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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스텔라 May 17. 2022

특별하거나 혹은 이상하거나

깁스를 풀고 나면 한동안 쓰지 않았던 다리는 나뭇가지처럼 바싹 메마른다. 내 몸이 아닌 것처럼 뻣뻣하고 의지대로 움직일 수가 없다. 씻지 못해 때가 껴 꼬질꼬질해지는 건 기본이고 여름날에 다쳐서 깁스를 하고 있을 때면 깁스 안에서 땀이 차 꼬릿한 냄새가 나기도 했다. 대야에 따뜻한 물을 붓고 그 안에 오랫동안 깁스를 했던 다리를 넣어 비누칠을 하며 씻을 때의 상쾌함은 그때만 누릴 수 있는 최고의 행복감이었다. 그 기분을 잊지 못해서인지 나는 여전히 샤워하기를 굉장히 좋아한다. 일상에서 찾은 소소한 행복이다. 하지만 물이 오래 닿으면 몸에 알레르기 반응이 올라와 오래 즐기진 못한다. 물 알레르기를 가지고 있다는 걸 처음 알게 된 건 걸어 다닐 수 있을 때였다. 엄마와 막내 이모랑 함께 처음 갔던 수영장에서이다.


 열심히 물에서 놀다 보니 몸이 울긋불긋해지고 온 몸에 두드러기가 올라왔었다. 평소에 씻고 샤워할 때에는 특별하게 반응하진 않았기에 엄마조차 몰랐던 알레르기였다. 다행히 알레르기는 약국에서 사 온 약을 먹고 금세 잦아들었다. 그날 이후에도 수영장처럼 장시간 물에서 노출되면 여전히 몸은 유별스럽게 반응을 하기에 물을 조심하는 편이다.




 


나는 평범하지 않다고 생각하지 않고 살아왔지만 가끔 생각해보면 또 엄청 이상한 몸을 가졌다고 느끼곤 한다.

몸이 아픈 거에 대해 특별히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그렇기에 몸이 남들과 달라지고 쉽게 다치거나 아파도 내 병명조차 그다지 신경 쓰지 않고 지내왔다. 그도 그럴 것이 내가 아프면 엄마, 아빠 혹은 병원이 모든 걸 해결해 주었고 내 몸이지만 아파도 내가 신경 쓸 부분은 없었다. 내가 가만히 있는 게 가장 큰 도움이자 빨리 낫는 방법이기 때문이었다.


내가 신경 써야 하는 부분은 단 하나, 다치지만 말고 재밌게 놀면서 지내기였다. 

늘 엄마, 아빠가 말하는 부분이다. 벌써 이 말을 들으면서 지낸 지 이십 년이 되어버렸다.

몸은 자주 아팠지만 딱히 슬프거나 우울하지 않았다. 

나는 충분히 행복하고 즐거웠다. 심각하게 몸이 아프거나 불편하다고 느끼지 않았던 건 언제나 긍정적인 엄마의 영향이 가장 컸다. 병원에 있을 때도 나를 간호하던 엄마는 항상 웃고 나도 함께 웃고 있었다. 주로 내가 입원해 있던 병원은 서울대학병원 어린이 병동이었다. 그곳에는 희귀 질환으로 와있는 어린 환자들이 많아 대부분의 보호자들은 자식 걱정으로 심각하고 예민한 상태가 지속되다 보니 대부분 피로감에 웃음을 잃어버린 얼굴을 하고 있었다. 그래서였는지 병원에 입원해 있을 때면 가끔 사람들은 엄마에게 뭐가 그렇게 즐겁냐고 묻기도 했다. 

엄마는 그럴 때면 항상 똑같이 대답했다.

 울고 있다고 나았으면 벌써 나았게요? 그러니깐 웃기라도 해야지.

