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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와 다른 모습이 만들어낸 덫으로 인해

주변의 사람들이 고통받고 떠나게 된다.

by 파사리즘

조직은 언제나 새로운 얼굴을 맞이한다. 신입사원, 경력직, 부서 이동으로 들어온 동료, 혹은 외부 전문가까지. 새로운 구성원이 자리를 잡기 위해서는 적응의 시간이 필요하다. 그러나 많은 경우 조직은 그 시간을 주지 않는다. 특히 첫인상이라는 강력한 프레임이 작동할 때, 그 사람의 진짜 역량이나 성향은 쉽게 묻혀버린다.


A씨는 대기업에 입사한 신입사원이었다. 학교 시절부터 성실함으로 인정받았고, 면접 과정에서도 꼼꼼하고 논리적인 답변으로 좋은 평가를 받았다. 그는 누구보다도 회사 생활을 잘하고 싶었고, 실수를 줄이기 위해 늘 준비했다. 하지만 입사 첫날부터 그는 중요한 선택의 기로에 서 있었다. ‘눈에 띄게 적극적으로 행동할 것인가, 아니면 신중하게 관찰하며 적응할 것인가.’ A씨는 후자를 택했다.


낯선 환경에서 무리하게 나서는 것은 오히려 실수의 빌미가 될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는 회의 자리에서 불필요한 발언을 삼가고, 상사의 지시를 충실히 따르며 주어진 업무에 집중했다. 스스로에게는 “말보다는 행동으로 보여주자”라는 원칙이 있었고, 실제로 맡은 프로젝트도 묵묵히 잘 수행해 나갔다.


그러나 조직이 그를 바라보는 시선은 달랐다. 몇 주가 지나자 동료들 사이에서 “저 친구는 너무 소극적이야”, “회의에서 의견도 잘 안 내고, 존재감이 없어”라는 말이 오가기 시작했다. 상사 또한 “열정이 부족하다”는 피드백을 은연중에 흘렸다. A씨의 조용한 태도는 곧 ‘비협조적’이라는 낙인으로 변질되었다.


여기서 중요한 점은, 그 누구도 A씨의 실제 성과를 문제 삼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는 정확하게 일을 해냈고, 보고서도 깔끔하게 작성했다. 문제는 그의 ‘태도’였다. 조직은 그의 신중함을 ‘무능’으로, 그의 침묵을 ‘소극성’으로 해석했다. 한 번 굳어진 첫인상은 쉽게 바뀌지 않았다.


시간이 흐르면서 A씨의 고민은 깊어졌다. "내가 말을 아껴서 문제일까? 아니면 조직이 나를 제대로 보지 않는 걸까?" 하지만 그는 끝내 답을 찾지 못했다. 어느 순간부터는 발언 기회조차 주어지지 않았고, 중요한 프로젝트에서도 제외되기 시작했다. 조직이 만들어낸 낙인은 그를 점점 고립시켰다.


앞서 살펴본 사례와 같이 첫인상은 강력하다. 심리학에서도 이를 ‘초두효과(primacy effect)’라고 부른다. 사람들은 처음 얻은 정보에 과도하게 의존하며 이후 정보를 왜곡해서 해석한다. A씨의 경우도 마찬가지였다. 신입사원이 조용하면 ‘소극적이다’라는 인상이 고착화되었고, 이후 그의 성실한 업무 성과조차 그 프레임 안에서 재해석되었다.


조직에서 이 효과는 더 위험하다. 구성원의 역량이 아니라 ‘이미지’가 평가의 기준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결국 첫인상은 개인의 성장을 막는 족쇄가 되고, 나아가 조직 전체의 인재 활용에도 심각한 손실을 초래한다.


많은 조직이 ‘적극적인 사람’을 이상형으로 내세운다. 발언을 많이 하고, 존재감을 드러내며, 상사에게 잘 보이는 사람이 유능한 인재로 평가받는다. 그러나 이는 절반의 진실일 뿐이다. 신중하게 관찰하고, 때를 기다리며, 묵묵히 성과를 내는 사람 역시 조직에는 반드시 필요하다.


하지만 현실은 다르다. 회의에서 침묵하는 직원은 ‘의견이 없는 사람’으로 낙인찍히고, 상사의 지시만 충실히 따르는 사람은 ‘주도성이 부족한 사람’으로 평가된다. 즉, 침묵은 곧 죄가 되고, 신중함은 무능으로 오해받는 구조가 형성되는 것이다.


A씨의 사례도 성과보다 태도가 우선되는 조직의 맹점을 드러낸다. 그가 맡은 일을 완벽하게 수행해도, 사람들은 그의 조용한 태도만 기억했다. 결국 그는 “함께 일하기 불편한 사람”이라는 평판을 떠안았고, 승진 기회에서도 밀려났다. 이는 개인의 문제가 아니다. 조직이 성과를 제대로 측정하고 피드백하는 시스템을 갖추지 못했기 때문이다. 보이는 행동만 평가하고, 보이지 않는 성과를 무시하는 조직은 결국 유능한 인재를 스스로 잃게 된다.


이 사례에서 빌런은 누구인가? 신중했던 A씨인가? 아니다. 진짜 빌런은 첫인상에 매몰되어 개인의 역량을 제대로 평가하지 못한 조직이다. 조직이 가진 고정관념, 집단적 시선, 그리고 단편적인 평가 방식이야말로 직원의 성장을 가로막는 주범이었다.


조직은 종종 사람을 탓한다. “저 직원은 열정이 부족해”, “태도가 문제야”라고 말한다. 하지만 정작 돌아봐야 할 것은 조직 문화 자체다. 새로운 구성원을 받아들이는 방식, 다양한 성향을 포용하는 태도, 성과를 객관적으로 보는 평가 시스템이 부족하다면, 그 조직은 스스로 빌런을 만들어내는 셈이다.


우리는 결코 같지 않다. 어떤 이는 적극적으로 나서서 리더십을 발휘하고, 또 다른 이는 묵묵히 뒷받침하며 조직을 안정적으로 만든다. 문제는 이 다름을 존중하지 않는 조직이다. 첫인상으로 모든 것을 재단하고, 목소리 크기를 역량으로 착각하며, 다양성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조직은 결국 같은 유형의 사람만 남게 된다. 그 결과, 조직은 단기적으로는 시끄럽고 화려할지 몰라도 장기적으로는 깊이를 잃고, 혁신을 멈추게 된다. 진정한 조직의 힘은 다양한 개성과 성향이 어우러질 때 나온다.


결국 빌런은 개인이 아니라, 첫인상에 매몰된 조직의 시선이었다. 그리고 이 시선은 누구든 피해자가 될 수 있다. 내일은 또 다른 신입사원이, 또 다른 경력직이 같은 낙인에 고통받을 것이다. 우리가 싸워야 할 빌런은 사람 자체가 아니라, 조직이 만들어내는 편견과 낙인의 구조다. 그 구조를 깨뜨리지 않는 한, 조직은 계속해서 유능한 인재를 잃을 것이고, 스스로의 가능성을 제한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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