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둠 속에 갇혔다(1)

쿠바, 산티 스피리투스

by 월세부부

3박 4일이 이렇게 빨리 지나가다니! 시간이 멈춘 나라 맞아? 보름달 빵처럼 두툼한 피자, 화학약품 맛나는 아이스크림, 악수까지 하며 헤어졌던 땅콩 파는 할머니, 다그닥 다그닥 소리 나는 타임머신 말마차까지… '추억'을 받기만 했는데 벌써 떠나는 날이 됐네! 산티아고 데 쿠바! 무차스 그라시아스!(정말 감사합니다) 오늘은 트리니다드로 간다. 이 도시는 아바나 다음으로 유명한 도시로… 됐고!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트리니다드까지 까미욘(트럭)을 타고 어떻게 가느냐였다. 어제 많은 까미욘 차장들과 수 차례 바디랭귀지를 한 결과 직통으로 트리니다드로 가는 까미욘은 없었다. 그들은 일단 ‘바야모’ 도시에 가서 다시 알아보라는 말만 했다. 숙박하는 내내 가족처럼 편하게 대해준 글로리아와 작별인사를 하고 까미욘을 타기 위해 터미널에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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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야모! 바야모! 바야모! 이 생동감 넘치는 외침, 중독성 있다. 랩처럼 리드미컬한 게 나중에 생각날 것 같다. 바야모! 바야모! 바야모! 까미욘은 금세 닭장차가 됐다. 몸을 구겨 한참을 멍 때리고 있는데 스포츠머리의 한 남자가 한 손에는 나무 판때기를, 다른 한 손에는 음료수 병뚜껑 3개를 반복적으로 움직이며 뭐라 말하고 있었다. 설마? 저건? 7살 때였던가? 달동네에서 살 때 아저씨들 다리 사이로 들어가 봤던 그 돈 놓고 돈 먹기? 그러고 보니 며칠 전에도 어떤 아저씨가 까미욘에서 분위기 전체를 술렁이게 만들었는데 지금 생각해보니 둘 다 야바위꾼이었네.


목사보다 진지한 눈빛, 스페인어를 전혀 못 알아듣는 우리마저 빠져드는 저 번들거리는 혀! 대단하다는 말을 속으로 중얼거리며 난 바람잡이를 찾기 위해 차 안을 두리번거렸다. 목사남의 긴 연설이 끝나자 잠시 후 빨간 모자 아저씨가 갑자기 흥분하면서 돈을 걸었다. 빨간 모자 당첨! 그런데 연기가 왜 이렇게 어설퍼. 연기에 기승전결이 있어야지. 바로 흥분하니까 완전 티 난다.


빨간 모자는 콩알만 한 밀가루 공이 있다고 생각하는 음료수 뚜껑에 돈을 걸었고 정해진 시나리오대로 돈을 잃기 시작됐다. 목사남이 약 올리듯 최대한 느리게 음료수 뚜껑을 돌리는데도 빨간 모자는 계속 틀렸다. 그들은 이런 식으로 선량한 사람들의 욕망에 불을 지폈다. 너무 쉽지 않아? 어서 우리 돈을 가져가! 이건 거의 거져라고! 이곳에 돈을 걸면 모두 당신 거야! 어서!라고 말하듯.


내 앞에 앉아 있는 밀짚모자 아저씨가 내 눈 앞에서 검지 손가락을 좌우로 흔들며 우리에게 하지 말라는 신호를 보냈다. 그리고 잠시 후 그가 돈을 걸더니 밀가루 공이 들어간 음료수 뚜껑을 맞추기 시작했다. 두 번째 바람잡이 당첨이요! 하마터면 나도 속을 뻔했네. 연기 잘하네 밀짚모자! 학원 차려도 되겠어! 야바위꾼들의 실체가 확인되자 한 편의 연극을 보는 거 같았다. 목사남은 선 채로 판때기 위에서 3개의 뚜껑을 돌리고 빨간 모자는 과장되게 얼굴을 붉히며 돈을 잃고, 밀짚모자는 싱글벙글하며 돈을 땄다. 그러던 중 50개 중반으로 보이는 흰수염 아저씨가 돈을 걸기 위해 주머니에 손을 넣더니 돈다발을 꺼냈다. 세 명의 눈 빛이 하이에나처럼 빛나는 순간이었다.


야바위꾼들은 이때다 싶어 신들린 듯 연기에 몰입했고 흰수염은 돈다발을 만지작 거리다 아무래도 느낌이 이상했는지 돈다발을 다시 주머니 속에 집어넣었다. 밀짚모자는 흰수염에게 갑자기 알아들을 수 없는 말로 소리쳤고 흰수염은 “노노노”라고만 했다. 야바위꾼들 거의 다 잡은 고기를 놓친 사람들처럼 한동안 입맛을 다시며 식식거리더니 다음 정류장에서 쪼르르 내렸다.


