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리석은 결혼은 하기 싫었다.
몇 해 전, 한 예능프로그램에서 일반인 신혼부부가 나와 길거리 토크쇼에 즉흥적으로 참여한 적이 있다. 순수하고 재치 넘치는 부부였는데,
"아내분이 어떨 때 가장 사랑스럽냐?"
라는 사회자의 질문에
"음... 잘 때요"
라고 답하던 남편의 말에 모두가 박장대소했었다.
남편은 곧이어 아내의 눈치를 봤고, 아내는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으며 똑같은 질문에 똑같은 대답으로 응수하며 귀여운 복수를 보여주었다.
미혼이었던 나는 그 장면을 보며 '잔소리 안 하고 조용히 지낼 때가 좋다는 말인가 보다'라고 생각했는데,
요새는 좀 다르게 의미를 부여하게 되었다.
그와 내가 고단한 하루를 끝내고
드디어 평온의 시공간으로
안전하게 접어들었다는
그 감사함.
보통은 잠들기 어려워하는 내가 먼저 침실에 들어가고, 신랑은 내가 코를 골며 딥슬립 할 때 비로소 까치발을 내리고 침실로 들어온다.
그래서 나는 그가 잠든 모습을 볼 일이 거의 없다.
그날은 둘이 좋아하는 축구 예능을 다 보고, 우리가 함께 잠자리에 든 밤이었다.
내가 머리맡 램프를 켜고 일기를 쓰는 동안, 그는 밤인사와 동시에 양압기를 쓰고 이내 잠을 청했다.
한 1분 정도 지났을까. 그가 기다란 오른팔을 내쪽으로 뻗어 더듬거리며 내 손을 찾았다.
일기를 다 쓰고 베개에 얼굴을 묻으며 램프를 끄려다가, 그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그리고는 램프를 끄지 않고, 여전히 내 손을 기다리고 있는 그의 손에 내 손을 건네주었다.
그는 커다란 손으로 내 손을 완전히 감싸 쥐었다.
따뜻했다. 포근했다. 평온했다.
그의 얼굴을 다시 바라보았다.
아득했다. 애틋했다. 안쓰러웠다.
왜 아득한 기분이 들었을까.
그와 나의 간격은 불과 80cm 밖에 되지 않는데.
잠에 예민한 나는 그와 매트리스를 따로 쓰고 있는데 그 덕에 그의 잠든 모습을 조금 떨어져서 보게 되었고, 이런 일방적 관찰이 참 생경하면서도 일순간 뭉클한 감정이 일었다.
그리고는 노래가 떠올랐다.
윤상이 부른 오래전 노래.
새벽을 나는
고단한 그대 날개
낯선 어느 동산에서
무거웠던 하루
내려놓고 한숨 돌리렴
(중략)
세상이라는 무게
거칠기만 한 세상
여기 있는 내게
그대 무겁게 한 그 짐을
내게 다 내게
주오
내 인생에 남편이라는 존재가 생겼다는 사실이 신기하고 믿기지 않는 때가 가끔 있다.
미혼 시절의 내 모습이 아직 내 머릿속에 일부 남아있어, 지금의 현실과 괴리가 느껴지는 탓일 거다.
결혼했다는 사실이 어떨 땐 엄청난 공포감으로 다가와 나를 질식시키는 것 같기도 하고, 또 어떨 땐 무한한 축복과 경외, 선물처럼 다가오기도 한다.
앞으로 내게 어떤 일이 일어날지 모른다는 점에서, 내가 생을 마감하기 전까지는 '결혼'에 대해 무어라 제대로 정의하지 못한 채, '결혼은 무모하다'와 '결혼은 축복이다'를 와리가리 반복하며 계속 저울질하게 될 것 같다.
하지만,
그가 잠든 모습을 보고 있는 지금,
단 한 가지만은 분명하다.
나는 그를 애틋하고, 안쓰럽고, 나의 많은 부분을 내어줄 수 있는 존재로 여긴다는 것.
그리고 내 손을 완전히 감싸 쥐고 있는 그의 손이 참 따뜻하다는 것.
'나의 별것 아님과
나의 초라함과
나의 못남을
내보일 수 있는 사람이
이 세상에
부모 말고 또 있을 수 있다면
바로 이 사람이다.'
그도 나와 같은 마음으로 나를 선택한 것이라면
참 좋을 것 같다.
이 밤,
그대, 모든 짐을 내게.
미숙한 글이지만 잘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D
금년도에 임신을 목표로 하고 있으니,
관련한 글이 또 올라올거에요.
좋은 봄 보내시고
다가올 여름도 잘 준비하시길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