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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부 Oct 23. 2022

고요한 스몰 펍의 감자튀김

[0.25]

 아픈 걸 아프다 말하는 일은 생각보다 용기가 필요하다. 우는 건 더더욱 그렇다. 어른이 되고부턴 엄마 앞에서도 훌쩍거리는 게 영 부끄러웠다. 애인과는 ‘사귀자’라는 말을 시작으로 세상에서 가장 가까운 사이가 되었으나, 아픔을 말하는 데는 오랜 시간이 필요했다. 그래도 나름 관계가 깊어졌을 무렵, 한…1년쯤 됐을까? 서로를 만나기 전 일화들을 마구 쏟아내던 때도 있었다.

- 내가 이상하다고 생각했어.

- 에이, 아냐. 이해해. 다들 그럴걸?

 20년 동안 품어왔던 나름의 비밀 이야기들. 남에게 내놓기 부끄러운 이야기일수록 입 밖으로 냈을 때 가장 쾌감이 큰 법이다. 우린 놀이터 미끄럼틀 계단에 앉아서 다 식은 너겟과 찌그러진 맥주캔을 사이에 두고 세상에서 제일 우울한 사람이 됐다. 어른 둘이서 찌질하게 쭈그려 앉아 찔끔거리는 서로를 안아줄 땐 아주 그냥 세기를 대표하는 커플이었다.

 그럼에도 끝내 뱉어내지 못해서 가시처럼 목구멍에 박혀 뾰족하게 파고드는 이야기가 있었다. 사귀고 5년이 지나도록 삼키고 삼켜왔던 검은 이야기. 주로 밤에 힘이 세지는 괴물, 트라우마였다.     

 트라우마는 끈질기게 달라붙는 거머리 같은 괴물이다. 낮에는 징그러운 벌레를 보고도 ‘으으—끔찍해.’하고 넘길 수 있지만, 밤에 눈을 감으면 털이 우수수 달린 다리와 몸에서 빠져나온 진액마저 어둠 속에 떠다녔다. 낮에 ‘정상인’으로 충실히 잘 살다가도, 밤만 되면 ‘비정상인’이 되는 거다. 

 방아쇠는 시도 때도 없이 당겨졌다. 비이성적이고 과장된 두려움이 시도 때도 없이 나를 덮쳤다. 비 오는 캄캄한 날이면 나는 사람 하나 없던 골목길에서 살려달라 내달렸던 유치원생이었다. 왕따였던 시절 동창의 SNS 프로필을 마주하면 그날 밤의 나는 17살이었다.

 온갖 트리거가 내 발목을 붙잡고 수면 아래로 끌어내려 숨통이 끊어지지 않을 정도로만 살려뒀다. 한번 풀려버린 필름은 동이 틀 때까지 돌아갔고, 뇌가 지쳐 생각이 마비되고 나서야 잠에 들 수 있었다. 그런 날이면 난 꿈에서까지 ‘그날’ 속에 있었다.

 장성한 성인이 되고도 트라우마는 머리카락에 엉겨 붙은 껌처럼 질척이며 나를 힘들게 했지만 나이가 들수록 힘듦을 털어놓을 곳은 점점 없어졌다. 시간이 지날수록 주변인에게 트라우마는 내가 고통받는 어떤 것이 아니라 잊을 때도 된 오래된 일이 되었다. 힘들게 말을 꺼낸 들, 상대는 입을 오물거리다가 못내 하하, 웃고 말았다. 웃을 이야기가 아닌데 말이지.

