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전의 날

by 스크류

세광전자 수원 연수원 강의장에는 묘한 긴장감이 흘렀다.

"여러분, 이제 시험이 하루 앞으로 다가왔네요. 준비한 만큼 시험 잘 보고 오시고요. 한 번에 레벨A가 나오신 분들은 미리 축하드리고, 혹시나 아쉽게 나오지 않은 분들은 바로 시험 접수해서 추가 응시 부탁드려요. 모두 파이팅!"

어느덧 치열했던 6주간의 어학 수업 과정이 끝났다. 통상적으로 수업을 모두 들은 수강생들은 그 주에 바로 어학 시험에 응시한다.

김 부장의 한마디가 정훈의 머릿속을 스쳤다.

"거, 6주 동안 상위 등급 못 따면 다시 돌아올 생각하지 말고!"

함께 듣던 수강생의 이야기도 주마등처럼 떠올랐다.

"영업에선 어학 교육은 일상이에요. 제 주변에서는 레벨S가 아닌 분을 찾기 어렵죠."

누군가에게는 6주라는 시간이 잠시 휴식과도 같았지만, 또 누군가에게는 크나큰 부담의 짐을 짊어지고 앞으로 나아가는 시간이었다.


"So, I wanna say about this problem... uhm..."

"또 'uhm'이 나오네요. 다시 처음부터요."

"When I have a time, I usually... uhm..."

"그만! 정훈 씨. 이 정도면 레벨A는커녕, 레벨B도 어렵다니까요? 주말에 뭐했어요?"

"공부했어요. 아이들도 학원 간다고 마침 집도 비어서..."

윌리엄의 숙제는 주중 밤 여가시간과 주말을 꼬박 채워야 가능했다. 말하기 시험이라는 특성상, 발화를 할 수 있도록 암기 숙제를 주었다. 정훈의 암기 실력은 '왕년에'라는 이야기가 무색할 정도로 형편없었다.

교육이 시작한 지 3주쯤 되자 정훈은 매너리즘에 빠졌다. 윌리엄은 이를 알아차리기라도 한 듯, 정훈을 바라보며 말했다.

"정훈 씨는 안 되겠어요. 오늘 수업 끝나고, 저녁 7시까지 다시 강의장으로 오세요."

"아니, 그렇지만..."

"시험 안 볼 거에요?"

윌리엄이 빤히 정훈을 쳐다보았다. 한참을 말없이 서로를 바라보았다.

"알겠어요. 시간 맞춰 갈게요."

그렇게 몇 번이나 이를 악문 정훈이었다. 윌리엄도 6주 단기 성과를 위해서는 어쩔 수 없었다. 학생의 성과가 곧 그의 성공이었으니까.


토요일 아침. 평소에는 울리지 않던 정훈의 스마트폰이 울렸다.

'결전의 날이다.'

정훈은 방에서 나와 향긋한 버터 냄새를 따라갔다. 현주가 웃으며 정훈을 맞이했다.

"잘 잤어?"

"당신, 토요일 아침인데 일찍 일어났네? 그리고 아침 준비까지..."

"사랑하는 우리 서방님, 입사하고 나서 첫 시험인데 내가 잘 내조해야지. 안 그래? 혀 잘 굴러가라고 어메리칸 조식 준비했습니다~"

현주는 마지막 프렌치 토스트를 접시에 올렸다.

"왜 그리 멍 때려? 이리 와서 앉아. 어서 식사하세요, 자기."

바삭한 프렌치 토스트와 따뜻한 우유로 빈 속을 달랬다.

누군가 나의 간절함을 알아주는 것. 그리고 그 간절함을 위해 사랑하는 사람들이 힘을 모으는 것은, 뜨거운 열정보다는 따스한 사랑에 가깝다. 수능시험 날 아버지 길준이 그랬듯, 입사 15년 만에 시험을 보는 그를 위한 현주가 그랬다.


시험 시간보다 2시간 일찍 도착한 정훈은 근처 커피숍에서 마무리 공부를 하기로 했다.

커피숍에 들어서자, 커피를 들고 지나가는 누군가 정훈을 향해 걸어왔다.

"정훈 씨도 이 근처 사시나 봐요?"

"엇, 유리 씨도 여기서? 11시 시험?"

어학과정에서 함께 6주를 동고동락한 마케팅팀 유리였다. 그녀는 따뜻한 커피와 시원한 캔 음료를 들고 자리를 향해 가고 있었다.

"커피랑 캔맥주에요?"

"어... 맞아요."

"맥주? 시험도 아직 안 끝났는데?"

"부서 선배가 추천하더라고요. 좀 더 자신감 있어지고 발음이 좋아진다나. 지금 시험 볼 자신도 별로 없기도 하고..."

유리는 고개를 푹 숙인 채 말했다. 정훈이 말했다.

"좋은 방법이네요. 저도 한잔 해야겠어요."

"네? 괜히 저 때문에 시험 망치는 거 아녜요?"

"가볍게 한 잔 정도는 괜찮겠죠. 알려줘서 고마워요."

정훈은 유리와 같은 맥주와 커피를 주문했다. 구석 자리에 앉아 조용히 책과 에어팟을 꺼내 들었다.

가볍게 맥주 한 잔을 들이키며 생각했다.

'전 가고 싶어요. 유리씨는 아니겠지만.'

아이들에게 좋은 기회를 주고 싶었다. 아내에게는 여유 있는 해외 생활을 선물하고 싶었다. 그리고 주재원으로 성장할 수 없었던 자신의 부서에서 전설 같은 선배가 되고 싶었다. 따뜻한 커피가 밑바닥을 드러내고, 캔맥주에서는 통통 소리가 나기 시작했다. 어느덧 시험 시작이 15분 남았다.


"Tell me about a typical weekday in your life."

질문을 들은 정훈은 막힘이 없었다. 한번 내뱉은 말이 연습대로 이어지니 자신감이 붙었다.

'오늘 컨디션 나쁘지 않네.'

시간이 좀 흐르자, 시험장에서의 긴장 탓인지 아니면 커피숍에서의 맥주 때문인지 정훈은 점차 이상한 신호를 느꼈다.

'화장실을 미리 다녀올 걸 그랬나.'

시험의 절반이 지나갔을 무렵, 정훈은 집중이 되지 않았다. 준비한 암기대로 대답하지 못하기 시작했다. 잘 시작한 대답도 점차 짧은 문장으로 마무리되었다.

"Uhm... so... I mean... as I said before..."

어느덧 마지막 대답이었다. 제대로 집중하지 못했다.

'맥주탓인가. 왜 이리 화장실에 가고싶지.'

시험이 종료되자마자 헤드셋을 벗어 던지며 밖으로 향했다. 달려가듯 화장실로 향했다. 그리고는 허탈한 웃음을 지었다.


'잘 달려온 6주를 단 하루 만에 망쳤어. 내 욕심 때문에.'


▶『특례, 그거 될까요?』다음화 바로 보기 : 하필이면 왜 동남아 입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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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 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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