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리석은 결혼은 하기 싫었다.
나는 김말이를 좋아한다.
불린 당면을 김으로 말아 밀가루를 묻혀 튀긴 음식.
분식집 가면 떡볶이는 남겨도 김말이는 다 먹는다.
어느 주말 아침, 집에 남은 잡채로 색다른 요리를 해주겠다며 신랑이 분주하게 주방으로 들어섰다. 나는 평일 내내 조여있던 나사를 풀고 조용히 책 읽으려고 작은 방으로 들어갔다.
서걱서걱 칼질하는 소리, 찰칵 가스불 켜는 소리, 1분 간격으로 반복 재생되는 레시피 영상 음성까지. 내가 있는 고요한 작은방과 달리, 문 바깥은 엔트로피가 점점 고조되어 가는 새로운 세계처럼 느껴졌다.
20분 정도 지났을 때 물을 뜨러 나가려고 문을 열자, 고소하게 퍼진 잡채 냄새가 나를 휘감았다. 방금 전까지 읽던 소설 때문에 눈물이 나올랑말랑 했는데, 냄새를 맡자 눈이 번쩍 뜨이고 군침이 싹 돌았다.
"T씨~ 뭐 만드는 거예요?" 하며 신랑에게 다가갔다.
"자기가 좋아하는 김말이 만듭니다~"
세상에나.
손이 두툼하고 커서 언뜻 투박해 보여도, 평소 나보다 훨씬 날렵하고 섬세하게 요리를 잘했던 신랑은 손바닥 위에 라이스페이퍼와 김, 당면을 올려놓고 터질세라 조심스레 돌돌 말고 있었다.
나는 그 모습이 너무 이쁘고 좋아서 뽀뽀세례를 퍼부었다.
"자기 정말 최고다!"
얼마 전 TV에서 들은 얘기다.
70대 주부가 어느 이혼전문 변호사 사무실에 찾아왔더란다.
"이혼하고 싶습니다."
자제들도 다 분가했고, 남편과 그래도 인생 마지막까지 더 사시는 게 어떻겠냐는 변호사의 만류에,
"엊그제 치킨을 시켜 먹었습니다. 나에게 치킨무 물을 따라버리고, 컵을 챙겨 오라고 시키더니, 그 사이에 남편이 닭다리 두 개를 홀라당 다 먹고 있었어요.
평생 그렇게 홀대받았습니다. 더 이상 같이 살고 싶지 않아요."
치킨은 또 사면된다. 할머니도 단순하게 닭다리를 드시고 싶었던 거라면.
근데 같이 사는 사람과의 문제는 그런 차원이 아니다.
한쪽 의견으로 자원과 할 일이 배분되고 불공정성이 생기면 의가 상한다.
한 번은 실수 또는 맞춰가는 과정으로 넘어갈 수 있다.
두세 번도 봐줄 수 있다. 시간과 기회를 주는 차원에서 너그러워질 수 있다.
근데 이게 시간을 지나 지속되면 마음이 상한다. '이게 맞는 건가' 자문하게 된다.
상해버린 마음을 다시 살려보려고 좋은 생각도 해보고, 좋은 글도 찾아보고, 배우자에게 인정과 존중을 받고자 내 선에서 최선을 다한다.
하지만 여지없이 상대방은 나를 실망시키고, 또 닭다리를 혼자 다 먹는다.
그래도 자식을 생각해 부모로서 살아보려 한다. 손주를 보며 마음을 달래 본다.
하지만 자꾸 가시가 박힌 듯 속이 답답하고, 멍이 든 듯 자꾸 속이 아린다.
지나온 세월이 무상하다.
좋은 기억 따위 사라진 지 오래다.
혼자 산책을 하고, 문화센터에 나가 사람들을 만나본다.
이런 삶도 괜찮구나. 짝꿍이 없는 삶도 나쁘지 않겠다는 용기가 생겨난다.
배우자가 먹는 것이 꼴 보기 싫다. 같은 공간에서 숨 쉬는 것도 아깝다.
배우자가 불쌍하지만, 몸져누워있느니 나부터 살아야겠다 싶다.
그래서.. 그녀는 70대에도 이혼을 마음먹은 것 아닐까?
나를 함부로 하고,
멋대로 명령하는 사람이 사라지도록,
내가 나에게 주는 선물.
이혼.
나는 홀대받기도 싫지만, 신랑에게 홀대받는 느낌을 주기도 싫다.
내 말에 웃어주길 바라지만, 나 또한 웃음과 인정에 박한 사람이 되고 싶지 않다.
가끔 수다쟁이 우리 신랑 얘기를 들어주다가 귀가 아플 땐 그런 생각도 한다.
'이 사람에게 세상에서 자기 얘기를 가장 잘 들어주는 단 한 사람이 있다면,
그게 내가 되어야 하지 않을까.'
그런 의식을 하다 보면
"그만 좀 해"라는 말보단
"아 정말?" 하며 맞장구 쳐주고 싶게 된다.
결혼식에서 선언한 혼인서약문은 조금씩 기억에 지워져 가고, 거실 한 틈에 놓인 웨딩촬영 사진은 어쩐지 색이 바랜 것 같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너에게, 너는 나에게
가장 좋은 사람이 되고 싶다는 그 마음은
아직, 살아있다.
김말이 같은 모습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