 애인에게 내가 겪었던 ‘사건’을 말한 적은 있었다. 내가 비정상적으로 괴로워하고 일상에 어려움을 겪는 게 내 ‘이상함’이 아니라 ‘가해자’가 있기 때문이란 걸 증명하고 싶었다. 그런데 난 별 것 아니라는 듯 옛이야기를 꺼내놓곤 그 날밤에 눈물을 주룩주룩 흘렸다. 누군가에게 말을 꺼낸 것만으로도 지난날에 묻혀 있던 나를 구원한 것만 같았다. 그 뒤로도 숨이 턱턱 막힐 때면 해에게 옛이야길 툭 지나가듯 꺼냈고, 비로소 공기가 뇌까지 닿는 것만 같았다. 빠져나갈 수 없는 스노볼 세상 속에 살고 있는 것 같다가도 그의 이성적인 한마디면 세상은 가늠할 수 없이 드넓어졌다. 처음엔 해의 위로가 마냥 달았다. 그가 평소 입에 담지 않는 욕설로 가해자를 욕하면 그것만으로 마음속 응어리와 울화가 풀리는 기분이었다.

 그러다 어느 날 밤, 꿈을 꿨다. 난 17살이 되어 군중 속에 홀로 서 있었고, 그곳에 해도 있었다. 근데 그는 ‘제삼자’였다. 그와 나 사이에 유리벽이 있는 것처럼 그는 날 바라만 보고 있었다. 그는 트라우마 속에서 이방인인 것이다. 해가 뜬 낮에 그가 아무리 날 위로하고 곁에 있어도, 밤에는 날 구해주지 못했다. 그날의 내 옆엔 그가 없었으니까. 난 꿈을 직접 체험이라도 한 듯 땀에 뒤범벅되어 깨어났다. 살이 접히는 마디마다 땀으로 질척거렸다. 가위에 눌린 듯 딱딱하게 굳은 몸은 움직일 생각을 하지 않았고, 숨만 헐떡이며 꿈의 잔상을 쫓았다.

 생각해보면 내게 끔찍한 기억을 심어준 그들은 언제든 길을 가다가 마주칠 수 있고, 재미로 괴롭혔으니 심심풀이로 또 날 괴롭힐지도 모르는 일 아닌가?

 난 어느 순간부터 잠을 자지 않기 위해 안간힘을 쓰고 있었다. 눈을 감아도 내 안전을 위한 시뮬레이션을 끝없이 돌려봐야 했다. 왕따는 과거의 나를 증명할 수단이 없다. 시간이 지날수록 그나마 보관하고 있는 증거들마저 작동되지 않는 핸드폰 속에 잠들게 되고, 당시에 방관자였던 사람들이 내 편을 들어줄 리 만무하다. 그것이 날 공포스럽게 했다.

 스스로도 비합리적이고 과장된 두려움이란 걸 알고 있었다. 사실, 피해자임을 증명할 필요도 없었다. 지금의 난 위협받고 있지 않았다. 그럼에도 난 위축되어 있었다. 여전히 내 시간은 그날에 멈춰있었다.     

 눈덩이처럼 몸집을 키운 트라우마를 품고 사랑을 하기란 쉽지 않은 일이다. 항상 불안에 떠는 나 자신은 초라하기만 하고 한심하게 느껴지니까. 상대가 날 그리워한다는 것도 상상이 가질 않았다. 날 보고 싶다고 말해도 믿기질 않았다. 누군가 날 보고 싶어 한다고? 아닐 걸.

 트라우마에 깔린 나날들을 보내던 나는 해에게 생각만으로 남겨두었던 두려움을 말로 내뱉어버리고 말았다.

- 가해자들이 다시 날 찾아와서 해코지해도 너는 이방인일 뿐이야.

해는 어이없다는 듯 나를 바라보다가 기가 차서 말했다.

- 너 점점 이상해져 간다.

