쿠바, 트리니다드
아내와 함께 합창하듯 어떡하지? 어떡하지? 하고 있는데 저 멀리, 흐릿한 뭔가가 보였다. 무작정 그곳으로 걸어갔다. 가까이 갈수록 그 흐릿한 것이 사람이라는 것을 알게 되자 나도 모르게 발걸음이 빨라졌다. 짧은 머리에 오른쪽 어깨에 노트북 가방을 메고 있는 그는 쿠바인이었다. 우린 벙어리처럼 그 앞에서 눈을 껌벅거렸고 그는 뭐지? 하는 표정을 지었다. 하긴 외국인이 그것도 동양인 커플이 경부 고속도로 한복판 같은 곳에서 배낭을 메고 있는 게 정상은 아니지. 우린 까미욘 타고 여기까지 왔다는 말을 하기 위해 산티아고 데 쿠바, 바야모, 산티 스피리투스, 까미욘, 부릉부릉 단어를 차례대로 나열한 후 손으로 발 밑을 가리켰다. 그는 풋! 하고 짧게 웃더니 잠시 후 한참을 웃었다. 그의 웃음은 우리에게 안도와 감사함을 전달했다.
그런데 이 아저씨는 이 새벽에 여기서 뭐 하고 있는 거지? 그는 내 생각을 들은 것처럼 차가 지나갈 때마다 크게 손을 흔들었다. 아! 히치 하이킹하고 있었구나! 그런데 이 새벽에? 대단하다. 10분 후 우린 그 아저씨 덕분에 특수 면허증이 필요해보는 집채만 한 트럭 조수석에 앉을 수 있었다. 벙어리처럼 입을 꾹 다물고. 기사는 우리에게 신기한 눈빛을 만들며 대화를 시도했지만 쿠바 아저씨가 스페인어를 전혀 못하는 것 같다고 설명해주자 기사는 말없이 경쾌한 음악을 틀었다.
조수석에 본 도로는 어둠의 끝판왕답게 완전한 어둠이었다. 머리에 헤드랜턴을 쓰고 검은 물감 속을 헤엄치는 기분이랄까? 트럭은 30분 만에 산티 스피리투스에 도착했다. 우린 운전기사와 쿠바 아저씨에게 연신 ‘그라시아스’를 외치며 작별인사를 했다. 그들이 아니었으면 19km나 떨어진 이곳을 어떻게 왔을까? 걷는 것이나 택시 타는 것은 말도 안 되고… 결국 우리도 히치하이킹을 시도했을 것이다. 운 좋게 히치하이킹을 했다고 치자! 그런데 운전자가 우리가 스페인어를 전혀 못하는 것을 알았을 때 어둠보다 무거웠을 그 침묵을 서로 감당할 수 있었을까?
생각하고 곱씹을수록 그 쿠바 아저씨가 고마웠다. 미션이 너무 어려워 게임을 포기하고 중국집에서 배달 온 짜장면 곱빼기를 괴걸스럽게 먹고 있는데 사기 캐릭터가 갑자기 튀어나와 눈 깜짝할 사이에 미션을 대신 클리어 시킨 기분이랄까? 그러나 우리 여정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트리니다드까지 가야 하는 최종 미션이 남아있다. 새벽 2시. 배낭을 메고 터덜터덜 터미널로 걸어 들어갔다. 예상한 대로 그곳에 까미욘은 없었다. 현지인들에게 ‘트리니다드’를 말하자 하나같이 택시를 타거나 비아술 버스 타라고 했다. 여기서 트리니다드까지는 약 60~70km. 비아술 버스가 언제 오는지 알아보기 위해 매표소에 갔다. 그 안에는 비이술 유니폼을 입은 아저씨가 맨바닥에서 코를 골며 자고 있었다. 어이없는 웃음이 나왔지만 솔직히 그 아저씨가 행복해 보였다.
터미널 밖에 나와 주변을 둘러보는데 문득 모든 것이 낯설게 느껴졌다. 쓰레기가 가득한 대합실 안에서 ‘개똥 밭에 굴러도 이승이 좋아!’를 온몸으로 표현하며 바닥에서 뒹구르며 자고 있는 아저씨, 화려하게 치장한 몸으로 이 새벽에 수다를 떨고 있는 수술 전의 트랜스젠더들, 성대 절개했는지 오른손에 전자 막대기를 목 부근에 갖다 대며 요상스러운 기계음으로 말하는 아저씨까지. 여긴 어디지? 달나라에 내린 건가? 아니면 까미욘 타고 오다가 교통사고 나서 죽은 건가? 이곳이 이승인지 저승인지 오락가락하다. 그런데 이 당황스럽고 졸린 상황에 산티아고 데 쿠바에서 봤던 콧수염을 기르고 다니던 이쁘장한 여자들은 왜 생각나는 걸까? 여자가 콧수염이 나는 것도 신기한데 그걸 기르고 자신 있게 거리를 활보하는 기분은 어떤 걸까? 남자 친구가 뽀뽀하다가 이러는 거 아닐까? “허니? 오늘 면도 좀 해야겠는걸? 제법 따까워!”
