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라이트쿠키 Oct 28. 2022

누나, 데리러 갈까?

성격이 정반대인 남매의 대화란





"누나 몇 시에 도착해? 데리러 갈까?" 


6주간의 시간을 보내고 제주도에서 서울로 돌아가는 길. 많은 사람들이 대기하는 제주공항의 부산스러움 속에서 나도 같이 일상으로 돌아가는 줄에 대기하는 것이 낯설어지던 무렵 동생에게 전화가 왔다. 동생의 물음에 숨쉴틈도 주지 않고 바로 대답했다. 

"아니 됐어, 갑자기 왜 그래?"

당황스러움에 어영부영 조심히 가겠다고 연락을 마치고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그리고 적막한 비행기 안에서 동생 전화의 연장선으로 우리 남매에 대해 떠올렸다.


친하지만 안 친한 사이. 서로 챙기지만 연락은 대면대면하는 사이. 가치관도 성격도 다른 남매. 

나와 동생은 같은 부모님이 맞을까 싶을 정도로 모든 것이 다르다. 가령 제주도를 갈 때도 공항에 나는 비행시간 40~50분 전까지 도착하는데 동생은 1시간 30분 전에 도착해야 안심을 한다. 나는 여행을 포함하여 다양한 취미를 만드는 것을 좋아하는데 동생은 여행에도 관심 없고 최애는 컴퓨터 게임이다. 회사나 일에 있어서도 동생은 안전추구형이나 나는 도전 지향형이다. 그래서인지 어릴 적부터 내가 더 욕심이 많았다. 이런 성향은 물론 심지어 피부색도 어릴 적부터 흑과 백이었다. 



"적당히 해도 되잖아?"


이번에 퇴사 후 제주도에 잠시 내려간다고 했을 때, 동생이 제발 푹 쉬고 다음 회사에서는 적당히 하는 법을 터득하라고 말했다. 자기처럼 편하게 지내라는 말을 덧붙이며. 우리의 다름은 서로가 밥벌이를 시작하고 각자의 사회에서 자리 잡으면서 더 두드러졌다. 아니, 이렇게 생각하는 건 동생에 대한 나의 질투와 부러움이 섞여있기 때문이다. 옆에서 지켜보면서 인생에 있어 동생은 치러야 하는 발달 과업들과 선택을 쉽게 하는데도 원하는 대로 순탄하게 이루어가는 동생이 늘 부러웠다. 대학교 입학도, 취업도, 업무도, 결혼도, 내 집 마련까지 전부 내 입장에서는 장애물 없이 진행하는 듯했다. 여기에 가끔 엄마가 사주를 보고 와서 동생은 가만히 있어도 큰 어려움 없이 잘 살 꺼라는 공통된 예언에 불쑥 화가 날 때도 있다. 같은 부모님 밑에서 성장해왔는데 나는 매 번, 매 순간이 어려운데 말이다. 


세상은 상대적인 것이라 환경과 주변 속에서 온전히 나만 볼 수 없고 같은 형제여도 비교할 수밖에 없는 순간이 있다. 유독 힘든 순간이 찾아오면 동생과 나 스스로를 비교하게 되었다. 나를 갉아먹는 태도이기는 하지만 한편으로는 내가 의지하는 방법이기도 하다. 사실 비교는 동생의 입장과는 무관하게 내 감정과 생각만이 존재하여 만들어낸 데이터다. 내가 생각을 바꾸면 나의 질투는 의지가 되곤 했다. 비교하는 과정에서 동생이 이루어온 것들을 온전히 바라볼 수 있고 비교의 끝엔 동생이 이뤘으니 같은 핏줄로서 나도 곧 해낼 거라는 얼토당토 한 믿음은 덤이다. 동생은 이런 나만의 방법을 전혀 알지 못할 것이다. 저 누나 또 심각하네 정도로 받아들일지도. 



"누나 고마워"


놀랍게도 작년에 동생이 결혼하고부터는 싸우거나 다투거나 하는 일이 전혀 없다. 결혼하고부터 유독 고맙다는 표현이 잦았다. 동생보다 한참 무뚝뚝한 나는 "오케이"로 무심히 받아치지만, 동생과의 대화 끝엔 나보다 더 어른이 되어버린 동생이 대견하다. 동생의 결혼 후에는 내가 부모님 곁에 더 가까이 있다 보니 부모님 일정이나 가족행사에 대해 의견을 정리하는 일이 많았다. 너무 내 생각대로만 진행하는 것일까 봐 매번 동생에게 상황을 이야기하고 올케와 상의해서 알려달라고 말하면 대화의 마지막은 고맙다는 것이었다. 특유의 장녀 컴플렉스로 여러 가지를 나서서 챙기는 것이 동생네 부부에게는 어쩌면 적당한 선에서 편할 수도 있다. 하지만 반면에 주도적인 것이 한 끗 차이로 강압적이라 느껴질 수도 있을 텐데 동생은 고맙다로 나의 의견을 포용했다.


문득 올리버 색스의 <고맙습니다>의 구절이 떠올랐다.

"두렵지 않은 척하지는 않겠다. 하지만 내가 무엇보다 강하게 느끼는 감정은 고마움이다. 나는 사랑했고, 사랑받았다. 남들에게 많은 것을 받았고, 나도 조금쯤은 돌려주었다. 나는 읽고, 여행하고, 생각하고, 썼다. 세상과의 교제를 즐겼다. 특히 작가들과 독자들과의 특별한 교제를 즐겼다. 무엇보다 나는 이 아름다운 행성에서 지각 있는 존재이자 생각하는 동물로 살았다. 그것은 그 자체만으로도 엄청난 특권이자 모험이었다." 


'고맙다'라는 말, 죽음을 앞둔 사람이 얻은 삶의 통찰적 표현과 동생의 고맙다의 깊이는 다를 수 있으나 주변을 따뜻하게 하는 온도는 같다. 생전 표현을 안 하는 동생이 어느 순간부터 밥 먹듯 고맙다고 한다는 것은 성장일기와도 같다. 본인의 가정을 이루며 여러 상황을 경험하면서 진실로 삶과 누군가를 이해하고 받아들인 사람만이 할 수 있는 포용의 말이니까. 


그리고 마지막 기억의 끝에 내가 놓친 것이 있었다. 동생은 순탄하게 원하는대로 늘 이루며 산다고 생각했었는데, 나도 동생도 너무 어린시절이라 잊고 있었다. 동생은 결코 순탄하지 않았다는 것을. 동생은 초등학교 1학년부터 3년 동안 아파서 병원에 있었다. 일반 사람처럼 걷지 못할 수도 있다고 했는데 몇 번의 수술과 재활치료로 지금은 잘 생활하고 있다. 어린나이에 겪은 그 고통은 성인보다 더 길고 크게 느껴졌을텐데 동생은 기특하게도 잘 이겨냈다. 너무 어릴적에 맞이한 인생의 고비를 지나고 나서, 동생은 여유와 본인의 페이스를 만들어나간 것은 아닐까. 나이만 먹은 누나는 부끄럽게도 이따금씩 기억하는 것만 들추어 동생을 바라 본 것이었다.   


 "데리러 갈까"의 그 짧은 한마디로 다시 한번 되돌아본 동생의 성장, 대견하고 부러우며 또한 다시 나의 의지가 된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