 난 사랑하는 연인의 입에서 나온 ‘이상하다’라는 말에 걷잡을 수 없이 눈물이 나왔다. 이해받지 못했다는 생각에 세상에서 가장 불쌍한 사람이 된 것만 같았다. 하지만 그때의 난 그에게 ‘이상한’ 사람이 맞았다. 난 그에게 ‘사건’을 말했을 뿐 ‘트라우마’를 고백하진 못했으니까. 영문도 모른 채 대뜸 애인에게 사랑을 의심당한 그가 화가 나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나름 변호를 하자면, 트라우마를 고백하는 일은 참으로 구질구질하다. 피하고 싶은 고백 중 원탑이다. 재미도 없는 과거 이야기를 늘어놓아야 하고 입술은 떨리고 눈물은 주체가 안돼서 눈은 3자로 퉁퉁 부어야 하고 어버버 히끅히끅 추한 소리를 내게 된다. 만일 내가 “무서운 영화를 보고 잠을 못 잤지 뭐야, 악몽을 꿔서 무서웠어.”라고 말했다면 좀 사랑스러웠을까? 그래도 이게 매일매일 반복된다면? 지긋지긋하고 귀찮지 않을까? 두려움의 이유를 늘어놓자면 끝도 없지만 그럼에도 애인에게 털어놓아야 했던 건 앞으로의 이해를 받기 위함이었다. 사실 난 이상한 사람이 아니니까.

 아니나 다를까 훌쩍이며 그간의 밤들을 늘어놓은 내게 그는 되려 사과해왔다. 이상하다고 화내서 미안하다고.

- 다신 그런 일 안 일어나. 만일 그렇다 해도 내가 곁에 있을 거야. 머릿속으로 끊임없이 최악을 생각하며 스스로를 괴롭히지 마. 이미 끝난 일이야. 괴롭겠지만, 쉽지 않겠지만, 이미 끝난 일이라고 생각날 때마다 되뇌어. 너만이 할 수 있는 일이야. 이만 보내줘.

 나는 시간이 지나도 스스로 ‘그날’이 끝났단 생각을 해본 적이 없었다. 왜냐하면 나는 여전히 괴로우니까. 혹은 끝났다 생각하기 싫다며 고집하기도 했다. 나는 아직도 괴로운데 누가 멋대로 끝내나 싶어서. 그럼에도 누군가 구원자가 있다면 나날이 이어지는 고통에서 날 구해줬음 했다. 그런데 해가 내민 해결책은 트라우마라는 영화의 엔딩 크레디트를 내려버리는 것이었다. 나는 벙 쪄서 한동안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그러고 보니 지금 날 괴롭히고 있는 건 누구지? 

 터무니없어서 울다가 웃다가를 반복했다. 나는 많이 아팠다고 해에게 말했다. 그러자 해는 나를 껴안고 되뇌었다.

끝났어.

끝났어.

끝났다, 끝났어.

 그가 외는 주문은 나를 과거에서 현실로 끄집어냈다. 꼭 마음이 평화로워지는 알약을 먹은 것 같았다. 젤리빈이나 엠앤엠 초콜릿을 약봉지에 넣어서 ‘기분이 좋아지는 약’이라던가 ‘행복해지는 약’이란 말을 써놓으면 약이 아닌 것을 알고 있음에도 힘이 나듯이….

 지금은 쏟아내고 쏟아낸 시간을 거쳐서 고요한 시간을 보내고 있다. 눈물 젖은 너겟보단 고요한 스몰 펍의 따끈한 감자튀김을 먹는다. 다 식은 너겟을 어두컴컴한 놀이터에서 이맛인지 저 맛인지도 모른 채 우물대지 않고, 파삭한 튀김의 식감을 즐긴다. 머릿속을 스치는 고민이라고 해봐야 감자를 시큼하고 고소한 랜치 소스에 찍어 먹을까, 역시 클래식이라고 할 수 있는 타바스코가 곁들여진 케첩에 찍을까 정도다. 해와 맥주를 마실 때면 깔깔 웃거나 아무 대화 없이 스몰 펍의 바깥 풍경을 바라보며 반짝이는 네온사인을 응시한다.

 아무 생각 없이. 아무 번민 없이. 아무 괴로움 없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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