배낭을 잡고 있는 손에 힘이 풀릴 때쯤 비아술 아저씨가 '나 피곤해!' 얼굴을 하고 터미널 주변을 돌아다녔다. 그는 버스가 6시에 도착한다고 했다. 지금이 새벽 3시니까 3시간만 더 기다리면 된다. 이때 혜성처럼 등장한 택시기사. 타이밍 죽이네! 안 그래도 여긴 택시 없나?라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눈 앞에 거짓말처럼 딱 등장하네. 생각만 하면 다 이루어지는 세상, 이곳은 바로 쿠바다!
흥정을 시작했다. 그는 둘이 합쳐 15 쿡을(15달러) 불렀다. 생각보다 좋은 가격이었다. 그러나 지금 택시를 타고 트리니다드에 가기에는 너무 이른 시각이었다. 꼭두새벽부터 문을 두드리며 방을 찾을 자신이 없었다. 날이 밝을 때까지 좀 더 기다려야 했다. 고개를 떨구며 눈이 계속 감길 때쯤 새로운 인물이 등장했다. 그는 키 185cm 정도에 몸 좋아 보이는 20대 초반의 흑인 청년이었다. 그는 자신이 프랑스 사무실에서 일한다며 굳이 ID까지 보여주며 영어로 끊임없이 수다를 떨었는데 그 모습은 마치 깊은 새벽에 지랄탄 터지는 광경 같았다. 우리의 반응이 뜨드 미지근하자 그는 안 되겠는지 툭! 본론을 꺼냈다. 그러니까 1명에 6쿡, 비아술 버스와 동일한 가격으로 택시를 타고 가지는 말이지? 너는 트리니다드에 사는 주민이고… 풉풉풉. 주민 좋아하시네. 네가 그 동네 주민이면 난 쿠바 대통령이다. 딱 봐도 삐기인데 어디서 수작이야!
우리가 말없이 졸린 눈으로 그를 가만히 보고 있자 그는 일단 후퇴했다. 그리고 얼마 후 그는 다시 오더니 정신없이 입을 놀리면서 산티아고 데 쿠바 숙소 주인, 글로리아가 준 명함을 보여달라고 했다. 난 아내에게 보여주지 말라는 신호를 보냈다. 그러다 브라질 여행 때가 떠올랐고 어쩌면 그가 이 깊은 새벽에 선행을 베풀려고 이러는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아주 조금 들었다. 난 명함을 보여주며 전화를 해달라고 부탁했다.
그는 전화를 걸었고 우리는 졸린 눈을 비벼가며 귀를 쫑긋 세웠다. 그의 입에서는 산티아고 데 쿠바와 글로리아 단어가 흘러나왔고 잠시 후 전화를 끊었다. 그러더니 우리를 보며 자신 있게 “오케이!”라고 외쳤다. 오케이? 뭐가 오케이라는 거지? 우리 작업을 다 했다고 스스로한테 말하는 건가? 그가 정말 원하는 것은 뭘까? 택시비는 1인당 6쿡으로 비아술과 동일하고 버스보다 훨씬 빠르다. 전화도 해줬다. 이 안에서 그가 얻을 이익은 택시기사와 택시비를 나누는 것 밖에 없다. 그런데 나눌 금액도 커 보이지 않는다. 뭘까? 뭐지? 진정, 선행인 건가? 그런데 그를 따라가는 것은 분명 위험한 일이라고 직감이 말하고 있다. 직감이 경계하고 있다. 트리니다드에 도착하자마자 분위기가 이상해지면 그와 바이~ 하면 거다. 그러면 되는 거다.
택시를 탔다. 운전기사를 보니 아까 흥정에 실패한 기사였다. 삐끼 맞았네. 뭘 그러면서 불어 한다고 ID 보여주고 생쑈를 하기는… 그런데 졸리다. 눈꺼풀 무게가 배낭보다 훨씬 무겁게 느껴진다. 자면 안 되는데... 살짝 눈을 감았다 떴는데 벌써 트리니다드였다. 어라? 그런데 뭔가 이상하다. 우리가 숙박할 집은 시내에서 좀 떨어진 변두리였는데 여긴 딱 봐도 현지인들이 사는 지역이다. 불안한 마음에 아내에게 명함을 달라고 했다. 그런데 아내는 주소를 알려주기 위해 명함을 기사에게 줬다고 했다. 아니 그걸 주면 어떡해! 우리 최종 목적지인데… 사진도 찍어놓지 않은 거야? 어. 우리가 그러는 사이 기사는 흑 청년에게 명함을 주고 도망치듯 새벽 안갯속으로 사라졌다. 난 그를 똑바로 쳐다보며 명함을 달라고 했다. 그는 나에게 진정하라고 조금 있다가 숙소에 가서 줄 테니 일단 가자고 말했지만 난 얼음처럼 굳은 채로 그를 쳐다봤다.
