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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월세부부 Oct 11. 2020

내 마음을 닦아준 까만 눈동자

조카 백일잔치

당신 혹시 잊어버린 것은 없어요?

헉! 조지아 와인 안 가져왔네!

하하. 어여 가져와요. 아 그리고 올 때 마카롱두요.

오케이~


마카롱은요?

헉! 택배 아저씨 전화받다가 마카롱 가져오는 것을 까먹었네요.

헉! 그 5분도 안 되는 사이에 까먹었다고? 당신도 이제 내가 챙겨줘야겠네. 하하.


오늘은 친동생 아기 백일이다.

동생과 제수씨는 2세를 가지기 위해 몇 년 간 부단히 노력했다.

좋은 음식 먹고 병원 다니고 운동하고 그렇게 몇 년이 흘렀고 드디어 제수씨가 작년에 조카 유빈이를 임신했다.

제수씨는 임신 초기 때부터 조심하고 또 조심했다.

그리고 출산.

제수씨는 이쁜 딸을 낳았다.

동생과 제수씨는 고민 끝에 아기에게 '유빈'이라는 이쁜 이름을 지어줬다

난 졸지에 큰아버지가 됐지만 코로나 때문에 사진으로만 조카 얼굴을 볼 수밖에 없었다.

오늘은 유빈이를 직접 눈으로 보고 만져볼 수 있는 그런 백일잔치다.


약속시간에 딱 맞춰 나왔다고 생각했는데 집 앞에서 와인과 마카롱 선물을 챙기느라 시간이 뭉텅이로 날아갔다.

서둘러 버스 승강장에 가 전광판을 보니 우리가 타려고 하는 버스는 '정보 없음'으로 나왔다.

우린 이때만 해도 앞으로 벌어질 감정의 롤러코스트를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


한참만에 버스를 탔다.

버스 안에서 수시로 카카오 맵을 보며 현재 도로 상황과 남은 거리를 확인했다.

버스는 강남순환로를 시원하게 달렸다.

그러나 그건 잠시 뿐.

버스가 양재에 들어서자 서행을 반복했다.

아. 여기서 상일동은 아직 한참 멀었는데...

이미 동생네 집에 도착한 어머니께 30분 정도 늦겠다고 카톡을 보냈다.

버스 앞에 길게 늘어선 차들을 보자 마음이 조급해지기 시작했다.


난 약속시간에 늦지 않는 편이고 상대방이 늦는 것에 관대한 편이다.

그런데 난 오늘 백일잔치에 늦을 것 같다.

동생과 제수씨가 최소 한 달 전부터 준비했을 그 백일잔치에 말이다.


버스를 타는 것이 아니었어.

전철을 3번 갈아타도 정확하게 도착하는 전철을 탔어야 했어.

아냐. 와인과 마카롱은 다음에 주더라도 서둘러 버스를 탔어야 했어.

아니다. 좀 더 일찍 나왔어야 해.

그것도 최소한 30분, 아니 넉넉하게 1시간은 일찍 나왔어야 해.

무슨 생각으로 아침에 그렇게 느긋했을까! 바보같이.

이런 게 큰아버지라니.

하늘은 파랬고 내 마음은 불안과 초초로 더욱 새파래졌다.


오빠. 차라리 여기서 내려서 전철 타고 갈까요?

그래요. 여기서 내립시다.

그리고 전철 말고 택시 타고 가요. 이러다 정말 많이 늦겠어.

그래요.


버스 승강장에 내리자마자 뛰다시피 해서 택시를 잡아탔다.

기사님에게 목적지를 이야기하고 카카오 맵을 뚫어져라 보면서 마음속으로 기도했다.

제발 빨리 가달라고.

그러나 내 기도와는 달리 도로는 차들로 꽉 막혀있었다.

아내 말대로 전철을 탔어야 했나?

잔꾀 부리다 도로에 완전히 갇혀버렸네.


마음이 조급해지고 초초해지자 난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택시 안의 공기는 터지기 일보 직전 풍선처럼 팽팽해졌고 무거웠고 불편했다.

아내 또한 마찬가지였다.

기사님에게 좀 더 빨리 가 달라는 말이 혀끝에서 맴돌았지만

기사님도 눈 앞에 거북이처럼 서행하는 수많은 차들을 보며 할 수 있는 일은

고작 핸들을 꽉 잡는 것뿐이었다.


오랫동안 기다린 교차로 신호가 드디어 파란불로 바꿨다.

