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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중인격자 (1994)

나의 그림자와 마주하게 만든, 불편하지만 진실한 노래

by 파사리즘
어둠 속을 도망치는 상처 입은 들짐승의 눈빛처럼
세상 사람 모두에게서 나를 지키려

부드러운 웃음 속에 날카로운 이빨을 감추어 두고서
때와 장소 계산하면서 나를 바꾸려

내 마음 깊은 곳에는 수많은 내가 있지만
그 어느 것이 진짜 나인지

이중인격자 외로운 도망자
하지만 해가 갈수록 삶은 힘들어

이중인격자 외로운 비겁자
어차피 승리와 패배, 중간은 없다

내가 만든 허상 속에
갇혀버린 나 자신을 저주해도
돌아나갈 길은 없다 그냥 가야해

내 마음 깊은 곳에는 수많은 내가 있지만
그 어느 것이 진짜 나인지



신해철의 음악은 언제나 내면을 정면으로 응시하게 만든다. 그것도 마주하고 싶지 않은, 가장 꺼내기 싫은 감정과 기억을 들춰내며.〈이중인격자〉는 그중에서도 가장 불편한 진실을 마주하게 만든 곡이다.

처음 이 노래를 들었을 때가 중학교 시절 질풍노도의 시기였다. 그러나 나에게 이노래는 고등학교 시절에서 세상과 나 사이의 거리감을 가장 깊이 느끼던 시절 속에서의 울림이 가장 크게 와닿는다.


“나는 이중인격자”라는 도입부를 들으며, 나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였던 기억이 있다. 나는 그 시절 늘 '괜찮은 사람'처럼 보이고 싶어 안간힘을 쓰고 있었지만, 속은 늘 무너지고 있었다.


부모님의 이혼, 혼자서 세상을 살아가야 한다는 두려움.

누군가를 미워하면서도 착한 척했고, 분노하면서도 웃었고,도망치고 싶으면서도 책임감을 가장했다.


신해철은 이 노래에서, 사회가 만들어낸 착한 인간의 외피를 벗겨내 버린다.

그리고 그 안에 숨어있는 우리 모두의 내면을 끄집어낸다.

“어차피 승리와 패배, 중간은 없다” 이 한 줄은 당시의 교육, 사회 분위기, 그리고 우리 세대가 공유했던 감정억제의 문화 그 자체였다.


하지만 그는 말한다. 그렇게 억누른 감정들이 결국 ‘이중인격’이라는 괴물을 만든다고.

〈이중인격자〉는 락의 형식을 빌려 심리적 압박과 감정의 부조화를 강렬하게 표현한다.


그의 목소리는, 마치 내면에 숨어 있는 제2의 내가 외치는 듯했고

기타와 드럼은 마음 속에서 요동치는 폭발을 고스란히 구현해냈다.


이 곡을 들으며 처음으로

“내가 느끼는 불일치가 이상한 게 아니었구나” 하고 자기 위로를 배운 기억이 있다.


내가 문제인 게 아니라, 이 사회가 ‘문제 없는 사람’을 강요한 것이라는

거대한 역설을, 신해철은 음악으로 대신 말해주었다.


어느덧 40대 중반에 접어들며 회사와 가정, 인간관계 속에서 나는 또 다른 가면을 쓰고 살아갔다.


겉으로는 사회적 리더, 부모, 조언자이지만

내 안에는 여전히 해결되지 않은 두려움과 열등감이

고요한 폭풍처럼 살아 있었다.


그리고 그때마다 이 노래가 떠올랐다.

“왜 웃고 있지? 속으론 울고 있는 건데…”


어느 순간 나는

이 노래를 ‘청춘의 분열’을 그린 곡으로만 보지 않게 되었다.


〈이중인격자〉는 단순히 사춘기의 방황이 아니라, 살아가는 모든 순간에 겹겹이 쌓이는 나의 모습들을 들여다보게 만든다. 그것은 어른이 되어도 끝나지 않는 싸움이고, 또한 나 자신을 조금씩 이해해가는 여정이다.


신해철은 이 곡을 통해 ‘진짜 나’와 ‘사회적 나’ 사이의 모순을 고발하는 동시에 그 균열을 인정하고 살아가라고 말한다.


이중인격자는 현대인 모두의 자화상이라고 말이다.

지금도 나는 내 안의 여러 얼굴들과 공존하며 살아간다.

그것이 어른이 된다는 것이고,
그것이 인간이라는 이름의 복잡한 생명체가 살아가는 방식 아닐까.


퇴근 후 조용한 방에서 이 노래를 틀면, 오늘 하루 내 안에서 충돌했던 모든 인격들이 잠시 숨을 고른다.

그리고 속삭인다.
“괜찮아, 너는 오늘도 잘 살아냈어.


이중인격자라도, 넌 너니까.”



Writer. 파사리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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