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필이면 왜 동남아 입니까?

by 스크류

"아 네, 김 부장님."

"그래, 시험은 잘 봤고?"

시험을 마치고 시험장 밖으로 나오는 길에 김 부장으로부터 전화가 왔다.

'왜 나한테 전화했지? 시험 망친 것 어떻게 알고.'

김 부장의 전화 한 통에 복잡한 생각이 정훈의 머릿속을 스쳤다.

"어제 세광 베트남 법인 인사 담당자와 본사 인사팀에서 연락이 왔다. 올해 8월에 부임해야 한다고 하던데, 가능해?"

"부임요? 어디요?"

"임마, 어디긴 어디야. 베트남 법인에. 너 이미 인사팀 최 과장이랑 다 이야기 나눈 거 아니었어?"

김 부장은 정훈이 6주 어학 과정에 입과한 것도 주재원 부임도 모두 계획된 일이라 생각했다. 본인은 알지 못했던 후배의 계획을 알고 나니 조금은 불편했던 모양이다.

"아뇨? 전 처음 듣는 이야기인데요..."

정훈은 알지 못했다. 주재원의 기회가 이렇게 빨리 주어질 줄은. 그리고 본인이 가고 싶은 나라에 쉽사리 가지 못한다는 사실도.

"그런데 부장님, 왜 베트남 법인입니까?"

"그야 난 모르지! 너 근데 진짜 아무것도 얘기된 게 없이 어학 과정에 간 거야? 허 참..."

"누구랑 뭘 이야기해야 할지 모르니까요. 어학 한번 취득하고 싶어서 온 거라니까요."

"아니 그런데 인사에선 왜 널 이야기한 거지? 그럼 안 간다고 이야기한다!"

"저... 아뇨. 부장님. 잠시만요. 오늘 저녁까지 전화 다시 드리겠습니다."

'미국도 아니고, 유럽도 아니고, 왠... 동남아?'

정훈의 머릿속은 복잡해져만 갔다.


김 부장은 화끈거리는 얼굴을 매만지며 사무실을 나섰다. 상기된 얼굴과 빨라지는 발걸음. 평소 같았으면 밍기적거리며 도착했을 그가 인사팀 사무실에 도착했다.

"부장님, 무슨 일이세요?"

인사팀 최 과장이 얼굴을 들며 물었다.

"못 보냅니다. 왜 또 우리에요? 품보팀에 파트만 해도 수십 개입니다. 우린 베트남 법인하고는 연관도 없어요! 보낸 적도 없고요! 그러니 당장 조정훈 과장을 대상에서 빼요. 뭐 우리 파트가 호구입니까?"

최 과장이 당황한 듯 웃으며 넓다란 회의 테이블로 김 부장을 안내했다. 익숙한 듯 냉장고를 열며 시원한 병 음료를 꺼내 건넸다.

"아이고 부장님. 이거 마시면서 조금 가라앉히시고... 제가 설명드릴게요."

"바쁘다마다요! 지금 서 대리 육아 휴직 갔고, 구 과장은 떠났어요. 그나마 남은 게 조정훈입니다. 걔가 듣고 싶다고 해서 어쩔 수 없이 교육도 보냈단 말입니다. 근데 뭐요? 주재원?"

"부장님, 지금 경쟁사 대비 우리 세광이 많이 어렵습니다. 조정훈 과장이 지금 부장님께 많은 도움을 드려야 하는 상황인 것은 압니다만, 한국대 나오고, 고과도 올해 빼놓고는 과장 진급하고 계속 상위 평가에다가, 어학 과정까지 입과했어요. 어학 등급만 취득하고, 본인만 생각이 있다면 회사는 조 과장을 1순위로 보낼 겁니다. 대체할 수 있는 사람이 없어요. 한번만 도와주세요. 지금 조 과장 아니면 베트남 법인에 보낼 수 있는 사람이 없어요. 법인에 있는 박 상무가 계속 전화옵니다. 도와주세요."

"지금 정훈이도 교육 가서 그렇지, 다시 돌아오면 열심히 할 친구에요. 아니 사람을 빼갈 거면 뭐 몇 명 더 넣어주든지, 아니면 우리 애들 평가를 팍팍 밀어주든지. 그래야 나도 생각해보지 않겠어요?"

김 부장은 최 과장의 얼굴을 스윽 보더니 침을 꼴깍 삼켰다. 피할 수 없는 상황이라면 손해 보기 싫었다.

"알겠어요. 그럼 부장님, 이번에 오는 경력직 두명을 바로 배치할게요. 다음주에 올거에요."

나쁘지 않은 제안이었다. 정훈이 떠나더라도 두명을 받을 수 있다. 게다가 바로 업무에 활용 가능한 경력직을 말이다. 그동안 사람이 없다고 볼멘소리를 하던 부서원들이 생각났다. 사실 김 부장은 정훈을 보낼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는지 모른다.

