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에 진학하고 시간은 금방 흘렀다. 학과 수업에는 여전히 적응을 하지 못했지만 만나는 사람은 많아져 갔다. 학교생활은 재밌었고 만족스러웠지만 성적이 걱정되었다. 시험을 치러 가면 항상 백지를 내고 나와야만 했다. 교수님께 편지도 써봤지만 그것도 한두 번이지 계속할 수 있을 것 같지도 않았다. 1학기를 끝내면 군대를 가야겠다고 결심했다. 실업계를 졸업한 다른 친구들은 군입대를 하고 있었기에 나도 친구들하고 같은 시기에 갔다 와야지 하고 은연중에 생각한 거 같다. 하지만 나는 빠른 년생이라 군대에서 영장이 날아오지 않았다. ‘지원해서 가야지’ 마음먹었다. 제일 처음 지원했던 곳은 해군이었다. 며칠 후 면접을 보러 갔다. 한 면접관이 물었다.
“우리의 주적은 누구입니까?”
“우리의 주적은 일본입니다.”
당당하게 대답했다. 면접관의 표정이 좋지 않았다. 결과는 탈락이었다. 우리의 주적은 북한이라는 사실은 군대에 들어가서 한참 후에 알았다. 그 후 해병대를 지원하면 빨리 입대할 수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해병대를 지원했다. 해병대는 신체검사도 했는데 윗몸일으키기와 팔 굽혀 펴기 같은 종목들이 있었다. 어릴 때부터 학창 시절 검도와 합기도 등 꾸준히 운동을 한 나에게는 어렵지 않은 검사였다. 며칠 후 결과 발표가 났다.
“입영 일시: 2008년 07월 21일”
합격이었다. 대학교 합격 때와는 다르게 기쁘지만은 않았다. 그리고 입영까지 남은 시간은 딱 한 달이었다. 기말고사를 끝난 시점이라서 한 달여간의 시간을 어떻게 하면 알차게 보낼 수 있을까 생각을 많이 했다. 군대에 가기 전 여행을 가는 것도 괜찮다고 들었기에 무작정 여행을 가기로 결심했다. 나랑 하루 차이로 입대를 하는 광재에게 연락해서 여행을 가자고 제안했다. 우리는 그렇게 서울로 향했다. 서울을 여행으로 온 건 처음이었다. 명동, 홍대. 압구정, 남산타워, 한강유람선 등 많은 곳을 방문했다.
4박 5일 동안 서울여행 일정을 끝내고 집에 오자마자 후쿠오카로 가족들과 여행을 갔다. 처음 간 해외여행이라 모든 게 신기했다. 시 싸이드 모모치 해변, 아소산 등 많은 곳을 구경했다. 친구들 가족들하고 추억을 쌓다 보니 어느새 입영날짜가 다가왔다.
2008년 7월 21일 아침에 일어나서 부모님께 큰절을 올렸다.
“2년 동안 몸 건강히 잘 다녀오겠습니다.”
부모님은 이런 건 어디서 배웠냐고 하시면서 내심 좋아하셨다. 그리고 포항으로 향했다. 포항에 도착해서 밥을 먹고 운동장에 집결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부모님께 절을 하는데 앞으로 못 볼 것도 아닌데 괜스레 슬퍼졌다. 크면서 한 번도 부모님과 떨어진 적이 없었기에 그랬던 것 같다. 멀리서 부모님을 봤는데 어머니가 울고 계셨다. 뒤로 돌아 이동하는데 저 멀리 손뼉 치는 선임 기수에서 친구가 보였다.
“뽀식아”
뽀식이란 별명을 가지고 있는 준영이었다. 해병대를 간 건 알고 있었지만 이렇게 만날 줄은 몰랐기에 너무 반가웠다. 하지만 준영이는 나를 본 척 만척하면서 계속 박수를 쳐댔다. 내가 훈련병을 수료할 때쯤이나 되어서야 내가 얼마나 위험한 짓을 했는지 알게 되었다.