새벽 공기보다 훨씬 찬 공기가 둘 사이에 만들어졌다. 눈 한번 깜빡이자 내 양손에 글러브가 끼워져 있었고 다시 한번 깜빡이자 그가 마우스 피스를 물고 비열하고 웃으며 링 위에 올라오라는 신호를 보냈다. 이제야 본색을 드러내는군. 그래 끝까지 가보자. 너의 속셈이 모두 밝혀지는 순간 넌 링 위에서 죽는다! 그가 우리를 데리고 간 곳은 언뜻 봐도 일반 가정집이었다. 그는 그 집에서 자고 있는 남자를 억지로 깨우며 실제 숙소는 다른 곳에 있다고 둘러댔다. 그러면서 소파에서 앉아 좀 쉬라고 하면서 방금 일어난 그 남자에게 명함을 슬쩍 건넸다. 명함은 기사에서 흑 청년으로 다시 졸린 남자 손으로 들어갔다. 결국 이거였나? 우리를 자신이 아는 일반 가정집에 재워 주는 대가로 집주인에게 수수료를 챙기는 것! 이곳은 산티아고 데 쿠바 숙소 주인인 글로리아가 추천해준 집이 아니다. 증거는 부족하지만 직감이 말하고 있다. 소파에 앉아 잠시 눈을 감고 머리 속의 기억을 2시간 전으로 되돌려 빠르게 재생시켰다.
그랬구나! 흑 청년이 전화할 때부터 잘못된 것이었구나! 산티아고 데 쿠바, 글로리아는 우리가 믿도록 의도적으로 내뱉은 단어들이고 실제는 자신이 아는 일반 가정집에 전화 거구나! 방심했다. 난 벌겋게 충혈된 눈으로 아내에게 나가자고 말했다. 흑 청년은 우리의 예상치 못한 빠른 반응에 지금 숙소에 가자고 했다. 5분 만에 도착한 집에서 나온 사람은 30대 중반의 여자였다. 그는 그녀에게 우리를 성급히 소개시켜주고 새벽안개처럼 빠르게 사라졌다. 난 배낭을 멘 채로 그녀에게 산티아고 데 쿠바 글로리아를 아냐고 영어로 물었다. 그녀는 무미건조한 표정을 하고 “노”라고 답했다. 내 마음속에서 직감이 자신이 맞았다고 호들갑을 떨었다. 그놈이 사라지기 전에 뭐라도 했어야 했는데… 분하다. 그리고 억울하다.
모든 것은 호기심과 스페인어의 무지로 인해 시작된 결과였다. 그 덕분에 최종 목적지를 잃어버렸고 흑 청년은 그간 들였던 노력이 허사로 돌아갔다. 승자 없는 싸움이었다. 우린 패잔병 같은 얼굴을 하고 눈에 보이는 숙소에 들어가 짐을 풀었다. 숙소 주인 로날드는 우리가 체크인하자마자 폭포수가 어떻고 말 타는 게 어떻고 국립공원이 어떻고 하면서 데일리투어를 열심히 설명했다. 로날드! 미안한데 우리 정말 졸려. 이따가 하면 안 되겠니? 1년 같은 하루를 보냈다고! 말하고 싶었다. 그러나 그럴 힘도 그럴 언어능력도 없었다. 침대에 기절해 2시간 만에 용수철처럼 튀어올라 허기를 채우러 나갔다. 우리가 간 곳은 랍스터 식당. 가격은 6천 원 정도로 한국에 비하면 엄청 싼 편이었다. 난 랍스터, 아내는 닭고기를 시켰다. 랍스터는 예상보다 컸다. 평소 같으면 바로 잡고 뜯어먹었을 텐데 지금은 그럴 수가 없었다. 이 설명할 수 없는 울컥거림과 코끝 찡한 감정은 뭐란 말인가?
배고픈 내가 불쌍해서? 아니면 어제오늘 개고생 해서? 그것도 아니면 40년 넘게 설면서 식당에서 랍스터 한번 먹어보지 못해서? 허기와 함께 목구멍으로 올라오는 뜨거운 감정을 억지로 추스르며 랍스터 한 점을 뜯고 씹었다. 이런 맛이었구나! 새우보다 쫄깃하고 감칠맛 나는. 난 왜 여태껏 식당에서 랍스터 하나 사 먹지 못했을까? 돈이 없어서 그런 것도 아니었는데... 저녁에 야외 공연을 보고 숙소로 돌아와 모처럼 침대에 편하게 누웠다. 이틀 동안 내 감정은 롤러코스트였다. 웃다가, 화나다가, 슬펐다가, 기뻤다. 이게 다 모두 까미욘 덕분이다. 당분간 내 머리 속에 ‘까미욘’은 여러 번 밑줄 친 단어로 기억될 같다. ‘쿠바’와 함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