엄마 덕분에 우리 가족은 항상 웃을 수 있었고 나는 내 병의 무거움을 느끼지 못했다. 내가 무게를 못 느낀다고 무게가 사라지는 게 아닌 것처럼 느끼지 못했던 무게는 고스란히 가족들이 짊어져야 하는 짐이 되었다. 환자가 있는 집안에서는 돈을 모으기는 하늘의 별 따기처럼 어렵다는 말이 있다. 마이너스만 안 되면 다행이라는 말도 있는데 그 말은 틀리지 않은 사실이었다. 


 병원을 가기 위해 지방에서 서울이라는 거리를 왕복으로 다녀와야 했다. 당시에는 집에 차가 없어 온전히 일반택시를 하루 종일 빌려서 다녀오는 택시 대절이라는 방법밖엔 없었다.  그마저도 가격이 엄청났고, 제대로 된 병명을 몰랐을 때는 병명을 찾기 위해 많은 돈을 허비해야 했다. 병명을 알고 난 후에도 크게 달라지진 않았다. 개발된 지 얼마 되지 않은 신약의 약값은 상상 이상으로 비싼 가격이었기에 여전히 매달 많은 돈이 지출되고 있었다. 심지어 우리 집은 엄마, 아빠가 돌봐야 하는 존재가 나만 있는 게 아니었다. 언니와 동생까지 있었으므로 경제적 부담은 실로 엄청났을 것이다. 엄마는 그럼에도 아파도 배움이 없으면 외롭다고 말하며 많은 책을 사주셨고 학교를 가지 못하는 동안에는 학습지 가정교사를 주마다 불러주셨다. 엄마의 말대로 책과 글은 친구가 없는 나에게 하나뿐인 친구가 되어주었고, 지금도 이렇게 글을 쓸 수 있는 용기를 나에게 주었다. 글에 무슨 용기가 필요하냐고 묻겠지만 어릴 때부터 줄곧 아팠던 나는 표현에 서투름이 있다. 글에는 내 속마음이 많이 담겨 나오지 않을까 싶다. 분명 이 글이 책으로 나온다면 가장 먼저 봐줄 가족들에게 너무 부끄러울 것 같다.


괜찮은 척, 아프지 않은 척은 내가 가장 잘하는 나를 위한 포장, 혹은 가족들을 위한 포장이다. 나를 위해 많은 희생과 부담을 안고 살아가는 가족들을 위해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의 노력이라고 생각한다. 그래도 가끔은 나도 슬플 때가 있다. 


 이를테면 우리 가족 중 몸이 불편한 사람은 나뿐이다. 내 병이 유전적인 병이라고 하는 사람들도 있고 아니라고 하는 사람도 있는데 병원에서 보면 실제로 부모 또는 형제자매 중에 같은 병을 앓고 있는 사람들이 많았다. 하지만 다행히 우리 집에서는 유전적인 문제는 없었다. 모두가 멀쩡하고 언니와 동생도 전혀 문제가 없이 건강하고 예쁜 모습이다. 나는 늘 다행이라고 생각하고 한편으로는 부럽기도 했다. 그거와는 별개로 어릴 때는 뛰어놀거나 나가 노는 둘의 모습이 부럽고 나만 이렇게 된 게 서러웠던 적도 있다. 딱 그뿐이었다. 오히려 두 사람이 내가 겪는 고통과 서러움을 경험한다면 그게 더 슬플 거 같다. 

나를 수술해주셨던 의사 선생님이 말했었다.

“네가 이렇게 태어난 건 그걸 견딜 수 있는 힘이 있기 때문이야”

맞는 말 같다. 나는 지금 이 상황이 이제는 많이 슬프지 않지만 두 사람이라면 더 못 견뎌하며 우울감에 빠져있을 성격이기에 우리 집에서 이런 상황을 견딜 수 있는 성격으로는 내가 제일 낫지 싶다. 어쩌면 특별함도 이상함도 평범함도 선택받은 각자가 그 안에서 누릴 수 있는 행복이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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