3시간 반 만에 바야모에 도착해 트리니다드행 까미욘을 알아봤다. 아쉽게도 여기도 트리니다드행 까미욘은 없었다. 대신 트리니다드에서 60~70km 떨어진 산티 스피리투스 근처까지 간다고 하면서 그곳에 가면 트리니다드로 가는 택시와 비아술 버스가 있을 거라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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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후 2시. 산티 스피리투스행 까미욘은 저녁 6시 출발. 4시간 동안 뭐하지? 문득 비아술 버스가 생각났다. 시간도 깨울 겸 정보도 알아볼 겸 비아술 사무실 쪽으로 걸어갔다. 그 앞에서 문을 열고 들어가는데 아~~~ 이건! 아련하게 잊고 있었던 그러니까... 에어컨 바람!이다. 에어컨 바람이 이렇게 시원했구나! 이렇게 시원했어! 동태가 되고 싶다. 동태가 되고 싶다. 밖은 쇠도 녹일 더위인데 이 사무실 안은 비현실적으로 시원하네~


직원에게 물어보니 바야모에서 떠나는 차는 까미욘보다 3시간 느린 저녁 9시. 트리니다드까지는 10시간 걸리며 가격은 1인당 26쿡(26달러). 머리 속에서 계산기 튀어나와 열심히 덧셈 뺄셈을 했다. 음...까미욘이 훨씬 싸네. 결론 나왔네. 까미욘 타는 걸로~ 그런데 문제는 이 미치도록 시원한 에어컨 바람이었다. 바람이 어찌나 시원하고 당당하던지 방금 전에 내린 결론은 봄바람에 흔들리는 꽃처럼 갈피를 못 잡고 마구 흔들렸다. 어쩌지? 비현실적으로 시원한 에어컨 바람을 맞으며 트리니다드까지 갈까? 갈까? 진짜 갈까? 아니다! 우린 관광객이 아닌 여행자가 되려고 까미욘 탄 건데 이 시퍼런 에어컨 바람에 흔들리면 안 된다. 정신, 차려야 한다. 아내와 상의한 끝에 처음 생각대로 까미욘을 타기로 하고 사무실 직원에게 배낭을 돌려받은 뒤 우린 문을 열고 불길 속으로 걸어갔다.


예정대로 까미욘은 6시에 출발했다. 음악소리, 대화 소리, 바람소리, 거친 차 엔진 소리는 어둠이 깔리지 자장가처럼 들렸고 우린 까무룩 잠들어 버렸다. 몇 시간이 지났을까? 귓가에 "산티 스피리투스! 산티 스피리투스!"하는 소리가 점점 크게 들렸다. 눈을 떠보니 차장이 유독 큰 흰자를 보이며 우리에게 고래고래 소리치고 있었다. 난 도둑질을 하다 걸린 사람처럼 허둥대며 아내를 깨우고 배낭을 메고 까미욘에서 내렸다. 그리고 냉정하게 떠나가는 까미욘 뒤를 한 동안 멍하니 쳐다봤다.


새벽 12시 30분. 어딘 어디지? 주위는 온통 검은색으로 칠해 놓은 것처럼 컴컴했다. 주위는 세 개의 길 뿐이었다. 하나는 아바나로 향하는 길, 또 하나는 산티아고 데 쿠바로 향하는 길 마지막 하나는 산티 스피리투스 향하는 길. 차장에게 몇 번이나 확인했는데 결국 산티 스피리투스에서 19km 떨어진 이 이름 모를 고속도로 한복판에 우리를 내려줬구나! 막막해서 무심코 하늘을 봤는데 수많은 별들이 ‘반짝반짝 작은 별’ 노래를 부르고 있었고 달은 보름달 같은 얼굴을 하고 방긋거리고 있었다.


멘붕이다. 정말 앞이 캄캄하다. 뭘 해야 할지 아무것도 생각나지 않는다. 잠시 동안이지만 꿈일 거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내 앞에 펼쳐진 검은색보다 더 검은 어둠을 보자 현실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달아, 별아! 우린 지금 완전히 길을 잃었어! 좀 도와줘! 제발~ 잠깐이지만 배낭을 메고 산티 스피리투스까지 걸어가 볼까도 생각했지만 어둠의 끝판왕 같은 길이었다. 저 길을 걸어가면 1분도 안돼서 우리 몸이 어둠 속에서 모두 지워지거나 저 묵직한 무게에 힘없이 깔려버릴 것만 같았다. 우린 어둠 속에 갇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