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의 침묵이 무서운 빌런을 만들게 된다.
한 디지털 광고 회사의 마케터 L은 입사 초기, 팀의 한 구성원 T가 상습적으로 인턴에게 폭언을 퍼붓는 장면을 목격했다.
"이걸 일이라고 갖고 왔냐", "너무 멍청하니까 내가 더 힘들다."
말은 명백히 폭력이었고, 목격자는 여럿이었다.
하지만 모두가 바빴고, 어색했고, 침묵했다. T는 연차가 높았고, 실적도 뛰어난 직원이었다. 팀장은 이런 상황을 알았지만, 이렇게 말했다.
“조금 예민한 스타일이지만, 일은 잘하잖아.”
그리고 어느 날, 인턴은 출근하지 않았다.
L은 자책했다.
“내가 한마디만 했더라도 달라졌을까?”
하지만 그는 다음 인턴에게도 아무 말 하지 않았다. 이미 학습된 침묵이 그의 입을 막고 있었기 때문이다.
모두가 알고 있지만 말하지 않으면 그 잘못은 점차 정상이 된다.
회식 자리에서의 부적절한 농담
메신저에서의 무례한 말투
회의 중 특정인을 향한 반복된 비꼼
이 모든 것은 초기에 누군가 “이건 좀 불편하다”고 말했더라면 바로잡을 수 있었을 행동들이다.
하지만 말하는 사람이 없자, 잘못된 언행이 곧 조직의 분위기로 자리 잡는다. 공감은 사라지고, ‘이 정도는 참는 게 예의’라는 암묵의 룰만 남는다.
회사는 ‘성과를 내는 사람’을 우대한다. 문제를 제기하는 사람보다는, 문제를 참고 넘기는 사람을 더 좋아한다.
이런 분위기에서 누군가가 조직문화를 위협하는 행동을 하더라도 공감은 조용히 사라지고, 남은 건 ‘침묵 속의 관망자’들이다.
이 침묵은 결국 다음과 같은 메시지를 전한다.
“우리는 다 알고 있지만, 아무 일도 하지 않는다.”
그 침묵이 조직 전체의 도덕 기준을 무너뜨리고,
‘괜찮지 않은 일’을 괜찮은 것처럼 보이게 만든다.
공감이란 반드시 말을 해야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표정, 무언의 지지, 메시지 하나 만으로도
사람은 ‘나를 이해해주는 사람이 있다’고 느낄 수 있다.
하지만 빌런이 만든 침묵의 조직에서는
그 최소한의 공감조차 존재하지 않는다.
그 순간 피해자는 철저히 고립된다.
그리고 피해자는 외친다.
“왜 아무도 나를 이해해주지 않았나요?”
우리는 이러한 조직환경에서 일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살펴봐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