. 평범했다면 부딪힌 자리는 멍이 들었을 테지만 난 부딪쳤던 부위가 멍과 함께 부어있었다. 더 자세히는 부딪힌 곳의 뼈가 미세하게 솟아오르고 있었다.
그날을 기점으로 나는 점점 하늘과 멀어지고 땅과 가까워지는 삶을 살아가게 되었다.
훗날 아예 걷지 못하게 된 후 학교는 가지 못했다. 어딜 갈 때면 엄마의 등에 업히는 게 일상이 되어버렸다. 엄마 등에 업혀 갔던 목욕탕에서 우연히 마주친 선생님은 여전히 쌀쌀맞은 눈으로 흘긋흘긋 우리를 남모르게 보면서도 애써 우리를 모른 척하셨다. 또래의 아이들이 기억하는 살가운 선생님의 이미지는 나에겐 없다. 평범한 아이들이 보았던 선생님의 이상적인 모습은 그들에게만 존재하는 모양이다. 목욕탕에서 다시 보았을 때 선생님의 다정한 인사 한마디가 있었다면 지금쯤 내가 기억하는 선생님은 그래도 인자한 모습이지 않았을까?
때론 따뜻한 인사 한 마디가 기분 좋은 기억의 오류를 만들어 줄 때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