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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여니 Oct 28. 2022

진정한 독립기

위대한 집안일에 대하여


내가 지낼 공간을 더 나은 곳으로 만들기 위해 안간힘을 쓰는 시간은
처음으로 스스로를 책임지기 위해 아등바등하는 순간이었다.
내가 바꾼 공간이 이곳에서 보낼 나의 시간을 바꾸리라 기대했다. 
그렇게 일상의 모든 것이 더 좋아지리라는 희망을 품었다.

- 하재영, 친애하는 나의 집에게 -




부끄러운 고백으로 시작해보면 나는 아직 캥거루족이다. 부모님에게 경제적으로 모든 걸 의존하고 있지는 않지만(정신적으로는 완전 독립), 가장 큰 주거 독립을 하지 않았으니 사회에서 일컫는 캥거루족과 다를 바가 없다. 얼마 전 언론에서는 우리나라 30~40대 절반이 부모와 함께 동거하고 있다고 보도했다. 통계는 여성보다 남성이 부모님과의 동거 비율이 높고, 그 이유로는 우리나라 성인의 동거 형태가 결혼에 맞춰져 있기 때문이라고 분석했다. 주로 주거 독립 계기는 결혼, 학교, 직장 순인데, 여기에 소득 수준이 높을수록 주거 독립 가능성이 높다고 덧붙인다. 이런 보도를 보고 있으면 나에 대해 부연설명을 해주는 것 같아 이따금씩 얼굴이 화끈거리는 것은 어쩔 수 없다. 


또 한 번의 고백을 덧붙이자면 나는 집안일에 대해 전혀 알지 못했다. 휴일에 청소기 돌리고 설거지 하는 그 정도였다. 우리 집은 오래도록 제사를 지낸 집이었는데 그럴때마다 옆에서 음식이나 여러 가지를 배워보려고 하면 엄마는 늘 이렇게 말했다. "결혼하면 어련히 다 하게 될 텐데. 뭘 지금부터 하려고 그래. 아서~" 그래서 나는 엄마 말을 듣는 딸이라고 스스로를 위안하며 집안일에 관심을 갖지 않았다. 


제주도에서 함께 보내면서 엄마는 이제 그 말이 후회된다고 했다. 진작 이렇게 결혼을 늦게 할 것 같았으면 진작 알려줄걸 이라며. 누구는 이럴 줄 알았나. 무튼, 부모님과의 여행이 끝나고 정말 한 달 동안은 혼자 지내야 하니 밥은 둘째 치고, 빨래나 청소 등을 세세히 알아야 했다. 세탁기에 세재를 어떻게 넣고 얼마나 뭘 돌려야 하는지도 몰랐으니 말이다. 30대 중반이 다 되어 엄마 옆에서, 그제야 배우는 내 모습이 내심 부끄러웠다. 그래서 뭐든 그 나이대에 맞게 조금씩은 해야 한다는 것이 무슨 말인지를 몸소 깨우쳤다. 

 





제주에서의 생활은 이와 같이 여러모로 나의 진정한 독립 체험기었다. 매일 눈을 뜨면 아침에는 무엇을 차려먹나부터 시작해서 냉장고가 비면 장을 보고, 먼지가 쌓이면 귀찮아도 청소를 해야 하는, 스스로 아등바등하는 독립의 시간을 경험했다. 자취 경력이 높은 선배님들이 들으면 이 어이없어 보이는 일들이 나에게는 실로 스스로 하는 처음이었다. 그래서인지 제주도에서의 시간은 혼자 오로지 스스로에게 책임지며 살아봤던 시간이기도 하다.  


아, 딸은 엄마를 닮는다고 했던가. 집에서 제일 깔끔한 엄마 눈에는 나는 한없이 어수선한 딸이었다. 내가 방 청소를 다 했는데도 불구하고 엄마 눈에는 늘 성에 차지 않았다. 분리수거든, 음식물이든 천천히 처리하겠다고 말하면 엄마는 본인이 직접 하셨다. 나는 그것이 엄마가 나보다 성격이 더 급해서라고만 생각했다. 그런데 그 생각은 내가 크게 잘 못 알고 있는 것이었다. 나 또한 생활하면서 당일 나온 음식물은 벌레나 냄새 때문에 바로 버렸다. 분리수거도 공간 차지와 냄새 때문에 이틀에 한번 꼴로 했다. 집에서 왜 엄마가 그렇게 부지런해질 수밖에 없는지를 너무 늦게 알았다. 어느덧 나 또한 엄마처럼 밥 먹고는 바로 설거지를 하고, 머리카락 등 조금만 보여도 청소기를 간단히 돌렸다. 집안일하는 내 모습에서 엄마를 보았다. 알게 모르게 엄마의 집안일 패턴과 생활을 몸에 익히고 있었던 것이다. 


비가 추적추적 내리던 제주의 한 여름날, 나는 하루 종일 집에 있기로 했다. 밀렸던 집안일을 해야겠다 싶어 아침을 간단히 차려먹고 설거지부터 시작했다. 이윽고 세탁기 2번 돌리는 동안 청소기, 물걸레질을 하고 화장실도 대강 한번 청소했다. 한숨 돌리려고 쇼파에 앉으니 벌써 이른 저녁 먹을 시간이었다. 맙소사. 하나하나를 보면 작은 단위의 일이었는데 참으로 많은 시간이 흘렀다. 내일이면 원상복구 되어 오늘 한 일이 눈에 띄지는 않지만, 사람답게 살기 위해서는 또 해야 하는 꼭 필요한 일. 그것이 집안일이었다. 


집안일은 어쩌면 매일 쓸고 닦으며 내 삶을 깨끗이 정돈하면서 살아내는 과정이 아닐까. 깨끗하게 정리된 이 공간에서 하루를 묵묵히 잘 살아가기 위함이 아닐까. 하재경 <친애하는 나의 집에서>의 문장과도 같이, 정리된 공간에서 그렇게 일상의 모든 것이 더 좋아지리라는 희망을 품으며 우리는 지낼지도 모른다. 엄마가 깔끔하게 청소하고 따뜻한 밥을 차려주는 집은 우리 가족의 건강을 비롯해 모든 것이 되었으면 하는 마음담겨있다. 오늘도 어지르고 내일은 더 복잡해지지만, 괜찮다고 다독이며 다시 정리하고 시작하면 된다는 그 삶의 기본을 가르쳐준다. 이렇게 기본적이지만 위대한 집안일을 30대 중반에야 비로소 깨닫다니. 맙소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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