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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은 언제나 우리 안에 있었다.

당신의 옆에도 빌런이 존재한다.

by 파사리즘

“어떻게 저런 사람이 여태 조직에 남아 있었던 걸까?”

누군가의 퇴사 소식이 전해졌을 때, 혹은 한 사건이 벌어졌을 때, 우리는 종종 이런 질문을 한다. 하지만 더 정확한 질문은 이것이어야 한다.

“왜 아무도 그 사람을 제지하지 않았는가?”
“어떻게 그 사람은 ‘문제없는 사람’으로 살아남을 수 있었는가?”

빌런은 갑자기 조직에 나타나지 않는다. ‘불청객’처럼 툭 튀어나온 존재가 아니다. 그들은 조직 속 어디선가 조용히 자리 잡고 있었다. 처음부터 무례하지 않았고, 처음부터 독하지 않았다. 하지만 시간이 흐르며 조금씩 경계를 넘기 시작했고, 아무도 제지하지 않았고, 어느새 그것이 습관이 되었다.

그들의 존재는 언제나 ‘내부’에 있었다. 더 무서운 건, 우리 모두가 어딘가에서 그들을 ‘허용’했으며, 때로는 묵인했고, 때로는 방조했다는 사실이다.

빌런이라는 단어는 다소 극적인 인상을 준다. 무언가 명백히 악한 사람, 조직에 해를 가하는 명확한 행동을 하는 이들. 그러나 실제의 빌런은 그런 극단적인 형태로 다가오지 않는다.
그들은 대체로 평범한 사람의 얼굴을 하고 있으며, 친근하고, 때로는 실적도 좋고, 말도 잘하고, 윗사람과도 잘 어울린다.

그들의 행동이 ‘불쾌하다’, ‘부조리하다’고 느껴지는 건 바로 옆에서 일하는 사람들에게만 해당되는 이야기다. 문제는 그 고통이 수면 위로 잘 드러나지 않는다는 데 있다.
왜냐하면 고통받는 사람은 ‘예민한 사람’ 취급을 당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문제를 제기하면 오히려 관계를 더 어렵게 만든다는 구조 속에서, 사람들은 침묵을 선택한다.
그 침묵이 이어지는 동안, 빌런은 점점 자신이 무얼 해도 되는 사람이라고 확신하게 된다.

빌런은 그런 익숙한 구조 속에서 서서히 뿌리를 내린다. 즉, “처음부터 그런 사람”이 아니라, 그렇게 ‘자라난 사람’이다.


빌런은 마치 시스템의 예외처럼 보인다. “그 사람은 좀 특별한 케이스야”, “사람이 좀 별나서 그래”, “그거 그냥 성격 문제잖아.”
그러나 실상은 그 반대다. 빌런은 ‘예외’가 아니라 ‘대표’일 수 있다.

그가 조직에 남아 있다는 것은, 그를 유지시키는 시스템이 작동하고 있다는 뜻이다.
그를 감싸는 관리자의 방관, HR의 무대응, 동료의 침묵이 바로 그를 키운 삼박자다.
그리고 그 삼박자는 결코 특별하지 않다. 대부분의 조직에서 반복되는 익숙한 풍경이다.

그러므로 빌런은 ‘시스템 바깥’에 존재하는 존재가 아니라, 시스템이 만든 존재이며, 조직의 일원으로서 당연하게 취급되는 사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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