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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월세부부 Nov 01. 2020

행복은 하루 벌어 하루 사는 것

관악산 등산기

가을이다 보니 매주 등산이다.

2주 전에는 광교산, 저번 주에는 청계산, 오늘은 관악산에 가기로 했다.

네이버에서 검색해보니 날씨는 흐림.

나와 아내는 잠시 망설였지만 고작 비 때문에 등산 일정을 미루기에는

우린 세계여행을 하면서 멘탈과 내공이 너무 강해져 버렸다. 젠장!


김밥 3줄을 사서 가방에 넣고 출발!

과천 정부 청사역에서 나와 등산로 입구 쪽으로 가는데 나도 모르게 환호가 터졌다.

여름에 왔을 때는 온통 시퍼랬는데

누가 밤마다 나뭇잎에 정성스럽게 물감을 칠해 놓기라도 한 건가?

노란색, 갈색, 빨간색 제 각각 모두 이쁘다.

인간이 아무리 이쁜 색을 만들어도 자연 앞에서는 그냥 겸손해지는구나!

등산로 입구에 들어선 지 얼마나 됐을까?

가랑비는 굵어지고 우리의 숨소리도 거칠어졌다.

헉헉 대며 올라가다 보니 여름에 왔을 때 점심 먹었던 작은 공터가 나왔다.

배꼽시계 정확하네. 여기 도착하니까 배고프다.


마녀김밥, 생각보다 맛있네요. 짜지도 않고.

이 마녀김밥은 식감에 에지를 줬나 보네. 일반 김밥에 들어간 튀긴 게맛살이나

멸치 김밥에 들어간 멸치도 그렇고.

와그작 와그작 씹는 게 즐거운 게

우리가 좋아하는 고봉민 김밥과는 또 다른 맛이네.


자리를 털며 아내에게 다음 산행 때는 보온병에 뜨거운 물을 담아 컵라면을 먹자고 제안했다.

아내는 웃었고 나도 웃었다.

우린 서로 왜 웃었는지 안다.

늘, 항상, 언제나 먹는 생각만 하는 나와 당신이 웃겼으니까.


어제 케이블 TV에서 이승기가 나와서 자신의 인생그래프에 대해서 이야기하는데

군대 가서 일상적인 고민할 때가 가장 행복했었다고 하더라구.

난 '내 여자라니까~ 내 여자라니까~’ 노래할 때가 인기가 가장 많아서

그때가 가장 행복했을 줄 알았는데...

참 그러고 보면 행복이라는 감정은 참, 주관적이고 개인적이야.

남들이 보기에는 행복할 것 같아 보여도 본인은 정작 반대인 경우가 있는 걸 보면.

그러게요.


가랑비가 완전한 굵은 빗줄기로 바꿨을 때쯤 연주암에 도착했다.

한 등산객은 처마 밑 빗줄기를 바라보며 라면을 먹고 있었고

또 다른 등산 그룹은 삶은 계란을 안주 삼아 꿀떡꿀떡 막걸리를 들이켜고 있었다.


산에서 술 먹고, 노래 부르는 사람들은 많이 봤는데

오늘처럼 등산로에 앉아서 떡하니 담배 피우는 사람은 처음이야.

뭐 담배 피우는 호랑이라도 되는 건가?

그러게요. 아니. 무슨 생각으로... 그것도 정말 떳떳하게.

나도 좀 당황스러워서 지나가면서 한마디 했잖아요.

여기서 담배 피우면 안된다구.

그 아저씨 건성이지만 '미안합니다'라고 말은 하더라구요.

아무튼, 완전 개념 없는 아저씨였어요.

맞아요. 반면교사로 삼기 딱 좋은 아저씨였어.


빗줄기를 가로지르며 관악산 정상 계단을 올라가는데

어제 TV에서 봤던 인생그래프가 다시 생각났다.


내 인생그래프를 그리면 어떤 모습일까?

이승기처럼 20대 초기에 고점 찍고 내려왔다가 다시 올라가는 그래프?

아니면 배성우 배우가 0.5초 만에 그린 것처럼 그냥 상승곡선?

그것도 아니면 이종 격투기 김동현 선수가 그린 것처럼 뽀쪽 뾰족한 그래프?

자세하게 그린다면 이승기나 김동현처럼 변동이 심했겠지만

누군가 멀리서 내 인생을 바라봤다면 배성우 배우가 그린 상승곡선이 가장 근접한 것 같다.

돌이켜보면 내 인생도 순탄치만은 않았었는데...


철 모르는 시절, 공고 들어가 돈 빨리 벌어 어머니 호강시켜드리려고 했는데

현실은 엘리베이터 회사 다니면서 버스에서 쌍코피를 흘리지 않나

전문대 나온 또라이에게 갖은 욕을 먹질 않나

하긴 그때 귀에 딱지 박히도록 들었던 고졸출신 '한' 때문에 대학원까지 나오긴 했지만

그때 그 시절 기억은 온통 흑백이다.

왜 가난하고 힘들었던 기억은 흑백일까?


또 생각난다.

법원에 어머니 개인파산 신청하려고 어머니가 직접 쓴 개인사를 읽다가

감정이 너무 복받쳐 미역국이 한동안 목구멍에서 내려가지 않았던 그 날.


연필로 썼다 지웠던 흔적, 자주 보이는 틀린 맞춤법,

띄어쓰기를 몰라 원고지 100페이지가 넘는 글이 하나의 문장으로 읽혔을 때

난 어머니께 아무 말도 못 할 정도로 미안하고 죄송했고,

자취방으로 돌아가 소주를 들이키며 주룩주룩 눈물을 흘렸었다.


그래도 아무리 힘들고 고단했어도 아내와 결혼한 것은

내 인생그래프에서 가장 빛났던 순간이었지.

5년 연애하고 결혼해서 악착같이 돈 모아 상가 사고 동시에 회사 그만두고 2년 반 동안 세계여행.

귀국 후 3년 공백이 무색할 정도로 둘 다 한 달 만에 재취업 성공!


누구 때문일까?

내가 잘나서? 그거슨 아니지!

1순위는 뭐 예상대로 무릎이 닳도록 항상 나를 위해 절하고 기도했던 어머니.

공동 1위는 두구두구두구~ 아내.


나와 8살 차이인 83년 돼지띠 내 아내.

복덩이이자 복돼지다.

아내와 결혼하고 난 후 안 되는 일이 없고 불행하다고 생각해 본 적이 단 한번 없다.

안다. 난 행운아다.


빗 때문인지 관악산 정상에는 사람들이 거의 없었다.

간단히 인증샷을 찍고 하산해 전철을 탔다.

내 바람막이 옷에선 물이 뚝뚝 떨어졌고

나를 묘한 눈빛으로 바라보는 아내는 물에 빠진 생쥐 같았다.

따뜻한 물에 샤워를 하는데 나도 모르게 콧노래가 흘러나왔다.


편의점에서 산 막걸리, 방금 부쳐 고소한 냄새가 올라오는 감자전.

<정희재 작가> 말대로 살아 보니 '행복은 하루 벌어 하루 사는 것'이었나 보다.

행복에 관한 한, 우리는 일용직 신세다.

내일 몫까지 미리 쌓아 두기 힘든 것, 그게 행복이다.


비록 소박한 막걸리와 감자전이지만 나와 아내는 여전히 행복하다.

앞으로도 주욱~

행복을 담을 수 있는 카메라가 있다면 바로 지금 이 순간이다.

찰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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