"이번이 마지막입니다. 더 빼가는 것 없는 거에요! 알았어요?"

"감사합니다! 부장님! 이야기해보고 알려주세요."


같은 시각, 정훈은 집으로 향하고 있었다. 지하철 창 너머 보이는 한강으로 해가 서서히 다이빙하고 있었다. 정훈은 깊은 생각에 잠긴 듯 한강에 풍덩 빠지고 있는 해를 바라보다가, 천천히 두 눈을 감았다.

시험 전 만난 유리, 어떻게 말했는지 기억조차 나지 않는 시험, 마지막으로 김 부장과의 통화까지. 오늘 하루가 어떻게 흘러갔는지 모르겠지만, 아무튼 오늘 하루는 참 길었다.


띠띠띠띠. 띠리링.


현관문을 연 정훈은 구수한 된장찌개 냄새와 함께 따뜻한 온기를 느꼈다. 앞치마를 두른 현주가 반갑게 다가왔다.

"왔어? 고생했어."

"어? 어. 고마워 당신."

"뭐야? 반응이 왜 이래. 평소 같았으면 오늘 시험에 대해 줄줄이 말할 거면서."

"아, 그냥. 만족스럽지 않아서..."

"왜?"

"준비한 대로 이야기를 못 했어."

"첫 시험이잖아. 한 번에 끝내려고 했어? 당신도 참... 영어 어렵다면서. 오랜만이라면서. 어떻게 한 번에 만족하냐? 그 정도 실력이었으면 교육도 안 갔지."

정훈은 쓴 웃음을 보이며 운동화를 대충 벗고 집 안으로 들어섰다. 현주의 위로 덕분에 한결 마음이 편했다. 식탁 위에는 정훈이 좋아하는 된장찌개와 계란말이가 올라와 있었다. 민재와 민서는 이미 방에서 각자의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맞다. 아까 김부장이랑 이야기하던 거 나한테 말할거 있다고 하지 않았어?"

현주가 먼저 말을 꺼냈다. 정훈은 숟가락을 내려놓았다.

"베트남 호치민에 주재원 T/O가 생겼나봐. 세광이 거기에 가전 생산 법인을 두고 있거든. 품질보증 쪽에서 주재원이 필요한데, 인사팀에서 나를 추천했어."

"기간은?"

"보통 3년. 연장하면 최대 5년까지 가능하대."

"아이들 학교는?"

"국제학교가 있어. 영어로 수업하는 곳. 학비는 회사에서 지원해주고."

현주는 두 손으로 밥그릇을 감싸 쥔 채 한동안 말이 없었다. 정훈은 그녀의 표정을 살피며 조심스럽게 말을 이었다.

"나도 처음엔 미국을 생각했어. 솔직히 베트남이라고 했을 때 실망도 했고. 근데 자기야, 이건 기회야. 15년 동안 기다렸던 기회라고."

"나도 알아. 당신이 얼마나 원했는지. 근데... 애들이 적응할 수 있을까? 민재는 요즘 학원도 가기 싫다고 하잖아. 거기 가면 영어로만 수업인데."

"그래서 더 좋은 거 아니야? 여기서 학원에 치이는 것보다 해외에서 자연스럽게 영어를 배우는 게..."

"자연스럽게? 영어 한마디도 못 하는 애가 갑자기 영어로 수업을 듣는 게 자연스러워?"

현주의 목소리가 높아졌다. 정훈은 입을 다물었다. 잠시 침묵이 흘렀다. 현주가 먼저 숨을 고르며 말했다.

"미안해. 화낸 거 아니야. 나도... 솔직히 말하면 기대가 돼. 여기서 매일 학원 라이딩하고, 점심도 거르고, 아이들 성적에 전전긍긍하는 것보다는... 어쩌면 환경을 바꾸는 게 나을 수도 있겠다 싶어."

"현주야."

"근데 불안한 거야. 내가 거기 가서 뭘 할 수 있을까. 여기서도 힘든데."

"같이 하는 거야. 나 혼자 가는 거 아니잖아."

정훈은 현주의 손을 잡았다. 현주는 고개를 끄덕이며 작게 웃었다.

"알겠어. 한번 해보자. 근데 조건 하나."

"뭔데?"

"거기 가서도 당신이 맨날 야근하고, 나 혼자 애들 다 챙기는 건 똑같으면 안 돼. 알았지?"

"알았어. 약속할게."

정훈은 그 약속이 지켜지기 어려울 수도 있다는 사실을 어렴풋이 알고 있었다. 하지만 지금 이 순간, 현주의 동의가 필요했다. 그것만으로 충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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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 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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