그런데 예상과 달리 앞차들이 그대로 멈춰 있었다.

무슨 일인가 해서 뒷자리에서 고개를 쭈욱 빼고 교차로 쪽을 보니 거대한 트럭 하나가 직전 차량들을 정면으로 가로막고 있었다.

꼬리물기 제대로 했네.

차 한 대도 빠져나갈 수가 없도록.

앞차들이 비키라고 빵빵거리는 사이 신호등은 다시 빨간불로 바꿨다

약속시간은 이미 50분을 넘긴 상태.

초조는 우울로

우울은 자책으로

자책은 나에 대한 분노로 바뀌었다.


전철을 탔어야 했다.

최소한 1시간 일찍 나왔어야 했다.

이렇게 중요한 날에 깃털보다 가벼운 마음으로 나왔다.

동생과 제수씨는 지금 얼마나 애가 탈까?

난 큰아버지 호칭을 쓸 자격이 없는 사람이다.


내가 자책하고 분노할수록 마음속의 불길은 더욱 커졌다.

침착해야 한다.

이럴수록 더 침착해야 한다.

이럴 수도 있다.

난 오늘 이렇게 도로가 막힐 줄은 생각지도 못했다.

도착하면 동생과 제수씨에게 진심으로 미안하다고 사과하면 된다.


그렇게 혼자 속으로 중얼거리며 분노를 사그라뜨리고 있는데 전화가 울렸다.

동생이었다.


형. 어디야?

어. 이제 거의 다 왔어. 곧 도착해.

알았어.


동생은 어렸을 때부터 인내심이 많았고

가족을 포함해 남들에게 싫은 내색을 거의 하지 않는 편인데

오늘은 동생 목소리가 좋지 않았다.

전화를 끊고 나니 더욱 미안해졌다.


약속시간보다 1 시간 하고도 20분이 늦은 후 동생 집 문을 열었다.

동생과 제수씨는 우리를 보고 어정쩡하게 인사를 했고 우린 진심으로 미안하다고 말하며 신발을 벗는데 동생이 우리에게 소독약을 뿌리며 화장실에서 손을 먼저 닦으라고 했다.

비누로 열심히 손을 닦는 모습이 상황 때문인지 손을 빌고 있는 사람처럼 보였다.

미안해. 동생.


그렇게 깨끗하게 손을 닦고 거실로 가니 사진으로만 보던

조카 '유빈'이가 예쁘게 드레스를 입고 누워 있는 게 보였다.


네가 동생과 제수씨가 몇 년 만에 얻은 유빈이구나!

미안해. 유빈아.

오늘 일찍 오고 싶었는데 내가 오늘 정말 바보 같았다.

돌잔치에는 이 큰아버지가 가장 먼저 올께.


마음의 안정을 찾은 후 조심스럽게 유빈이를 안았다.

사진에서 느낄 수 없는 따뜻함이 느껴졌다.

유빈이 등을 내 무릎에 받친 후 정면으로 유빈이를 바라봤다.

유빈이의 까만 눈동자가 어찌나 맑던지 내 몸 전부가 비쳤다.

그 까만 눈동자를 한동안 보고 있자니 내 어린 시절이 사진처럼 슥슥 지나갔다.


그리고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내 옆에 앉아있는 어머니도 46년 전에 나를 낳고 내가 유빈이를 보듯이 나를 이렇게 봤겠지.

20대 초반 내가 잘나서 혼자 큰 줄 알았던 시기가 있었다.

돌이켜보면 어머니의 끊임없는 희생 덕분에 그렇게 성장할 수 있었는데...

지금 만약 20대 초반 나를 본다면 이렇게 한마디 해주고 싶다.

시건방 떨지 말라고. 너 혼자 큰 게 아니라고!


유빈이의 까만 눈동자는 치유의 힘이 있었다.

까만 바둑알 같은 눈을 바라보고 있으니 버스와 택시를 타고 오며 초초하고 불안하고

자신에게 화났던 감정들이 한순간에 사라졌다.

마법 같은 일이었다.

고마워. 유빈아.

그 까만 눈동자로 더럽혀진 내 마음을 구석구석 깨끗하게 닦아줘서.


고마워. 유빈아.

잊고 있었던 내 어릴 적 순수했던 마음 조각에 따뜻한 빛을 비춰줘서.


지금도 글을 쓰는 순간에도 아른거린다.

물보다 순수하고 맑은 유빈이의 까만 눈동자가.

건강하게 무럭무럭 자라길. 유빈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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