군생활이 시작되었다. 처음 7일간은 가입소 기간이다. 7일간 생활 끝에 못 버티는 친구들은 다시 집으로 돌아가는 기간이기도 하다. 그 기간을 끝내고 나자 군복 및 보급품이 지급되었다. 군 생활을 기록하게 될 수양록도 받았다. 이때부터 이어진 일기 쓰는 습관은 지금까지도 이어지고 있다. 군입대를 하면서 새로 하게 된 것들이 참 많다. 바느질을 해서 명찰을 달아보기도 했으며 오전에 일어나서 잡초를 뜯기도 주말에 안 가던 종교활동을 가기도 하였다.
훈련받고 먹은 아이스크림, 맛있게 먹었던 군대리아, 훈련 후 행군 중 너무 오줌이 마려워서 오줌을 싸다 교관한테 걸려서 맞았던 기억, 칫솔을 잃어버려서 동기 칫솔을 빌려서 이를 닦은 기억들도 다 훈련병 때의 기억들이다. 가입소 기간까지 총 7주간의 훈련소 덕에 아주 멋진 해병으로 거듭날 수 있었다.
앞으로 다시는 못 볼지도 모르는 동기들과 작별인사를 하려니 눈시울이 붉어졌다. 그리고 순서대로 후반기 교육 대대로 떠났다. 난 병과가 상륙장갑차였기에 상륙장갑차 교육 대대로 이동했다. 실무부대와 붙어 있었기에 교육대의 처음 분위기는 살벌했다.
교육대에서 지냈던 한 달여간의 기간은 많은 기억들이 있지만 외박을 했던 날이 가장 기억에 남는다. 일박 이 일간 외박의 기회를 주는 날이었는데 무엇보다 부모님을 볼 수 있었기에 행복했다. 그리고 음식을 마음껏 먹을 수 있다는 것에 한번 더 행복했다. 외박이 끝나고 부대 복귀 후 부모님을 보고 왔다고 기합이 빠져있다고 동기들과 함께 팡파르를 받은 날이었는데 그때 추워서 오들오들 떨었던 기억이 아직도 선명하다.
한 달 여간의 교육대 생활이 끝나고 동화 교육대에서의 시간을 보냈다. 동화 교육대는 실무에 가기 전 동기들과 볼 수 있는 마지막 시간이었는데 동기들끼리 시간을 보낼 수 있어서 한편으로는 좋고 한편으로는 두려웠던 시간이었다. 동화 교육대를 마치고 실무로 이동을 했다. 난 2사단으로 배치받았기에 김포로 향했다. 실무로 간다는 것이 마냥 설레면서도 무서웠다.
중대에 도착해서도 3일간 동화교육을 받았다. 본격적인 실무 생활이 시작되었다.
“여기도 다 사람 사는 곳이니까 너무 두려워하지 마.”
이제 곧 전역하는 해병이 앞으로의 남은 군생활을 응원해주며 담배를 건넸다. 한낱 이병 주제에 안 받을 수가 없었다. 반대로 생각해보니 군대에서는 담배를 피우는 게 더 도움이 될 것 같았다. 그전까지 담배를 피우지 않았지만 제대하는 그날까지 담배를 피워야겠다고 마음먹었다. 오른손으로 담배를 피우고 있었더니 선임이 말했다.
“앞으로 담배 피울 때는 왼손으로 펴야 된다. 그래야 경례가 가능하니깐”
“네, 알겠습니다”
중대에 적응이 되기도 전에 야외 훈련을 가게 되었다. 이병이라 선임 기수도 모를 때였는데 오침 시간에 한 선임이 날 불러내더니 잔디밭에서 네 잎 클로버를 찾아라고 시켰다. 그래서 한참을 네 잎 클로버를 찾았던 기억이 있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 일병 선임이었다. 그 선임은 이상한걸 많이 시켰는데 기동 하는 상륙 장갑차 안에서 노래를 몇십 곡 부르는 걸 시키기도 하였고 일요일 남들 다 쉬는 시간에 십자드라이버를 주고서는 일자 드라이버로 만들어와라고 시켰던 적도 있다. 그래서 맞선임과 함께 십자드라이버를 한참 갈면서 욕을 해댔던 적도 있다. 지금 생각하면 추억이지만 그때는 아주 끔찍한 선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