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작이 반이다.

by 스크류

"도착했습니다. 수원 연수원입니다."

버스 기사의 목소리에 정훈은 흐르는 눈물을 닦으며 눈을 떴다. 기분 좋은 꿈이었다.

벗어두었던 외투를 입으며 분주하게 일어났다. 버스에서 내려 눈앞의 높은 건물을 올려다보았다.

"오랜만이네."

15년 만이다. 신입사원 연수 때만 왔었던 수원에 다시 오게 되었다.

강당에서 오리엔테이션을 마친 정훈과 교육생들은 소강의장으로 이동했다. 강의장에 책상은 10개 남짓 있었고, 함께 수업 듣는 학생은 여섯 명이었다.

"웰컴 마이 스튜던트!"

강의장의 문을 열고 들어온 강사 윌리엄은 학생들과 인사를 나누었다. 교육생들의 실력을 파악하기 위해 영어를 섞어가며 질문을 던졌다.

오전 수업이 끝나고, 함께 수업 듣는 동료들과 점심을 먹으러 갔다.

"안녕하세요. 저는 품질보증팀 조정훈입니다."

"반갑습니다. 영업팀 김동훈이에요."

"저는 생산 효율화 사업팀 송명진입니다. 잘 부탁드려요."

"회사에서 마케팅 담당하고 있고요. 이유리입니다."

어색한 첫 인사를 마치고 고요한 식사 시간이 이어졌다. 정훈은 일면식이 없는 사람들과 6주를 어떻게 버텨야 하나 싶었다.

그때, 침묵을 깨고 한 남자가 물었다.

"그런데, 다들 어떻게 6주 교육을 올 수 있었어요? 부서에서 반대 안 해요?"

"전 부서에서 가라고 하더라고요. 내년 주재원을 보내야 한다나."

약간의 불만이 섞인 여자의 대답에 정훈은 귀가 쫑긋했다. '주재원'이라는 단어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래요? 내년 주재원을 가시게 되면 준비할 게 많겠네요."

"그러게요. 그래서 교육 가라고 해서 왔는데, 주재원은 안 가려고 해요."

"왜요? 가면 커리어에도 도움 되고, 복지도 좋다고 하던데..."

"요즘 시대에 3~4년을 해외에서 고생하고 싶어하는 사람이 있나요? 전 그냥 조용히 국내에서 지내면서 남편이랑 가끔 해외여행 다니는 게 좋아요."

정훈은 생각해보지 못했다. 주재원이 모두에게 메리트가 있는 건 아니라는 것을.


그렇게 정신없던 하루가 끝났다. 정훈의 삶에서 15년 만에 처음 맞이하는, 평소와는 조금 다른 일상이었다.

대학 입학 석차 3등이었던 그는 오늘 많이 부족하다고 느꼈다. 정훈의 성장은 그때 멈추었는지도 모른다. 아니, 성장하고 싶다는 갈증을 느끼지 않아 물을 마실 생각조차 못 했는지도 모른다.

수원 연수원에서 교육을 마치고, 셔틀버스로 집 앞 정류장에서 내렸다. 곧장 집으로 향하지 않고 근처 서점에 들렀다.

"고객님, 총 일곱 권 해서 십만 사천 육백 원입니다."

"여기 카드요."

"십만 원 이상 구매하시면 새학기를 맞아 포춘 쿠키를 드립니다. 행복하세요~!"

정훈은 포춘 쿠키와 책을 건네받았다. 무거운 발걸음으로 양손 가득 책을 들고 집에 도착했다.

"첫 교육 어땠어?"

현주가 물었다.

"내가 꼴찌야."

"아직 시험도 안 봤는데 무슨 꼴찌야. 이 책은 또 뭐야?"

정훈은 종이 가방을 뒤로 숨기며, 외투 주머니에서 쿠키를 꺼내 건넸다.

"포춘 쿠키? 애들처럼 뭐 이런 걸 사왔어."

"자기 생각나서 하나 가져왔지. 한번 열어봐 뭐라고 적혀 있나."

현주는 포춘 쿠키를 반으로 쪼개더니, 안에 들어 있던 작은 종이를 펼쳤다.

"시작할 용기를 냈다면, 이미 절반은 이룬 것이다. 새로운 도전에 두려워하지 말고 포기하지 마라. 당신의 선택은 늘 옳다."

정훈과 현주의 눈이 마주쳤다.

"나에게 필요한 말이네. 시작을 했으니 끝을 봐야지. 나... 당신과 애들한테 자랑스러운 아빠가 될게. 우리 가족 행복할 수 있도록 할게."

현주가 정훈의 품으로 들어오며 말했다.

"나 지금도 충분히 행복해. 친구였던 당신과 결혼한 것도, 그리고 가정을 이루고 아이들을 키우고 있는 것도. 모두 신기하고 행복한 일들뿐이야. 그러니까 너무 부담 가지지 말고 조정훈 방식대로 해봐. 그게 정답이고, 내가 응원하는 길이야."

"고마워, 현주야."

현주가 살짝 뒤로 물러서며 말했다.

"나 이제 애들 데리러 다녀올게. 집에서 저녁 챙겨 먹고, 공부하고 있어."

정훈은 고개를 끄덕이며 방으로 향했다. 현주가 외출한 고요한 집에서는 정훈의 뜨거운 열망이 요란하게 타오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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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 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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